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280화
26-빌런본색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승진시켜야 하는 후보가 비등비등하다면 기왕이면 나랑 잘 맞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을 승진시키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지 않겠는가? 괜한 구설수에 휘말리기 싫다면 실적을 잔뜩 챙겨줘서 승진의 명분을 확보할 수도 있고.
한정된 자원과 경완은 조직 내에서 반드시 파벌이 형성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이유였다.
“그 두 파벌 친해요?”
“어…… 그렇게 친하진 않습니다만…….”
“그렇죠. 승진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기왕이면 날 끌어올려 주거나 밀어 올려줄 친인이 승진하면 좋겠죠.”
“커흠!”
이관영은 불편한 기침을 내뱉었다. 국정원 차장으로서 누군가를 조사 및 탐색하고 꿰뚫어보는 일에는 익숙해도 이렇게 역으로 읽히니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경완이 파벌을 언급한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서충헌 차장이 나가리 된 그 자리가 탐나는 파벌과 그 자리를 보호하려는 파벌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경완은 정확히 짚어냈고, 이관영 차장에게 좀 더 적극적인 무브먼트를 요구하는 것이다.
왜? 서충헌 차장이라는 인간의 사회적 영향력을 완전히 제거하고 싶어서. 단순히 협박죄로 고소해서 이름에 먹칠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 서충헌 차장이 돌아갈 둥지까지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경완의 의도가 아닐까?
기우에 그칠 생각이라기엔 이관영이 그를 하루이틀 관찰한 것이 아니었다.
이경완이라는 인간은 세간에 알려진 이미지와는 다르게 훨씬 명석하고 음흉하면서도 특히 뒤끝이 있었다. 뒤끝이 있다는 말은 성질이 더럽게 보일 정도로 뒷마무리에 신경을 쓴다는 뜻이었다.
그가 중국에서 중공 독재를 무너뜨린 이후 그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수시로 중국을 들락거리며 끝내 중공 부활의 불씨를 완전히 꺼버린 행동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결과로 지금 어떤 중국인도 중국 공산당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이경완은 후환을 남겨두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경완이 대답을 종용했다.
“그래서 서충헌 차장을 제끼고 싶어요, 안 제끼고 싶어요? 아니지, 서충헌 차장이 나가리되면 좋은 편이에요, 나쁜 편이에요?“
“……굳이 말하자면 좋은 편이죠.”
이관영의 대답에 경완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렇죠! 그렇다면 이 차장님이 하실 일은?”
“어…… 퇴로를 막는다?”
“아니죠. 이렇게 해야죠.”
이어진 경완의 계략은 이관영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철저했고 잔혹하다면 잔혹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그래야 내가 한국인이라고 안 봐준다는 본보기가 되죠. 그래도 최소한 죽이지는 않잖아요?”
평생 쌓아온 명예와 커리어에 똥칠을 하는데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이관영은 경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서충헌 차장을 동정했다. 애국심이 전혀 없는 친구는 아니었는데 일순간의 선택이 이런 참사로 다가오다니.
이관영은 신나게 (서충헌 차장을 엿먹일) 계략을 늘어놓는 경완을 보며 자신은 절대로 서충헌 차장 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 * *
“이런 빌어먹을!”
서충헌 차장이 자신의 사무실에 앉아 탁자를 내리쳤다.
그렇게 언론플레이를 했는데도 결국 이경완 폭행죄는 집행유예에 그치고 말았다. 법관들에게 ‘법의 판결을 겸허히 따르겠다’는 경완의 말이 중국을 작살낸 초인의 양보로 들려서인지 본인들도 적당히 타협한 모양이었다.
“병신 같은 판사새끼들! 지들 좆대로 판결하려면 법이 왜 있어!”
피의자가 반성문을 (피해자가 아니라 판사에게) 썼다고 감형을 때리는 어처구니없는 법원의 현실을 생각하면 새삼 열을 낼 일이 아니었지만, 그 때문에 궁지에 몰리게 된 서충헌 차장으로서는 판사들을 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들 꼴리는 대로 범죄 닦아주는 법걸레 새끼들!
서충헌 차장의 원래 의도는 최대한 공권력과 경완의 충돌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최소한 금고형을 받아내면 그 이후엔 이경완이 반발해도 좋고 반발하지 않아도 좋았다. 반발하면 국가가 대신 이경완과 대치할 것이고, 반발하지 않아도 이경완이 일정 기간 교도소에 구금되어 서충헌 차장에게 시간을 벌어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서 언론플레이를 했는데도 결과가 이 모양이었다.
상황이 어려워져도 완전히 인맥이 망가지진 않은 덕분에 그 이유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김 회장! 이 씹새끼가 날 물먹여!”
○○일보의 김명전 회장이 배신을 때린 것이다. 기대했던 만큼 여론몰이가 충분히 되지 않은 것은 물론, 오히려 국정원 차장의 권력 남용으로 프레임을 돌리기까지 했으니 이경완에게 금고형을 때려야 할 판사들에게 여론의 힘이 실리지 않은 건 당연했다.
악재는 김 회장의 배신만이 아니었다. 이경완을 지원하는 위버멘쉬의 법무팀 새끼들까지!
“위버멘쉬 이 새끼들! 내가 진작에 견제해야 한다고 했는데!”
위버멘쉬로부터 이권을 약속받은 재벌과 정치인 새끼들! 외국 세력에 나라 팔아먹는 매국노 새끼들!
서충헌 차장은 씩씩대며 욕을 내뱉었다.
이경완에 대한 공세가 실패한 여파는 컸다. 반격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명분은 국정원 차장으로서의 공권력을 남용하여 민간인을 협박한 죄.
이경완을 민간인으로 분류하기는 힘들 걸 다 알면서도 저 프레임이 가능한 건 법조계에 한편에 있는 탁상물림 법전 탈레반 새끼들 때문이었다.
놈들 덕분에 법대로 하고 싶은 사건은 법대로 처리할 수 있는 명분이 되지만, 이런 구조가 당장의 서충헌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국정원 내부에서 서충헌 차장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을 확인했다는 걸까? 문제를 일으킨 서충헌 차장이 곱게 보이진 않았지만 국정원의 영향력에 금이 가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을 한 듯싶었다.
하지만 첫 공판에서 국정원이 뒤를 봐준다는 안심감은 와장창 박살 나버리고 말았다.
“서충헌 차장은 국정원의 정보력을 이용해 법조계 전체를 은밀히 사찰하고 그 결과를 본인의 사익을 위해 활용했습니다. 스폰서가 필요한 판검사와 법집행 과정에 영향력을 끼치고 싶은 재계인사를 연결해 주는 브로커업을 한 겁니다.”
원고 측, 즉 이경완 측 변호사가 말했다. 원고가 검사가 아니라 변호사인 이유는 지금 진행되는 소송이 민사소송이었기 때문이다.
협박죄에 대한 형사소송은 서충헌의 인맥 때문인지 지지부진했기 때문에 민사소송부터 열리게 되었다. 민사소송마저 미루며 시간을 벌기엔 여론의 관심과 이경완이 끌어들인 배경이 심상치 않았다.
원고 측 변호사의 발언에 피고 측, 서충헌 쪽 변호사가 반박했다.
“판사님. 지금 원고 측 변호사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 피고가 브로커로서 활동하면서 누구와 누구를 연결해 주었는지 기록된 장부가 있습니다.”
“판사님! 저 장부와 피고가 관련되었다는 사실은 없습니다!”
“이 장부는 피고의 내연녀이자 브로커 동업자인 전소희로부터 얻어낸 것입니다.”
“불가능해!”
서충헌이 소리쳤다. 왜냐면 진즉 전소희를 해외로 피신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고 측 변호사는 새로운 증거를 제시했다. 전소희의 영상편지였다.
영상에서 전소희는 서충헌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가 시킨 대로 했다, 하지만 그는 이혼 후 결혼해 주겠다는 약속도 차일피일 미루고 끝내 자신을 버리듯 해외로 피신시키려 했다, 그에게 버림받은 자신은 자신의 과오에 대해 반성하고, 협박의 대상이 된 이미연 씨에게 미안하며, 그간 기록해 온 장부를 원고 측에 넘긴다는…… 서충헌 차장 입장에서는 개소리일 수밖에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보다 저 개썅년이 자신도 모르게 장부를 작성해 오고 있었다니!
서충헌이 뒤통수를 맞아 영혼까지 얼얼함을 느끼는 와중에 그의 변호사가 반박했다.
“전소희의 말이 맞는지 그 장부만으로는 입증할 수 없습니다! 또한 영상에서의 진술을 고려하면 피고에 대한 원한이 있으므로 악의적으로 증거를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소희의 구속은 온전히 검찰의 영역임을 인정하며, 이 장부는 전소희가 구속된 이후 형사소송 과정을 확인하고 증거로 제출하겠습니다.”
원고 측 변호사는 피고 측 변호사의 주장을 순순히 인정하고 증거로 제시한 장부를 회수했다.
그 모습에 피고인석에 있던 서충헌은 안타까워서 엄지손톱을 뜯었다. 저 장부가 증거로 채택이 안 된 것은 다행이었으나, 베스트는 저 장부를 인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증거로 채택되어야 했다. 위험하지만 그래야 자신과 얽힌 판검사들이 저 증거에 접근해서 인멸할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증거의 존재 여부만 알려질 경우는 최악이었다. 전소희에 대한 구속, 그리고 장부에 적힌 이름에 대한 여론의 궁금증은 사법계의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고, 이는 곧 서충헌 국정원 차장에 대한 법조계 부담감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날 공판은 재판이 길어졌고 판결이 나오지 않았다.
시간을 벌었다고 좋아할 수는 없었다. 재판이 길어진 이유는 원고 측의 폭로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내연녀, 장부, 검언유착, 판검사 스폰서, 법조 브로커 등 민사소송이 목적이 아니라 폭로가 목적으로 재판에 나온 듯했다.
그러한 폭로는 분명 원고인 이경완에 대한 사법계의 불만을 키우겠지만 그것이 서충헌 차장에게 유리하다는 말은 아니었다.
폭로라는 이름의 폭탄을 터뜨린 이경완, 그리고 폭탄의 한가운데 있는 서충헌.
폭발에 휘말린 사람들이 폭탄을 터뜨린 이경완을 싫어하게 되는 건 당연했지만, 그 폭발의 한가운데 있는 서충헌이 무사할까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리고 그 문제는 협박죄에 대한 형사재판이 시작될 때쯤 뚜렷하게 불거졌다.
“징계라니요?! 징계라니요?!”
국정원장의 통보에 서충헌 차장은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국정원장은 그런 서충헌 차장의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해야 할 국정원의 차장이 저렇게 이성을 잃다니…… 쯧쯧. 이제 서충헌 차장도 다 됐나?
흥분으로 그런 국정원장의 내심을 읽어내지 못한 서충헌 차장이 항의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징계위원회를 열겠다는 겁니까?”
“정말 모르겠나?”
“저에 대한 모든 말은 모함입니다!”
“하하. 높으신 분들하고 어울리다 보니 정치인같이 말하는군.”
서충헌 차장이 뭐라고 반박하려고 했지만 국정원장의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자네의 비행(非行)에 대한 내부고발이 있었어. 국정원의 첩보망을 이용해서 함부로 법조인을 사찰했다더군.”
“모함입니다!”
“내가! 증거를 보여줘야 입을 닥치겠나!”
끝내 국정원장의 입에서 고성이 튀어나왔다.
“자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고 있으니까 닥치고 꺼져!”
국정원장의 축객령의 서충헌 차장은 영혼 잃은 눈으로 터덜터덜 원장실을 빠져나왔다.
멍한 머리에는 오직 두 단어만 돌아다녔다. 내부고발, 증거. 그러니까 이 국정원 내부에서 자신을 내치려는 판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짜여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다 끝났다.’
순간 그런 들었지만 서충헌 차장은 이내 그러한 생각을 털어냈다. 형형해진 눈빛에는 살기가 돌았다. 이 바닥에서 먹은 짬밥이 어디로 가지 않았다. 이대로 순순히 몰락할 순 없었다. 아니, 몰락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를 잘 아는 직장동료는 이렇게 평했다.
“서충헌 차장은 끝났습니다.”
“정말요?”
이관영의 말에 경완은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관영이 오늘 아침에 쾌변을 본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일단 국정원 내부에선 완전히 잘라내는 것으로 의견 일치를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