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전생 더 빌런-292화 (292/367)

무한전생-더 빌런 292화

27-권력은 잠들지 않는다

“이게 뭐야? 기소라니? 소환조사라니?!”

한 삼일쯤 태평양에서 신나게 놀다가 돌아온 미연은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다.

휴가기간 중에 경완이 사고를 치고 그 일로 기소됐다고 하니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완은 그런 그녀를 볼 낯이 없어…… 서는 아니고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가 잔소리를 더 들을까 봐 반성하는 모양새를 취하며 말을 아꼈다.

잠시 심호흡한 미연이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응해야지 않을까?”

얌전히 검찰에 갈 거라는 경완의 말에 미연은 심경이 복잡한지 잠시 말이 없다가 물었다.

“어떻게 될까?”

“순리대로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지금은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말이네?”

미연의 뾰족한 목소리에 경완은 이렇게 운을 띄웠다.

“절대 실패하지 않는 대책이 뭔지 알아?”

“뭔데?”

“무대책이야, 무대책.”

“오빠. 닥쳐.”

“아니, 좀 들어봐.”

“어디서 영화 대사 가져와서 궤변을 늘어놓으려고 그래?!”

아니, 어떻게 알았지?

철썩!

“아얏! 아퍼!”

경완은 미연이 손바닥을 내려치자 어깨를 내어주면서 아픈 시늉을 했다.

아프지 않아도 아픈 척은 해줘야 화가 빨리 풀린다. 피하는 건 금물이다. 약이 올라서 화만 길게 간다.

손바닥이 벌게지도록 경완의 어깨를 때린 미연이 푹 한숨을 내쉬었고, 경완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손바닥을 쓰다듬었다.

이런 게 다 그녀의 화를 풀어주는 요령이자 안락하고 평화로운 집안 분위기를 조성하는 지혜가 아니겠는가?

“그래, 오빠가 계획을 세우고 일을 저지른 적이 없지.”

미연은 한숨을 내쉬며 독백하듯 말했다.

평소의 경완이라면 그녀의 말에 중국에서의 일은 대국적인 계획으로 저질렀다고 뻔뻔한 낯가죽으로 반박했겠지만, 지금 그런 소리를 내뱉을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미연이 진지한 표정으로 경완을 보았다.

“오빠.”

“응?”

“나랑 한 가지만 약속해.”

“뭔데?”

“억울한 일을 당하고만 있지는 마.”

“…….”

“알았지?”

“응.”

경완은 어쩔 수 없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보다 나를 먼저 걱정해 주는 그녀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누구를 소중히 여기겠는가?

그는 가슴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책임감인가, 아니면 마음의 빚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녀의 존재감인가?

섣불리 답을 내릴 순 없었지만, 경완은 예감했다. 이번 생이 끝나면 다음 생은 꽤나 허탈감이 오래갈 것 같다고.

* * *

경완이 휴가에서 돌아왔다는 정보는 빠르게 퍼졌다.

휴가 가기 전에 주변에 잔뜩 자랑해 놓은 미연의 지인들이 일상으로 복귀했으니까. 다들 연예계에 몸담고 있었던 만큼 소식의 전달은 순식간이었다.

덕분에 휴가에서 돌아온 다음 날 바로 경완에게 출두명령서가 날아왔고, 미연은 검찰에 출두하는 그를 위해 일일 코디네이터가 되었다.

불편한 양복에 경완이 항의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

“이미지가 여론전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대기업 회장들이 괜히 휠체어 타고 검찰에 출두하겠어?”

맞는 말이라 경완은 묵묵히 옷매무새를 고쳐주는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럼 다녀올게.”

경완은 미연의 걱정과 배웅을 뒤로하고 하늘로 솟구쳤다.

거센 바람에 미연이 코디해 준 정장이 흐트러지지 않게 초능력으로 전신을 잘 감쌌다.

검찰중앙지검에 도착할 때쯤 그는 정문 입구 쪽에 기자들이 바리바리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경완이 출두명령을 받은 게 언론에 알려진 모양이었다.

검언유착을 위해 검찰들이 뿌리는 떡밥인가? 아니면 오랜 기자 짬밥에서 나오는 정보력인가?

확실한 건 이경완에 관련된 이슈는 언론의 조회수와 광고료에 충분히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었다.

“경완 씨! 출두명령을 순순히 따른 이유가 뭡니까?!”

“공무집행방해를 인정하시는 겁니까?!”

“공권력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하셨는데 평소에 사회에 불만이 많으셨습니까?!”

이어지는 질문에 경완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자들이 좋아할 쇼맨쉽은 발휘해 주기로 했다.

“저는 언제나 법을 존중했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범법 행위에 관해 그에 걸맞은 책임을 보여줬습니다. 그랬던 만큼 검찰과 법원 역시 법집행 과정에서 그 권한만큼의 책임을 짊어지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경완 씨! 책임을 짊어진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혹시 사법불신에 관한 경고인가요?!”

기자들이 질문을 던졌지만 경완은 대답하지 않고 이런 말을 남기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검찰 조사 끝나고 다시 할 말이 생기지 않을까요?”

수많은 플래시를 뒤로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그에게 법원직원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 직원은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와 매우 불편한 기색으로 경완을 심문실로 안내했다. 혹여나 경완이 엉뚱한 길로 샐까 봐 걱정해서 붙인 모양이다.

경완은 불편해하는 자신을 향한 시선에 미소와 당당한 걸음으로 대응하며 심문실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가려는 직원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무, 무슨 일인데요?”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으면 짜장면 시켜줘요.”

“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직원의 반응에 경완은 대꾸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싸움 하겠다고 담당검사가 뜸들이다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잖아요?”

죽은 김오민 검사가 수사요령이랍시고 알려준 것이다.

그 이야기에 경완은 수사 참 더럽게 한다고 입을 털다가 김오민 검사에게 닭다리 한 짝을 뺏겼었다.

“그런데 그런 짓 하다가 제가 심기라도 불편해지면 서로 좀 그렇잖아요. 그러니 짜장면 오길 기다리는 게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너희들이 꼬장 부리는 걸 참느니 짜장면 올 시간을 참는 게 더 마음이 편하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직원이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해보겠습니다.”

“그래요. 수고하세요.”

직원이 무슨 권한이 있어서 함부로 심문실에 짜장면을 넣을까? 말을 전달해 주겠다는 것만으로 직원은 충분히 할 일 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경완의 부탁(?)은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예상과 다르게 직원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검사가 들어온 것이다.

주름 하나 없는 양복에 머리카락 하나 튀어나오지 않게 잘 정돈된 머리와 깐깐해 보이는 표정. 나~ 머리 좋은 엘리트요~라는 분위기를 전신으로 풍기는 젊은 검사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안성면 검사입니다.”

라면 이름 같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경완은 초면에 그런 말을 내뱉을 정도로 인성이 박살 나진 않았다.

“뉴페이스네요.”

“네?”

경완의 말에 안성면 검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전 황석칠 검사나 백윤식 검사를 다시 만날 줄 알았거든요.”

“그렇습니까?”

안성면 검사는 표정을 펴고 서류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경완이 물었다.

“두 사람 몰라요?”

“이름은 들어봤습니다.”

이름은 들어봤다라……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백윤식 검사는 몰라도 황석칠하고의 접점이 없다는 건 사법 카르텔이 아니라는 걸까, 아니면 파벌이 다르다는 걸까?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와중에 안성면 검사가 질문을 시작했다.

“이경완 씨. 당신은 저번 주 토요일, 검찰에 불법 침입해 무력을 사용한 위버멘쉬 보안팀과 그 책임자를 잡기 위해 출동한 초능력 특수대의 공무집행을 방해한 혐의가 있습니다. 인정하십니까?”

“국가전복혐의는요?”

“…….”

대답 대신 돌아온 질문에 안성면 검사의 시선이 서류에서 떨어져 경완을 향했다. 그 시선의 의미는 경완도 읽기 힘들었다. 속내를 잘 감추는 자였다.

“그런 혐의는 없습니다.”

“그럼 위버멘쉬 코리아는 국가전복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건가요?”

“지금은 당신의 혐의에 집중해 주십시오.”

“어차피 신문하다 보면 위버멘쉬 코리아에 관련된 것까지 질문이 나올 텐데 굳이 피하는 이유가 뭡니까?”

“질문은 제가 합니다.”

“오~ 질문은 제가 합니다. 그럼 저는 네, 아니오로만 답하면 되겠군요.”

조롱조의 말에 안성면 검사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경완이 사족을 달았다.

“네, 아니오로만 답하라는 인간들 중에 사실을 호도 안 하는 인간들이 없던데. 안 검사님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 대답해 봐라. 네가 강직한 검사인지, 아니면 시류에 따라 제 이익을 챙기는 인간인지.

“질문 순서는 정해져 있으니 그에 따라 성의껏 답하십시오.”

대답은 동그라미나 엑스가 아닌 세모였다.

경완은 안성면 검사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고 심문에 성실하게 응했다. 성실하게 응했기에 금방 공무집행방해 혐의를 인정하게 되었다.

단 질문 세 번에 용의자의 자백을 이끌어낸 안성면 검사는 잠시 경완을 보더니 서류는 몇 장 넘기고는 다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경완 씨. 위버멘쉬 코리아와 상당히 긴밀한 관계라고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네.”

“그게 위버멘쉬 코리아 앞에서 저지른 경완 씨의 공무집행방해와 관련이 있습니까?”

“없다곤 할 순 없죠.”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친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꼭 편들어주고 싶은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조금이라도 친분 있는 사람이 부당한 일을 겪었다고 하면 편들어주고 싶은 게 사람 심리잖아요? 그래서 위버멘쉬가 검찰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하니까 좀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 겸사겸사 주변에 부수적 피해가 발생하는 것도 좀 막고.”

“경완 씨는 위버멘쉬의 주장을 믿습니까?”

“누가 제 앞에서 거짓말을 해요?”

있으면 데려와 보라는 뉘앙스에 안성면 검사는 질문을 바꾸었다.

“위버멘쉬 코리아의 불법적인 활동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네.”

“무슨 활동인지도 알고 있습니까?”

“네.”

“어떤 활동을 했는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로비와 탈세겠죠?”

“그 외에는요?”

“본 적 없어요.”

듣기는 했지만 말이다.

안성면 검사는 경완의 말장난에 고개를 갸웃했다.

“로비와 탈세하는 걸 직접적으로 보거나 들은 적 있습니까? 그렇다면 경완 씨는 방조로서 종범이 될 수 있습니다.”

“로비한다는 건 들었는데, 탈세는 못 들었네요.”

경완이 순순히 인정하자 안성면 검사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런데 왜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 겁니까?”

“위버멘쉬 코리아가 로비와 탈세 같은 게 없이 어떻게 이렇게 단기간에 정착할 수 있었겠어요? 정경유착이 아니면 말이 돼요?”

“말이 길어지시는군요.”

“왜가 붙은 질문에 예스 올 노로 대답할 순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안성면 검사는 다시 신문을 시작했다.

“경완 씨. 판검사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아예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들어오기로 한 모양이었다.

경완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남들 아는 만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죠.”

“어…… 구체적으로 말하려니까 좀 귀찮네요.”

“……신문에 성실히 응해주십시오.”

“음. 그러니까…….”

경완은 두서없이 생각의 흐름대로 이야기했다.

판검사 연쇄 살인의 범인은 초능력자다. 현장에 남은 증거는 피로 써진 영어 글귀뿐이고, 판검사 양반들은 죽은 판검사들에게 감정이라도 이입했는지 무지 화났고, 수사는 미궁에 빠졌고, 그 와중에 판검사 나리들은 위버멘쉬 코리아 공격하느라 부산을 떨고.

“어? 혹시 위버멘쉬를 의심하는 건가요?”

경완이 의뭉을 떨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는 안성면 검사의 시선은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잠시 뒤 경완이 검찰을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달라붙었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서둘러 속보로 내보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