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전생 더 빌런-279화 (279/367)

무한전생-더 빌런 279화

26-빌런본색

김 회장은 경완의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이경완에게 웜홀 능력이 있다는 건 유명한 사실. 그가 원하면 김 회장의 시신을 저~기 남극 빙하 밑, 아니면 태평양 저 아래에서나 찾아야 할 수도 있었다.

김 회장은 심장이 두근거려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내, 내가 뭘 해야 하나? 마, 말만 하게.”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협박한 것 같잖아요.”

“…….”

그럼 여태 협박한 게 아니라는 말인가?

황당하지만 김 회장은 경완의 눈치를 살폈다. 까딱하다가는 영영 실종될 상황이 아닌가?

“저는 그냥 서충헌 차장이 김 회장님에게 엿을 먹이려고 했던 걸 가만히 놔둘 건가 싶어서 궁금한 것뿐이죠.”

“…….”

서충헌이? 나한테 엿을 먹여?

김 회장이 어이가 없어서 어리둥절하자 경완은 친절히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왜 그렇잖아요? 그 사람이 괜히 김 회장님을 불러내서 이상한 일에 동참시키려고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렇게 이 야밤에 만날 이유가 없잖아요?”

황당한 궤변에 불과했지만, 김 회장의 감정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갑자기 안방을 침범당한 이 모욕, 생존을 위협당한 두려움의 원인은 이경완이지만 정말 이게 온전히 이경완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는가?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그러한 질문에 예스! 엡솔루틀리 예스!라고 외치겠지만 김 회장은 상식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상식적인 인간이 온갖 원한과 오욕으로 점철된 언론사주라는 자리를 붙잡고 살 리 없잖은가?

게다가 예스라고 대답해도 법도 아랑곳하지 않고 총알도, 폭탄도 먹히지 않는 이 미친놈에게 원한을 갚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김 회장은 가진 게 많지 않은가? 이경완보다 가진 게 많았다. 그래서 이경완과 충돌해서 그 모든 걸 날릴 생각이 없었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움켜쥐고 즐기다가 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화가 났다. 누구에게? 서충헌 그 새끼에게!

정부와 미국이 괜히 가만히 있는 게 아닌데 자기한테 바람을 집어넣으려고 불러내서 헛소리를 해대서는 결국 이 사달을 만들지 않았는가?

경완은 김 회장의 눈가에 서린 분기(憤氣)를 감지하고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제가 서충헌 그 사람을 엿먹이려고 하는데…… 동참하실래요?”

김 회장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원래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 화풀이하는 존재다.

* * *

“이경완 씨! 폭행당한 피해자가 국정원 소속이라는데 사실입니까?!”

“이경완 씨! 그동안 조용히 준법 시민으로서 생활하셨는데 갑자기 폭행을 저지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경완 씨! 한 말씀만!”

“이경완 씨!”

법원으로 출두하는 경완을 향해 기자들이 파리 떼처럼 몰려들었다.

하지만 취재 욕심에 무례하게 구는 이들은 없었다. 무례하게 굴고 싶어도 과도하게 접근하는 마이크나 카메라는 검은 연기의 염동력에 원천 차단되었다.

경완은 법원 입구에 서서 뒤로 돌았다. 언제 소란을 피웠냐는 듯이 그의 이름을 부르짖던 기자들의 입이 다물어지고 조용해졌다. 드디어 입을 여는 이경완의 말을 녹취하기 위해 기자들은 숨을 죽였다.

“저를 고소한 서충헌 국정원 차장은 제 연인인 미연을 미끼로 저를 협박하였습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파도소리처럼 몰아쳤다.

경완은 침중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순간 화를 참지 못해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하지만 사과할 마음은 없습니다. 서충헌 차장에게 합의를 제안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저 법의 판결에 겸허히 따르겠습니다.”

경완의 말에 다시 한번 카메라 누르는 소리가 물결쳤고 기자들은 속보를 보낸다고 바빠졌다. 중국 공산당을 무너뜨린 초인이 대한민국 법원의 판결을 겸허히 따르겠다고 말한 것 자체가 엄청난 이슈였다.

하지만 기삿거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서충헌 차장을 협박죄로 고발할 예정입니다.”

언론은 권력의 향방에 민감했다. 언론밥 좀 먹은 이라면 기자건 기레기건 경완의 고발선언이 시사하는 바가 뭔지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이건 초능력자의 영향력과 전통적 정부 권력의 충돌현상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한민국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했고, 자기에게 원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각 세력이 이합집산을 시작할 것이다.

시사평론가들은 경완의 선언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이경완이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졌다!’

그러다 보니 판검사 연쇄살인 사건은 사람들의 흥미에서 밀려 나갔다. 법조계의 영향력 덕분에 언론이 카메라를 완전히 치운 건 아니었지만, 부패한 판검사가 뒈지는 일 따위는 실제적 여론의 관심사 밖이라는 걸 증명할 뿐이었다.

전체 형사사건에 대한 기소율이 약 30%, 그리고 검사에 대한 형사사건 기소율이 0.2%에 불과한 나라에서 법의 테두리 밖에 있는 판검사가 사기를 당하든 강도를 당하든 살해를 당하든 대중이 공감할 수 있을 리가.

[그런 일이 있으시면 제게 전화를 하시지. 서운합니다.]

기사가 난 이후 위버멘쉬 한국 지부장 정호태가 경완에게 연락했다.

경완은 괜찮다는 듯이 정호태 지부장을 다독였다.

“고작 이 정도 가지고 지부장님을 번거롭게 할 순 없죠.”

[아닙니다. 국가가 공권력을 동원해 초능력자를 협박하려고 하다니. 이건 예전부터 초능력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려던 전형적인 방법이에요.]

초능력의 각성은 혈통과 부귀를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국가질서를 우려하는 이들은 어떻게든 초능력자의 목에 목줄을 걸려고 했고, 당연히 반발하는 초능력자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찌보면 위버멘쉬는 그 반발세력이 뿌리 뽑히지 않고 마침내 꽃을 활짝 피운 조직이라 할 수 있었으니, 공권력이 초능력자를 억압하려는 사례를 가만히 둘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대상이 이경완이라니!

만일 경완이 서충헌 차장의 협박에 굴복했다면 그 상징성은 위버멘쉬에 큰 타격이 될 수 있었다. 돈과 권력이 있는 이들에게 강력한 초능력자의 목에 목줄을 걸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니까.

“아. 그래요?”

[물론입니다. 그러니 서충헌 차장이라고 그랬나요? 그 인간을 본보기로 삼는 일에 동참케 해주시죠.]

“그렇게 해주시면야 저야 감사할 나름이죠.”

경완의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왜 서충헌 차장과의 충돌이 있고 나서 정호태에게 곧바로 연락하지 않았느냐면 이렇게 저쪽에서 먼저 손을 뻗길 기대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도움을 받을 거라면 빚을 안 지는 쪽이 낫지 않겠는가?

정호태 지부장으로부터 막강한 위버멘쉬 법무팀의 지원을 약속받았으니 박근태 변호사의 업무는 한결 수월해졌다.

경완은 생각을 정리했다. 이것으로 위버멘쉬의 영향력을 빌렸으니 정호태 지부장이 뒤통수를 치지만 않으면 서충헌 편을 들어줄 기득권의 영향력을 충분히 견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내면 결과가 싱거워질 수 있었기에, 이관영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둘은 이관영만이 아는 인적 드문 장소에서 비밀스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충헌 차장 날리면 콩고물 좀 떨어지겠죠?”

“네?”

“친한 사람이 그 자리에 올라가면 이 차장님에게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니면 친한 사람 없어요?”

“아니. 있기는 하지만…….”

“그 사람도 일본돈 먹은 사람이겠죠?”

“…….”

대답이 곤란한 이관영은 입을 다물었다.

경완은 입을 다문 그의 모습에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유상종이라 했으니 일본돈을 받던 이관영과 친하게 지내는 인물도 비슷한 종자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 이경완의 컬트적 인기를 생각하면 일본돈 먹은 사람이 서충헌 차장의 자리를 차지해도 나쁠 건 없지 않은가?

“왜요? 새삼 나라 팔아먹는 기분이에요?”

짓궂게 툭 던진 말에 이관영은 펄쩍 뛰었다.

“아니! 무슨 나라를 팔아먹는다는 말입니까?! 저는 그저 한일 양국의 우호를 위해서 중간에 기름칠을 좀 했을 뿐입니다!”

“나는 알 것 같은데요? 나라 팔아먹는 매국노의 심정을.”

“네?”

“왜 그렇잖아요? 윗대가리 새끼들은 답이 없지, 애국하고 싶어도 앞이 깜깜하지, 이 병신 같은 나라 내가 안 팔아먹으면 다른 놈이 먼저 팔아먹을 것 같으니 차라리 내가 먼저 팔아먹고 일신의 영달이라도 누리자 따위의 심보가 아니었을까요?”

경완의 말에 이관영은 멍청하게 눈을 껌벅이고 물었다.

“애국. 하고. 싶으셨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생각해봐요. 나 때문에 이 나라가 손해 본 거 있어요?”

“딱히 없는 듯,”

“딱히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득 봤잖아요. 중국 조져놨지, 일본이랑 우호증진 해줬지. 이 정도면 애국자 아닌가요? 적어도 이 차장님 눈에는 그럴 텐데?”

일본이랑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논리로 일본자금을 받은 ‘국정원 차장’ 이관영이라면 일본과의 우호증진을 이끌어낸 경완을 충분히 애국자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관영은 동의할 수 없었다.

“아니, 저기 태평양에서 일본 포경선단하고…….”

“아, 그래서 대양국제활용기구 덕분에 우리나라 기업들 이득 봤어요, 안 봤어요?”

“……. 봤습니다.”

이관영은 인정하기 싫었지만, 사실이 사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경완 덕분에 대한민국이 크게 이득 본 건 있어도 크게 손해 본 건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총체적으로 이득을 봤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렇게나 국익을 챙겨 줬는데 돌아오는 게 국가의 협박이면 제가 나라를 팔아먹고 싶겠어요, 안 팔아먹고 싶겠어요?”

“……이해가 됩니다.”

경완이 이관영이 자신의 말에 수긍하자 은근한 어조로 화제를 돌렸다.

“저도 이 차장님 입장이 어떤지 짐작은 돼요.”

“제 입장이요?”

“지금 국정원 내부가 상당히 혼란스럽지 않나요?”

“……그렇죠.”

무려 차장이나 되는 사람이 얽힌 사건이다. 차장 위에는 국정원장밖에 없고, 국정원장 자리란 대통령이 임명하는, 정권 교체 때마다 갈려나가는 기간제 임명직에 불과했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국정원이라는 조직을 이끌어나가는 존재는 국정원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장 잘 아는 내부인이자 가장 권한이 높은 차장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국정원장은 그저 국정원의 나아갈 방향을 가리킬 뿐이니, 차장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국정원장은 눈뜬장님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비단 국정원만의 문제가 아니었으니, 기간제 임명직이 윗대가리로 들어오는 모든 공무원 조직이 가지는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특징인 이유는 철밥통인 공무원 조직에 그런 식으로 목줄을 달아놓지 않으면 최소한의 자정도 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음지에서 활동하면서 영수증도 없이 막대한 특활비를 운용하는 국정원이니만큼 고인물이 되도록 놔두면 썩은 내를 폴폴 풍기면서 국가적 재앙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경완이 지적하려는 부분은 공무원 조직, 아니 모든 조직이 가지는 또 하나의 특징에 관한 것이었다.

“에~ 보자. 서충헌 차장이 속한 파벌이 있죠?”

이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차장님이 몸담은 파벌이 또 있을 것이고?”

“파벌이랄 것까지는 없고 그냥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 친하게 지내는 거죠.”

이관영이 입을 털자 경완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게 파벌의 시작이죠. 하나회가 처음부터 쿠데타로 국가 권력을 탈취하자고 모였겠어요? 그냥 몸집이 커지고 영향력이 세지니까 야망에 불이 붙은 거지.”

조직내 파벌이라는 게 그렇다. 서로 마음이 맞고 친한 사람들끼리 뭉치고 친분을 다진다? 단순히 취미나 생각을 공유하는 집단이 조직 내에서 마주하게 되는 건 한정된 승진 자리와 냉정한 경쟁사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