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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전생 더 빌런-271화 (271/367)

무한전생-더 빌런 271화

26-빌런본색

정호태는 말꼬리를 흐렸다.

“뭔가가 있었네요.”

[네. 사실 내부 파벌 싸움에서 패배한 세력을 숙청한 결과였죠.]

경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혹시 그가 상사의 지시를 받아 수사 하나를 뭉갰다는 소문을 알고 계십니까?”

[네, 김견민 씨가 반발 없이 지방 전출을 수락한 이유 중 하나였죠.]

“어떤 사건인지는 아세요?”

[교통사고인 걸로 알고 계십니다.]

“그 사고 피해자는요?”

[거기까지는 잘 모릅니다.]

“그렇군요.”

김배진의 부친, 김견민의 죽음에는 그 교통사고 무마가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판검사 살해범의 피해자가 되기에는 충분한 동기겠지.

“알겠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감사랄 것까지야 있나요. 그냥 아는 이야기를 늘어놓았을 뿐인데. 그런데 경완 씨.]

“네.”

[혹시 끼어드실 생각이신가요?]

“흐음…… 잘 모르겠습니다. 모호하네요.”

세상만사가 선을 그은 듯이 명명백백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흑백이 분명한 사건보다 흑백의 경계선에 놓인 사건이 훨씬 많았다. 아니 그런 일들이 세상일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러니 정호태의 말만 듣고 김견민이 본인의 권한을 남용한 부패검사라고 단정 내릴 순 없었다. 협박, 상사나 선배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일신상의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경완의 판단은 그런 디테일까지 충분히 챙긴 후에 내려질 것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었으니까.

“일단은 물어봐야겠어요.”

[뭘요?]

“왜 김견민 씨를 죽였는지.”

[……범인은 어떻게 찾으시려고요?]

“뭐, 재주껏 찾아야겠죠.”

[경찰이나 검찰과 공조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니요. 그럴 생각은 없어요.”

남자가 가오가 있지, 이미 안 돕겠다고 말했는데도 돕겠다고 나서는 건 좀 그랬다.

물론 그가 그렇게 뻣뻣한 인간은 아니었다. 충분히 자존심을 접고 말을 주워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상대에 따라서지, 자기네들이 쌓아온 업보를 부끄러워하기보단 조직의 권위와 체면, 그리고 권력부터 생각하는 인간들에게 굽힐 자존심 따위 경완에겐 없었다.

그 대답에 정호태는 잠시 말이 없다가 이런 제안을 꺼냈다.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아유~ 아닙니다. 이런 거 괜히 도와줬다고 수사기관하고 척을 지게 할 순 없죠.”

앞으로 한국에선 정호태 지부장이 비빌 구석이 되어줘야 하는데 이런 별것 아닌 일로 빚을 질 순 없었다.

김배진에게는 미안하지만 정호태 지부장의 도움을 받기에는 정말 별것 아닌 일이었다.

[수사기관이 모르게 돕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나중에 제가 막혔을 때 도움을 요청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잠시 침묵했다가 대답하는 정호태 지부장의 목소리에서 안타까움인지 아쉬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

경완은 통화를 끊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나는 왜 정호태 지부장의 호의를 거절했는가? 정말 그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아서?

그걸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어느 마음 한구석에 있는 어떤 찜찜함 때문이었다.

경완이 생각에 잠긴 건 그 찜찜함을 감지하고 이유가 무엇인지, 자신의 무의식이 무엇을 생각한 것인지 자신의 내면에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그 답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그 원인에는 더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한 비질란스의 오라클과의 대화에 있었다.

위버멘쉬를 너무 믿지는 말라는 말, 그리고 그들이 비질란스의 복수자들을 흡수했다는 말.

이번 판검사 살해사건 역시 같은 맥락이 아닐까? 정말 위버멘쉬에 흡수된 비질란스가 저지른 일이라면 과연 정호태 지부장이 그걸 모를까? 공교롭게도 수사능력이 뛰어난 초능력자가 미국에 연수받으러 간 것은 우연일까?

이런 의문이 무의식에 남아 있었으니 무턱대고 정호태 지부장의 호의를 받아들이기가 찜찜했던 것이다.

결국 그의 호의를 거절한 건 잘했다고, 경완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움직였다. 일을 질질 끌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와서는 천리안 기계 남는 거 있냐니? 경완 씨 무슨 일을 하려는 거예요?”

마리아 소장은 갑자기 몰래 나타난 경완을 보면서 어이없어했다.

이에 경완은 이유를 적당히 풀었다. 가르치고 있던 김배진이라는 소년의 부친이 판검사 살해범에게 살해당한 것과 그 소년과 했던 조건 붙인 약속에 관해서 말이다.

다만 판검사 살해사건의 뒤에 어둠의 위버멘쉬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차라리 수사기관하고 협조하는 게 어때요?”

“그럴 순 없죠. 이야기를 들어보고 이유가 합당하면 놓아줄 생각인데요?”

“……누구를요?”

“범인을요.”

경완의 대답에 마리아 소장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경완은 뻔뻔한 표정으로 콧대를 높였다.

“제가 누구라고 생각해요?”

“그래요. 대한민국 국회의원 테러범 1호죠.”

그건 김두한의 국회 오물 투척 사건과는 완전히 결이 달랐다. 정치 비자금, 검사 살인 청부 등 경악할 일이 얽혀 있었으니까.

마리아 소장은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좋아요. 도와줄게요.”

“우리 마리아 소장님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성격이 많이 유순해졌네요.”

경완이 한마디 하자 마리아 소장이 도끼눈을 떴다.

아차! 여자에게 나이는 금기였던가?

경완은 얼른 시선과 고개를 돌리고 의뭉을 떨었고, 그런 그의 도끼눈으로 보던 마리아 소장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천리안 장비 운용에 보조가 필요한 건 알아요?”

“소장님께서 도와주시죠.”

마리아 소장이라면 검찰이나 경찰에게 경완이 천리안 장비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설사 들키더라도 기밀을 요구하는 실험이 목적이라고 하면 누가 의심하겠는가?

“하아…….”

경완의 뻔뻔함에 한숨을 내쉬던 그녀가 뭔가를 결심했는지 눈을 빛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나중에 제 연구를 도와줘야겠어요.”

“어쩔 수 없죠.”

경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귀찮았지만 세상일엔 공짜가 없는 법이다.

아무튼, 그를 돕기로 한 마리아 소장은 소형화 시험 중이라는 천리안 장비를 가져왔다.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요?”

외관이 좀 더 세련된 것 빼고는 컨테이너 운반하는 트럭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이미 예전에 봤던 것도 저런 모양이었는데 뭐가 바뀌었다는 걸까?

“자율주행 차량에 실었어요.”

그렇구나.

솔직히 그럴 필요까지 있나 싶었지만 천리안 장비를 자율주행 차량에 실은 이유를 굳이 알 필요는 없었다.

“그럼 갑시다. 아 참! 범행 장소 근처에 가면 안 된다는 거 아시죠?”

“물론이죠. 그리고 이번 일은 천리안 장비의 이동 테스트 점검이라는 명분으로 할 거예요.”

천리안 장비의 운용은 멈춰있는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엄밀히 말해 지구와 태양계는 항상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정지상태라는 표현은 본질적으로 매우 모호한 말이지만, 아무튼 천리안 장비 운용은 정지 상태에서 시행되었다. 움직이는 차량 안이라는 환경이 천리안 장비 운용자의 집중 상태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리안 장비의 이동 중 운영은 전략으로 매우 커다란 장점임은 분명했기 때문에 이렇게 자율주행 차량에 탑재해 운용하는 방법이 고안되었다고 마리아 소장은 설명했다. AI 딥러닝을 바탕으로 한 자율주행 기술의 운전능력은 이미 인간의 운전실력을 따라잡았고, 천리안 장비를 실은 트럭에 탑재된 자율주행 기술은 천리안 장비 운용자에게 마치 안방 같은 승차감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마리아 소장의 설명에 경완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야~ 대단하네요.“

단순히 알려고 하지 않았던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왜 갑자기 이경완이 천리안 장비를 운용했냐는 일말의 의심마저 쉴드 칠 수 있는 좋은 핑계였기 때문이다. 그가 마리아 소장의 천리안 장비 개발에 중요한 테스터인 것을 생각하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인선.

“그럼 갑시다.”

“나중에 제 연구 도와주는 거,”

“아 제가 언제 약속 어긴 적 있어요?”

마리아 소장은 수긍하고 차량에 탑승했다. 경완이 그 뒤를 따랐고, 자율주행 트럭은 그가 알려준 경로를 따라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김배진의 부친이 살해당한 자택에서 약 1㎞ 정도 떨어진 곳으로, 트럭은 범행 현장을 중심으로 거리를 유지한 채 반시계방향으로 돌 예정이었다.

“어때요?”

“좋은데요?”

마리아 소장의 물음에 경완이 대답했다. 천리안 장비 이동용 자율주행 트럭은 지면의 상태까지 체크하고 운전해서 최적의 승차감을 제공한다나?

마리아 소장이 내비게이션을 확인하고 말했다.

“범위 안에 들어왔어요.”

“시작하죠.”

경완의 말에 그녀는 천리안 장비를 작동했고, 경완은 자신의 의식이 확대되는 것을 느꼈다.

천리안 장비를 사용할 때 느끼는 그 특유의 유체이탈감각과 함께 의식이 차량을 벗어났다. 벗어난 의식의 시야에 도심이 들어왔다.

그는 정신을 김배진의 집으로 이동시켰다. 아직 채증이 마무리되지 않았는지 폴리스 라인이 처져 있었고, 사람은 없었다.

그는 현장에 남은 흔적들을 확인해서 사건을 재구성해 보려 했다. 범인은 어떻게 침입해서 어떻게 범행을 저지르고 어떻게 빠져나갔을까?

천리안 능력으로 강화된 감각에 걸려든 흔적들을 짜 맞춰 나가다 보니 사건 당시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범인은 창문으로 들어와 혼자 있던 김견민을 제압했다. 그리고 잠시 뭔가 대화를 나누었고 몸싸움이 벌어졌다. 몸싸움이라기보다는 살기 위한 김견민의 몸부림에 가까웠다.

살해도구는 초능력. 응축된 파이로키네시스가 예리한 메스가 되어 목을 그었다.

김견민을 죽인 범인은 그 극한에 도달한 컨트롤로 머리카락 한 올도 남기지 않고 자신의 흔적을 태워버렸다. 곳곳에 자리한 그을린 자국은 증거인멸의 흔적으로 일말의 체취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증거를 인멸한 범인은 도로 창문으로 나왔다.

그리고 아무런 흔적도 잡히지 않았다.

근처 CCTV에 모습이 잡혔다면 수사기관이 경완을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말은 지상이 아니라 하늘로 도주했다는 말인데…… 자력비행이 가능한 염동력도 있는 모양이었다.

경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도저히 답이 없는 상황이랄까? 도저히 추적할 단서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초감각을 끌어올렸다. 뭐든 해보고 안 되면 포기할 요량이었다.

끌어올린 초감각이 범인이 흔적을 지우다가 남긴 탄 자국에 집중되었다. 혹여나 초능력 발현의 매개체인 S입자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지만, 기대는 기대에서 끝났다. 파이로키네시스가 경지에 올랐는지 S입자의 흔적마저 태워 버린 듯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았다.

경완은 결국 현장의 흔적으로부터 범인을 추적하는 걸 포기했다.

“소장님. 수고하셨어요.”

“끝났어요?”

“포기에요, 포기. 흔적이 하나도 없어요.”

사건 발생 직후에 흔적을 찾는다더라고 과연 그것이 가능했을까 싶을 정도였다. 작은 흔적마저 소각해 버리는 파이로키네시스라니. 에스퍼 능력도 갖추고 있지 않을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런 경완의 말에 마리아 소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소득이 없었다고 약속을 취소하는 건 아니죠?”

“제가 그 정도로 양아치는 아니에요.”

비록 범인을 추적할 단서도 못 잡았고 마리아 소장의 연구를 도와야 하니 밑진 장사가 되어버렸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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