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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전생 더 빌런-282화 (282/367)

무한전생-더 빌런 282화

26-빌런본색

타임머신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는 시간의 역설이었다. 예지능력도 이 시간의 역설을 피할 순 없었으니, 예지능력이라는 것이 진실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사실 예지 능력이 아니라 천리안 능력이었다면? 앉은 자리에서 천 리 너머를 명암을 가리지 않고 볼 수 있다면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았다. 요하네스 벨푸기스가 상상을 초월하는 천리안 능력자라는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설사 본인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위버멘쉬의 정보력 자체가 놀라운 수준이었으니, 그중 뛰어난 천리안 능력자가 있을 수도 있었다.

여러모로 생각해 봐도 사망기자가 활동을 멈춘 한국에서 현실적으로 한국 검찰의 캐비닛에 보관된 파일을 확보할 수 있는 조직은 위버멘쉬 밖에 없었다.

그렇다. 한국 검찰은 위버멘쉬를 의심하고 있었다.

애초에 태생이 빌런 조직이 아니었던가? 제3세계의 독재자 따위는 죽여버리고 그 나라의 기득권을 찬탈하고 있는 것도 위버멘쉬였다.

판검사 연쇄 살해 사건의 목적이 사법 카르텔이 쥐고 있는 영향력을 파괴하여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는 것이 과연 논리적 비약일까?

“일단은 협조적인 모양새를 보이고 있습니다.”

“관련이 있어 보이나?”

“그런 기색은 없었습니다만…….”

“다만?”

“판검사 살해범으로 인해서 사법질서가 문란해지는 것에 대해 딱히 걱정하지는 않는 눈치였습니다.”

“그 개잡놈에 대한 견해는 들어봤고?”

“일단은 잡아야 하는 놈이라는 것에는 의견을 같이했지만, 위버멘쉬 코리아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는 것에는 반대하더군요. 그건 너무 불합리한 투자라고요.”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서도 물어봤나?”

“정치권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만 진보언론 쪽에 대한 광고비 지불을 멈출 생각은 없어 보였습니다.”

“최소한 중립이겠군.”

검찰총장의 말은 그러하였지만 위버멘쉬에 대한 의심이 더 짙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좀 더 파봐.”

검찰총장의 말에 지시를 받은 부장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 판검사 연쇄 살해 사건 수사에 대한 보고를 받은 검찰총장은 관련 지시를 내린 후 불편한 표정으로 한 사람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리고 이경완은?”

“승소한 이후에는 정해진 일정만 소화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어렵겠지?”

그 말에 부장검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겠냐는 검찰총장의 질문은 이경완을 판검사 연쇄 살인 사건 조사에 동원할 수 있느냐라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국정원 차장이 그 일에 이경완을 이용하려고 하다가 역린을 건드려서 ㅈ됐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매스컴에서 얼마나 떠들어댔는가?

그 과정에서 이경완이 현재의 사법 체계를 냉소하고 있다는 것쯤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그의 과거를 생각하면 안 그러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결국 판검사 연쇄 살해 사건의 수사에 이경완의 능력을 동원해 보려는 안건은 무리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검찰총장도 알고 있었지만 오죽 답답하면 이렇게 묻겠는가?

한 부장검사가 의견을 말했다.

“국정원 차장이야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제거할 수 있으니까 법망 안에서 해결했지만, 우리가 협조를 요구하며 압박할 땐 그가 그와 같은 방식으로 대응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총장의 물음에 의견을 개진한 부장검사가 찝찝한 표정으로 손날로 제 목을 그었다.

총장은 조금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렇게까지 할까?”

“예전이라면 웃으면서 욕설을 내뱉거나 아니면 주먹 좀 휘두르고 폭행죄로 감옥에 들어가려고 하겠죠. 하지만 지금은 그도 가진 게 많은 인간입니다.”

“가진 게 많으니까 타협하려고 하지 않을까?”

“가진 게 많으니까 더 잔인하고 과감하게 행동할 겁니다. 우리처럼 말입니다.”

“흐음…….”

이미 검찰 카르텔 내부적으로는 사법 개혁 시도를 돈좌시킨 다음 본보기로 몇 명을 골라서 철저하게 보복하기로 합의했다.

왜냐? 가진 게 너무 많아서. 기소권 독점과 그로 인해 얻는 권력과 재물이 너무 달달해서.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검찰총장을 향해 다른 부장검사가 말을 이었다.

“이경완은 시체조차 발견되지 않게 처리할 능력이 있는 초인입니다. 건들면 피 보는 건 우립니다.”

이경완의 다양한 능력은 익히 알려진 바, 특히 웜홀 능력은 그의 알리바이를 모호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결정적인 증거조차 무력화하기에 충분했다. 의심은 해도 그 혐의를 입증하기엔 불가능한 인물.

더구나 그는 은근히 강력한 인맥이 많았다.

미국에, 위버멘쉬 총수에, 초능력 공학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김마리아 여사까지.

작정하고 변호사를 붙이면 아무리 검찰이 기소해도 혐의입증은 불가능했으며, 정치인도 아니니 사법 공작으로 인한 타격도 제로에 가까웠다.

의견을 들은 검찰총장은 미련을 놓았다.

“이경완은 그대로 두는 걸로 하지.”

이경완의 능력이 두렵기는 하지만 부수고 파괴하는 데 재능이 있을 뿐, 사법 개혁 같은 것을 밀어붙일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그가 사법 개혁에 관여하려고 하는 순간 오히려 사법 개혁에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거나 판이 뒤집힐 가능성이 높았고, 그건 검찰에게 호재였다. 이경완을 싫어하는 여론도 적잖았으니까.

이경완이 정말 검찰을 싫어한다면, 그래서 사법 개혁을 지지한다면 오히려 가만히 있으려고 하지 않을까? 그가 소문대로 명석하다면 말이다.

“그럼 다들 가서 일 봐.”

검찰총장이 회의를 마무리하며 말했다. 오랜 기간 쌓아온 기득권을 유지하려면 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 * *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너희도 수고했다.”

특별 강습의 마지막 날, 경완은 씁쓸한 기분으로 아이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가 김배진에게 주었던 증거를 서충헌 차장이 손에 쥐고 서울지부장, 경찰청장과 방문한 이후 김배진은 강습에 참여하지 않았다. 마지막 날인 오늘까지 말이다.

경완은 씁쓸했지만 오지랖을 부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문제라면 조금 도와줄 수는 있겠지만 김배진의 문제는 돈이 아니라 업(業)이었다. 그의 부친인 김견민으로부터 비롯된 업.

자식인 김배진이 그 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경완은 물론이고 남이 간섭할 일이 아니었다.

경완은 마지막 강습을 끝내고 고용계약이 끝났다는 걸 알리기 위해 사무실에 들렀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세요.”

“잠시만요, 이경완 씨.”

경완이 손을 흔들어주고 떠나려는 낌새를 보이자 사무원이 급히 그를 잡았다.

“무슨 일인데요?”

“원장님이 잠시 뵙자고 하셨어요.”

원장님이라면 매스 이펙터 김봉남을 뜻했다. 경완은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원장실로 향했다.

“경완 씨, 어서옵쇼~!”

김봉남은 경박한 태도로 경완을 맞이했지만 경완은 평온한 어조로 대꾸했다.

“용건은요?”

“오늘 강습 마지막 날이었죠? 그런데 그냥 보낼 순 없잖아요.”

“그냥 보내도 되는데.”

“그냥 보냈다가 나중에 경완 씨가 ‘건방진데?’ 따위의 생각을 전혀 안 할 거라는 보장이 있어요?”

듣고 보니 그럴싸해서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그러면, ‘내가 먼저 예를 차리지 않은 건 맞지만, 열받네?’ 같은 인성의 소유자가 아니더라도 섭섭함이나 약간의 자괴감을 느낄 수 있는 게 인간이었다. 사회적 동물이기에 대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경완의 모습에 김봉남도 역시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김봉남에게 경완이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 건가요?”

“그렇기도 하고 그런 말로 경완 씨 기분을 좋게 한 다음에 또 특별 강사를 요청할 수 있나 기회도 좀 보고요.”

솔직한 김봉남의 말에 경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도 솔직하게 말했다.

“당장은 말고 좀 쉬었다가요.”

김봉남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일이 많았죠?”

애들 잘 가르치고 있다가 판검사 연쇄 살해사건이 일어나고, 불똥이 튀어서 국정원 차장하고 갈등을 빚고.

말은 간단한데 결과가 갈등을 빚은 국정원 차장의 몰락이라서 한편으론 참 대단했다.

경완이 고개를 끄덕일 때 비서가 들어와 두 사람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김봉남은 비서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경완에게 커피를 권했다.

“이게 고지대에서 수확한 최고급 프리미엄 커피라고 하더라고요.”

경완은 결국 커피를 다 마시기 전까지 엉덩이 떼는 걸 포기하고 커피의 향과 맛을 음미했다. 최고급 프리미엄이라고 해서 그런가, 여태껏 마셔본 커피랑은 뭔가 달랐다.

김봉남은 경완이 커피를 홀짝이는 동안 이야기를 꺼냈는데 바로 판검사 연쇄 살인 사건에 관한 이야기였다.

“분명 뒤에 누군가가 있어요. 경완 씨도 그렇게 생각하죠?”

경완은 잔에 입을 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엔 연락을 영구히 끊기로 한 비질란스의 목소리가 한 말이 떠올랐다. 판검사 살해의 배후엔 위버멘쉬가 있다고.

그런데 위버멘쉬 소속인 김봉남이 자기는 모른다는 듯이 질문을 던지니, 진짜 모르는 건지, 아니면 경완이 뭘 아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적당히 미끼를 던지는 것인지 아리송했다.

일단은 판검사 살해범과 그 배후를 협박해 김배진의 부친 김견민의 비리 자료를 확인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아마 협박받은 입장에선 경완이 어디까지 짐작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경완의 태도가 관심이 없는 듯 무척이나 미적지근했기에 김봉남이 재차 물었다.

“경완 씨는 과연 누가 판검사 연쇄 살인범을 돕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고 싶은 사람이겠죠.”

“혹시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자경단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경완 씨는 걱정도 안 되세요?”

“무슨 걱정이 돼요? 나라 전복하고 쿠데타하려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높으신 분들이 죽어나가는 일이잖아요.”

“경제를 이끄는 대기업 회장 같은 사람이 죽어나가면 문제일 수도 있지만, 판검사 같은 건 언제든 대체 가능한 공무원이잖아요?”

시스템의 안정성은 대체 가능한 자원이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부패한 판검사 좀 죽어나갔다고 망할 나라라면 차라리 망하고 처음부터 재건하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사법체계가 마비되면요? 그러면 경완 씨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을까요?”

집구석 평온한 생활을 즐기는 경완이라 김봉남의 지적은 염려하기 충분한 구석이 있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혼란이 발생하면 그 영향은 모두에게 미치니까.

경완은 이관영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대꾸했다. 국정원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법원이나 검찰도 사람 사는 곳인데 설마 마비되겠어요?”

“그래도…….”

“흙탕물을 흐리는 건 미꾸라지 몇 놈이죠. 사법계 전체가 카르텔을 형성하고 썩어 있었다면 나라가 이미 망하지 않았을까요?”

“호오. 그러니까 경완 씨는 판검사 살해범을 옹호하시는 건가요?”

“옹호랄 것까지는 없고 왜 그리 열심히 사나 싶어서 딱한 거죠. 그렇게 오물을 뒤집어쓰고 자기를 희생해봤자 남는 건 자기만족뿐일 텐데 말이죠.”

경완의 말에 김봉남의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았다.

“자기만족이라. 그럼 경완 씨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자기만족이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 희생하면서 살기 싫다는 거지.”

“아…….”

김봉남은 수긍하여 고개를 끄덕였고, 경완은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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