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281화
26-빌런본색
“서충헌 지지하던 파벌은 동의하던가요?”
“같이 도매급으로 넘어가기 싫으면 동의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차장 자리는요?”
“그건 중립 인사에게 넘기기로 했습니다.”
“파벌 없는 차장 후보감이라…… 능력자인가 봐요?”
파벌도 없이 차장 후보가 될 수 있느냐는 뉘앙스에 이관영은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니 무슨 저희 국정원이 붕당정치 하는 곳도 아니고 이 파벌 아니면 저 파벌로 갈라져 있는 줄 아십니까? 그렇게 양분화되어 있으면 조직이 제대로 안 굴러가요.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고 파벌 싫어하는 인사들은 충분히 많습니다.”
그 말에 경완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그랬구나. 난 또 국정원이 일본 돈도 먹고 판검사 스폰서 브로커 짓도 하니까 나라에 망조가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열심히 자기 할 일을 하는 사람이 있었군요. 하긴 그러니까 국정원이 여태 버텼겠죠. 원래 물 흐리는 건 미꾸라지 몇 마리라고 하잖아요.”
졸지에 미꾸라지가 된 이관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경완은 다시 서충헌을 거론했다.
“그래도 국정원 차장씩이나 지낸 인물이잖아요. 만만하게 보면 안 되지 않을까요? 어디 좋은 곳에 사외이사로 들어가서 영향력을 행사하면 귀찮아질 것 같은데.”
그러한 우려에 이관영은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설명했다.
“저희같이 음지에서 일한 이들을 사외이사로 받아주는 기업은 저~엉말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나머지는 치킨집, 칼을 잘 쓰면 횟집, 그것도 아니면 주식 프로그램이 띄워진 모니터를 눈 벌게지도록 보면서 퇴직금을 탕진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오~ 그렇구나.”
“그런 선배들 보면 괜히 국정원에 들어왔나 싶죠. 차라리 기획재정부 같은 곳에 들어갔으면 모피아의 따뜻한 그늘 아래서 꿀을 빨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일본 돈을 받으셨어요?”
“아, 그건 한일우호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니까요.”
이관영은 한참 그에 대한 정당성을 떠들었고, 경완은 이번 일에 대한 그의 공로를 생각하여 잠자코 들어주다가 갑자기 이야기가 자기 자랑으로 넘어가는 듯싶자 말을 잘랐다.
“이제 그만.”
“그래서 제가 그 일본인한테, 네?”
“그래서 서충헌 차장에게 남은 카드가 없다는 게 확실한 거죠?”
“아, 네. 그렇죠.”
“확실한 거죠?”
“확실합니다.”
“목숨 걸고?”
“어…… 100% 확신할 수는…….”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이관영의 표정에는 불합리에 대한 억울함이 서려 있었다.
목숨을 걸면 100%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머저리와 멍청이 빼고 누가 있겠는가?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하지 않을 확률도 100%라고 장담하기 힘든데 말이다.
경완이 다시 물었다.
“몇 퍼센트 정도 장담할 수 있어요?”
“목숨 걸고?”
“네. 목숨 걸고.”
“한 90% 정도는…….”
“10%나 장담할 수 없다라…….”
경완이 말꼬리를 흘리자 이관영의 표정에 질색팔색이 떠올랐다. 이 이상 더 확신할 근거를 가져오라면 갑질이자 억지였다.
하지만 다행히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하기로 하죠.”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관영이 웃으면서 말했다.
“어차피 서충헌의 뒤를 봐줄 만한 이들도 판검사 살해범 때문에 정신이 없을 겁니다.”
서충헌 차장과 이경완 사이의 소송전이 여론의 관심을 독차지해도 판검사 살해범의 범죄는 계속되었고, 덕분에 법조계를 비롯해 치안기관들은 비상이 걸린 상황이었다.
서충헌의 뒤를 봐줄 만한 이들은 죄다 판검사 살해범에 정신이 쏠린 상태였는데,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서충헌을 돕겠다고 이경완이라는 이름의 불똥이 튀는 걸 원하는 이는 없었다.
결국 이관영의 장담대로, 서충헌 차장의 협박죄에 대한 민사 재판은 결국 이경완의 승소로 끝났다.
이 판결이 사법 재판에도 영향을 줄 것은 뻔했기 때문에 서충헌 차장은 바쁘게 움직였지만 그럴 때마다 상황이 안 좋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판검사들은 끈 떨어진 서충헌 차장에게 관심을 두기보다는 판검사 연쇄 살해 사건에 집중했고, 회장들은 몸을 사리거나 오히려 서충헌 차장에게 자중할 것을 요구했다.
그렇게 손발이 묶인 서충헌이 국정원 내부에서 아무도 모르게 열린 징계 위원회에 회부된 이후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사람은 없어졌다. 아무도 모르게 잊힌 것이다.
화려하게 세간의 시선을 끌며 추락하는 것도 그만큼 높이 올라가야 가능한 일이지만 서충헌 차장은 그 정도 급은 아니었다.
경완은 이관영으로부터 서충헌 차장의 협박죄에 대한 사법 재판 결과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대충 끝났다.
하지만 방심할 생각은 없었다. 이제 겨우 절정을 넘겼을 뿐 에필로그까지 봐야 90% 이상 안심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꽤나 일 잘한다는 흥신소를 수소문해 조용히 찾아갔다.
* * *
“네? 국정원 전 차장이요?”
“너무 그렇게 놀라지 마세요. 직장에서 잘리고, 전과자 된 인간일 뿐이니까.”
“그런 사람을 왜 굳이…….”
흥신소 사장은 약간의 두려움이 담긴 시선으로 경완을 살폈다.
왜 당신 같은 유명인사가 그런 몰락한 인간에게 신경을 쓰냐는 눈빛에 경완은 설명했다.
“나랑 충돌해서 그렇게 된 거잖아요. 갑자기 미쳐서 칼 들고 담 넘을 상황을 미리 감지하려고 의뢰를 넣는 겁니다.”
“아, 그러시구나.”
경완의 말에 흥신소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약 석 달에서 반 년간 서충헌을 감시하기로 했다. 그 정도 기간이라면 독기가 충분히 빠지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흥신소 사장은 경완의 의뢰 목적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명색이 전직 국정원 차장이라는 점을 어필했고, 결국 경완은 돈을 좀 더 지불했다. 흥신소 사장 말로는 미행 능력이 좋은 에스퍼 직원이 있다나?
흥신소까지 초능력 인력이 있다니. 초능력이 생각보다 깊게 일상에 파고든 현실에 경완은 새삼 감탄했지만, 집에 돌아와 뉴스를 보니 그따위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은 관심에서 싹 사라졌다.
[대통령의 사법 개혁 선언!]
[검찰의 집단 반발이 예상.]
[법원은 일단 방관하기로.]
“이야~ 대단하네?”
판검사 연쇄 살해 사건의 파장은 결국 정치권까지 번졌다.
대통령은 무슨 생각인지 사법 개혁을 선언했고, 그 명분으로 판검사 살해범을 거론했다.
초능력 각성 사태 초기, 학교 폭력과 왕따 문제가 각성 보복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냈고, 때문에 학교 폭력과 왕따를 근절하기 위해 노력을 쏟은 결과.
각성 보복 사건이 상당히 줄어든 것을 내세워 판검사 연쇄 살해도 사법 시스템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무너진 것에 근본적인 이유가 있으므로 이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사법 개혁을 이뤄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판검사 연쇄 살인마를 잡는다고 해도 제2, 제3의 판검사 연쇄 살인마가 나올 뿐이라고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검찰은 당연히 이 사법 개혁에 반발했다.
법원 역시 기분이 안 좋았지만 검찰이 있어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검찰이란 사냥개가 먼저 나서서 물어뜯으면 기다리다가 나중에 느긋하게 사냥이 끝난 뒤에 판결을 내리면 되니까.
법원 내부에 홀로 고고한 판사님들 사이의 이견도 조율할 시간이 좀 필요했고 말이다.
대통령의 사법 개혁 선언을 반대하는 논리를 만드는 것이 어렵진 않았다.
그런 이유로 사법 개혁을 하는 건 테러에 굴복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법 개혁이 목적이 아니라 대통령이 검찰 길들이기 하는 거다, 삼권분립을 침해하는 거다 등.
여러 반론을 거론하면서 어떻게든 사법 개혁 법안을 돈좌시키기 위한 움직임은 분주했다.
여론도 움직이고 정치인도 움직이고.
하지만 쉽지 않았다. 검언유착이 무색하게도 여론은 사법 개혁 찬성론과 사법 개혁 반대론으로 갈라졌고, 정치인들도 보수와 진보가 나뉘어 대립했다.
검찰은 여론몰이용으로 캐비닛에 묵혀두고 있던 정치권 파일을 활용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당장 판검사 살해범이 날뛰고 있는데 사법 개혁을 방해하기 위해 여론몰이용 정치 수사를 한다?
판검사 살해범의 표적이 되기에 딱 좋은 짓이었다.
반드시 죽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원래 권력 있는 자들이 자기 안위에 더 많이 신경 쓰는 법이었다. 아무리 권력이 좋아도 목숨보단 소중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검찰은 미국 연수에서 돌아온 초능력 수사대를 서둘러 총동원해서 판검사 살해범을 붙잡는 데 힘을 쏟았다.
일단 판검사 살해범을 붙잡아 개혁 명분의 시발점을 없애고, 감히 사법 개혁 법안에 이름을 올린 정치인들을 털어 사법 기득권에 흠집 내려 한 것에 대해 본보기를 보이면 사법 개혁 법안이 흐지부지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초능력 수사대를 동원하자마자 범인의 활동이 뜸해졌기 때문이었다. 기존의 사건에서도 좀처럼 범인을 추적할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다.
“도대체 왜 놈을 못 찾는 거야!”
검찰총장이 부장검사들을 모아놓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부장검사들은 눈알만 굴릴 뿐이었다. 왜냐면 수사는 결국 일선 수사관들이 담당하는 것이지 검사들이 거기에 뭘 더 첨언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수사과정에서 검사의 역할은 기소권을 휘두르는 것 외에는 딱히 할 것이 없었고, 이미 수사의 전문가들이 있는데 괜히 방해하려는 것이 아니면 왜 끼어들어서 이래라저래라 하겠는가?
물론 경찰이 검사의 수사지휘를 받기는 하지만, 솔직히 현장에서 발로 뛰는 형사들보다 탐문을 잘하겠는가, 과학수사대보다 증거를 잘 찾겠는가?
경찰이 판검사 연쇄 살인범을 찾는 시늉만 하면 몰라도 그쪽에서도 안간힘을 쓰는 걸 아는데 거기다가 이래라저래라 더 간섭했다가 빈정만 상해서 제대로 수사를 안 하면 판검사만 더 죽어 나갈 뿐이었다.
검찰총장도 그걸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속이 답답해서 소리를 한 번 질러본 것이다.
심호흡을 고르며 차분해진 검찰총장이 질문을 던졌다.
“정호태 지부장은?”
거기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초능력자라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이경완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중국에서 난리 칠 땐 미국의 정보력에 상당히 의존했다는 걸 모두가 알듯이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가 공산당의 부활을 꿈꾸는 인사를 핀포인트로 찾아내서 제거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판검사 살해범은 한국의 촘촘한 수사망을 빠져나갈 정도의 치밀한 행동과 능력을 보이면서도, 목표로 한 판검사와 법조인들을 죽여 나갔다.
아무나 죽인 게 아니라 사법 개혁에 명분을 주기 충분할 정도로 오물이 묻은 인사들이었으며, 여기에 예외나 실수는 없었다.
이런 불가사의한 정보력은 절대로 개인이 가질 순 없었다.
초능력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말하길 그럴 가능성이 있으려면 적어도 정보계열 쪽으로 이경완급의 재능을 타고난 후 철저하게 훈련을 해야만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랬다면 세상에 작은 소문 하나 나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말이다.
그런데 과연 이 넓은 세상에 이경완급 능력자가 또 없을까? 무력 쪽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다른 분야로는?
머리 좋은 판검사들의 생각이 위버멘쉬의 창립자, 요하네스 벨푸기스에게 닿은 건 필연적이었다.
전 세계 재능있는 초능력자를 선점하고, 선물시장에서 천문학적인 자금을 벌어 위버멘쉬 초창기를 버텨내고, 그 뒤로도 신기할 정도로 위버멘쉬가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것이 베일에 싸인 총수.
세간에는 그가 예지능력을 타고났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지만, 애당초 예지란 무엇인가? 그건 시간을 뛰어넘어 정보를 획득하는 것이며 사실상 타임머신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