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273화
26-빌런본색
“제가 작정하고 찾으러 다니면 못 찾을 것 같아요?”
“3일 후에 접선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당신의 말을 수용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럼 제가 걔네들 찾아다니는 거죠. 3일 후라고 했으니까 나흘 후 이 시간까지 내가 원하는 거 저기 전봇대 꼭대기에다가 달아두라고 전해줘요.”
경완은 그렇게 말하고 어두운 하늘로 날아갔다. 그리고 십 분쯤 뒤에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갔다.
호기롭게 말 안 들으면 찾아낸다고 말했지만, 좀 더 편하게 그러려면 판검사 살해범의 뒤를 쫓아서 좀 더 정보를 모으는 편이 좋지 않겠냐는 발상이었다.
물론 판검사 살해범이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뒤통수가 얼얼할 정도로 어이가 없겠지만, 다행히도 경완은 그의 뒤를 쫓을 수 없었다.
판검사 살해범이 서 있던 자리엔 탄 흔적만 남아 있었을 뿐 마커의 자취는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지? 파이로키네시스로 마커를 태워버린 건가?
가능성이 없진 않았다. S입자는 심상을 따르고 파이로키네시스는 소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판검사 살해범의 감각은 예민했으니까.
마커같은 수상한 걸 감지하고 지워버렸을 가능성은 충분했고, 경완은 생각보다 판검사 살해범의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와야 했다.
나흘 후, 경완은 약속 장소에 갔다. 범인들이 그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 전봇대 위에 서류가방이 걸려 있었다.
그걸 들고 집에 돌아온 그는 서류가방 안에 있던 내용물을 확인했다. 꽤 오래되어 보이는 수사 파일과 신상 USB가 들어있었다.
수사 파일에는 경완이 들었던 교통사고 사건에 관련된 것과 그 외에도 일고여덟 개 정도의 사건에 관련된 파일이 더 있었다.
서류에 찍혀있는 사인과 직인을 보니 검찰 캐비닛에서 빼내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경완은 사건 파일을 확인하고는 USB를 컴퓨터에 꽂았다. 영상 파일 몇 개와 사진 여러 장, 그리고 하나의 문서 파일이 있었다.
문서 파일에는 김견민이 저질렀던 독직행위와 그로 인한 피해,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에 대해 간략히 정리되어 있었다.
경완이 보라고 친절하게 정리해 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이 확보하고 정리한 내용을 그대로 전달한 느낌? 마치 상사에게 보고하기 위해 자료를 취합하고 분석한 것 같은 문서였다.
그래서 그런지 경완에게 잘 봐달라는 그런 느낌은 일절 없었고 오히려 딱딱하고 사무적인 느낌이었다. ‘우리는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라는 메시지를 받은 것 같은 건 기분일까?
한 주가 지나고 특별 강사 이경완의 강의시간이 돌아왔다.
“저기…… 강사님.”
김배진은 경완을 불렀다. 간절한 소년의 눈빛에 경완은 이렇게 말했다.
“강의 끝나고 얘기하자.”
보아하니 미리 말해주면 강의가 진행이 안 될 것 같았다.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고 욕먹겠지만, 우는 건 오늘 강의 끝나고 해도 충분했다.
어색한 분위기였지만 경완은 냉정하게 할 일을 진행했다. 아이들의 능력 발현을 관찰하고 잘못된 습관을 지적했으며 훈련 방향을 지도했다.
그렇게 강의 시간이 다 끝날 때가 되자 누구보다 먼저, 경완보다 먼저 김배진이 말했다.
“강의 끝났어요!”
마치 악을 지르는 듯한 목소리엔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경완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소년에게 서류가방을 내밀었다.
“이게 뭐죠?”
“직접 보고 확인해라.”
경완의 말에 김배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류가방을 받았다.
간신히 가방을 받은 소년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경완의 대답은 자신의 부친이 판검사 살해범의 표적이 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더러운 검사라는 말이었기에.
“거짓말이죠?”
“네가 판단해라.”
받은 서류와 USB의 영상과 사진이 조작되었는지 김준을 불러다가 급히 확인했지만, 조작된 정황은 없다는 의견을 받았다.
100% 확실한 건 아니지만, 수사 서류는 검찰에서 빼내온 것이 확실했고, 김견민이 룸살롱에서 향응을 받은 장면이 녹화된 영상도 조작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경완이 이렇게 가방을 내밀 리 없었다. 그는 김준에게 다른 수사 파일에 있던 사건과 관련자 이름을 말해주고 교차검증을 부탁했다.
김준은 경완의 진지한 표정에 흥신소나 할 법한 일을 처리해 주었고, 결론적으로 김배진의 부친, 김견민은 부패검찰이 확실하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김배진과의 약속대로 행하는 것뿐.
“거짓말! 거짓말!”
김배진은 자신의 손에 들린 서류 가방을 바닥에 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경완은 소년이 소리를 지르며 현실부정을 시작하자마자 한 마디를 남기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유감이다.”
그리고 멀어지며 작은 점이 되었다.
더 있기 불편해서 튄 것이다.
* * *
“너무했다. 진짜. 정말.”
미연이 가자미눈으로 경완을 흘겨보며 경완을 비난했다.
경완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애써 변명했다.
“애 달래주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그리고 어설픈 동정은 걔 미래를 위해서라도 도움이 안 돼.”
경완의 말에 미연은 애써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런 인간일 줄 몰랐나? 자신에게도 비싼 년이 되라느니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인간이었다.
그녀는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그 부친이라는 사람이 정말 나쁜 사람일까?”
“그 사람 때문에 자살한 사람이 세 명이고 파괴된 가정이 다섯 개라더라.”
대답하는 경완의 목소리를 단호했다.
“확인해 본 거야?”
“김준 씨가 확인해 줬어.”
CIA가 혹여나 그를 속이지 않았을까라는 의심이 없진 않았지만, 굳이 미국이 그럴 이유도 딱히 없는데, 그 이유나 동기가 무엇일지 생각나지도 않으면서 무턱대고 의심하는 것도 정신병이었다.
경완의 대답에 미연은 씁쓸한 표정으로 혼잣말하듯 물었다.
“……하지만 꼭 죽여야 했을까?”
“그거 외에는 방법이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지.”
경완이 대답했다.
부당한 기소로 망해 버린 중소기업 사장의 가족, 불법 용역에게 맞아 죽은 파업 청년, 마약 빤 재벌 3세의 교통사고에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버린 아이 등, 기소권 남용으로 뭉개진 사건의 수사 파일에 있었던 일은 꽤 오래된 과거였지만, 그중 한 명이라도 제대로 된 항의나 저항을 할 능력이 있었던 이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하지만 경완의 생각에 그 사건들은 그저 명분에 불과한 것 같았다. 그는 USB에 담긴 간략한 정리본의 마지막에 있던 문구를 떠올렸다.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다시 검찰 중추부에 자리 잡기 위해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음.’
과거 행적만 보아도 분명 권력 지향적인 사람이었다. 줄타기에 실패하고 지방으로 좌천당했던 일도 그런 김견민의 성품을 바꾸진 못했고, 기회가 생기자 다시 정력적으로 움직였다.
중앙지검도 아니고 수원지검에 있던 검사를 죽여야 했던 이유는 거기에 있지 않을까? 중앙지검의 검사를 죽여봤자 카르텔에 속한 누군가가 그 자리를 채울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살해 현장에 남겨진 ‘Who is Watching the Watchdog?’라는 문구는 의미심장했다.
판검사들이 저들이 저지른 범죄나 비리에 관해서는 매~우 관대한 법리를 적용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으니, 하물며 잘못된 판결과 자기들 이익을 위한 기소권 남용에 대해서 불이익을 받을 리가?
“정말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미연의 의문에 경완이 대답했다.
“모든 병폐는 치료시기가 있는 법이야. 사회를 일종의 생물로 보면 부패 역시 마찬가지지.”
부패는 일종의 사회적 질병이다. 그 질병을 조기 진단해서 대처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지만, 그 부패가 깊게 박혀 일종의 ‘사회적 질서’가 되면 해결이 무척 어렵다. 그 부패구조에 기생해서 사는 기득권의 저항이 격렬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적폐 기득권의 저항을 뚫어내지 못하게 되면 망국으로 가는 질병이 되는 것이다. 마치 고려말이나 조선말처럼 말이다.
“종양도 절제하잖아? 그런 거라고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오빠는 지금 살인자 편드는 거야?”
“넌 날 누구라고 생각하니? 내가 누구를 살인했다고 비난할 군번은 아니잖아?”
경완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미연을 보았다. 그야말로 현존하는 최고의 살인마 아닌가? 정부조차 감히 잡아 가둘 생각을 못 하는.
하지만 그 부분을 지적한 건 실수였다. 미연의 표정이 싸늘해졌으니까.
경완은 말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급히 화제를 변경했다. 그녀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가 이경완 살인마라는 소리였다.
“여름도 왔으니까 어디 피서 갈까? 예전에 그 무인도에 바스티앙도 부르고 네 친인들도 부르고 파티하자.”
하지만 미연의 표정은 좀처럼 풀릴 줄 몰랐고, 경완이 밤늦게까지 침대에서 힘을 쓰고 나서야 간신히 풀렸다.
* * *
“김배진은?”
“연락 안 돼요.”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강습시간이 돌아왔지만 김배진은 나타나지 않았다. 저번 주에 줬던 자료가 꽤나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쯧쯧.”
경완은 혀를 차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아이들의 귀에 그가 혀를 차는 이유가 안타까워서인지 못마땅해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수업하자.”
“저, 강사님.”
“왜?”
김신이라는 소년이 부르자 경완이 반문했다.
김신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걱정 안 되세요?‘
“누구? 김배진?”
“네.”
“걱정되지.”
“그럼, 찾아가 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왜?라고 쏘아붙이고 싶었던 경완이었다. 왜냐면 그는 교육자가 아니었으니까.
똘똘한 애들 가르치는 재미가 없진 않았지만 교육자로서의 사명감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그가 아이들에게 자신을 선생님이 아니라 강사님으로 부르라고 한 것이다. 그는 누군가의 스승이 될 생각이 없었으니까.
처음에는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했는데, 그래도 애들이 개념은 있어서인지 감히 아저씨라고 부르기 거북해하니까 타협해서 강사님이라고 부르라고 한 것이다.
아무튼, 김신의 물음에 경완은 잠시 뜸을 들였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김신의 질문이었다.
육체강화능력과 무게 제어 능력을 가진 김신은 히어로 지망생. 즉, 오지랖이 넓을 수밖에 없었다. 히어로란, 영웅이란 본질적으로 남일에 두 손 걷고 먼저 나서는 오지라퍼들이니까.
아무리 요즘 히어로가 히어로는커녕 아이돌처럼 되어가서 히어돌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고 있지만, 김신이 꿈꾸는 건 히어로였지 히어돌이 아니었다.
그런 아이에게 오지랖 그만 부리고 네 일이나 신경 쓰라고 해봤자 수긍할 리가 없었고, 그런 불만을 속에 쌓은 채로 수업에 제대로 집중할 성격도 아니었다.
그래서 경완은 이렇게 입을 털기 시작했다.
“걔에게는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할 거야.”
“정말요? 누군가 힘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고요?”
“친구나 가족이라면 몰라도 내가?”
네가 생각해도 힘이 되어주기는커녕 쓴소리나 해댈 것 같지 않니?
그런 뉘앙스에 김신은 입을 다물었다. 경완이 김배진을 찾아가지 않는 이유를 절대적으로 이해한 분위기였다.
김신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 모두 말이다.
덕분에 수업은 별말 없이 끝낼 수 있었지만 아직 김배진과 얽힌 일은 끝나지 않았다. 그가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자 국정원의 서충헌, 서울지검장, 경찰청장, 이렇게 세 명이 다시 방문한 것이다.
“무슨 일이세요?”
서충헌은 말없이 경완의 눈앞에 서류가방을 들어 보였다. 낯이 익은 것이 경완이 김배진에게 준 것이었다.
서충헌이 굳은 표정을 말했다.
“설명해 주셔야겠습니다.”
경완은 설명해주었다.
“김배진의 부친인 김견민의 비위(非違)자료요.”
“그걸 묻는 게 아니잖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