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294화
27-권력은 잠들지 않는다
“안녕하세요. 김필모 부장판사님.”
“으음… 뭐, 뭐야?!”
잘 자다가 일어난 김필모 부장판사는 낯선 음성으로 누군가 자신을 흔들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눈앞의 남자를 보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다, 당신은!”
“네. 이경완입니니다.”
“당신이 여기에 왜? 이, 이건 엄연히 가택침입이오!”
김필모 부장판사가 주변을 살피더니 소리를 질렀다. 아마 낯선 장소였다면 가택침입이 아니라 납치라고 항의하지 않았을까?
그는 소리를 질러도 주변에 반응이 없자 급히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아내가 누워 있었다.
경완은 원활한 대화를 위해 김필모 부장판사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세요. 아내분은 제가 가기 전까진 푹 주무실 겁니다.”
“……원하는 게 뭐요?”
“제가 제 재판에 관련되어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는데요. 사전에 검찰이랑 판사가 제 재판을 두고 사전에 접촉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럴 리가!”
“증거가 있는데도요?”
“증거가 있다고? 그럼 고소나 이의신청을 했어야지 왜 남의 집을 침입한 거요?”
“그야 댁이 제 재판의 재판장이라서 그렇죠.”
“그게 아니라 그렇게 하면 판사를 바꿀 수 있다는 말이었소!”
김필모 부장판사의 언성이 높아졌다.
“아유~ 그렇게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못 들어요. 그리고 저도 법률 좀 아는 사람이 있는데 고소나 이의신청을 생각 안 해봤겠어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옳은 방법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법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고소나 이의신청으로 담당 판사를 교체한다고 해도 사법 카르텔의 입김이 닿지 않은 강직하고 양심적인 판사에게 사건이 배정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솔직히 이렇게 되어서 경완의 마음이 편하기는 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저들이 원하는 재판결과를 위해 수작을 부렸으니, 경완 역시 본인이 원하는 재판결과를 위해 수작을 부려도 양심에 찔리는 일은 전혀 없었다.
경완이 말을 이었다.
“담당 판사를 바꿔봤자 비슷한 놈이 담당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잖아요.”
“그래서 자기 입맛에 맞는 판사를 앉히겠다고? 이건 사법질서에 대한 도전이오!”
“전 그냥 댁들이 한 짓을 똑같이 하고 있을 뿐이에요. 자기들 입맛에 맞는 판결을 내리려고 수작질을 부렸으니 저도 억울하지 않으려면 똑같이 해줄 수밖에요.”
미연이 그랬다. 억울한 꼴 당하지 말라고.
물론 이런 짓을 염두에 뒀을 리는 없겠지만, 일단 면피할 명분은 될 거다.
“난 관련 없소!”
“그러시구나. 정말 그렇다면 양심적인 판결을 기대해 봐도 되죠?”
“물론이오!”
“음. 그냥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되는대로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소!”
“……거짓말.”
“거짓이 아니오!”
“저 이경완이에요.”
“…….”
그제야 이경완이 거짓말 탐지기로 유명하다는 것을 떠올린 김필모 부장판사였다.
그럼에도 경완이 바로 응징하지 않은 건 이번 사건배당 조작과 관련 없다는 말은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사법 카르텔이랑 관련 없어요?”
“그대가 말하는 사법 카르텔이란 도대체 뭘 말하는 거요?”
“아. 하긴.”
경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의 엘리트 카르텔을 뿌리 뽑기 힘든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 모호함에 있었다.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하나회처럼 이름을 내거는 것도 아니고 상하관계가 명확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권을 중심으로 형성된 엘리트층의 누이 좋고 매부 좋고를 실현하고자 하는 인맥일 뿐이라고 표현해도 무리는 없었다.
그런만큼 사법 카르텔의 경계선을 명확하게 정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제 사건의 판결에 영향을 끼쳐달라는 식의 그 어떤 청탁도 받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그렇소!”
신체반응을 보니 사실이었다.
경완은 한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혹시 제가 이렇게 방문하지 않았다면 제게 불리한 판결을 내리려고 하셨겠죠?”
“…….”
방금 전처럼 당당히 그렇다고 말하지 못한 이유는 김필모 부장판사가 최소한의 눈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때론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사실을 인지할 정도로. 눈치가 전혀 없는 이가 부장판사 자리까지 올라간다는 것도 조직생활에선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튼, 그의 대답에서 경완은 한 가지를 확신할 수 있었다. 굳이 청탁할 필요도 없는 인사에게 사건을 배정했다는 걸 말이다. 곤란한 일이었다.
경완의 시선이 차가워지자 김필모가 급히 말했다.
“다, 당신의 힘은 너무 과도해! 통제되지 않으면 사법질서를 파괴하고 말 거야! 그렇게 되면 피해를 입는 건 약자이란 말일세!”
정론이었다. 딱히 틀린 구석도 없었다. 거기다가 김필모 부장판사는 사법 카르텔이라고 하기엔 딱히 대단한 부패 혐의도 없었다. 뭐 나중에 전관변호사가 되어서 받아먹을지는 몰라도 당장은 결백했다.
그래서 경완은 그에게 거절하지 못할 선물을 즐겁지 않은 마음으로 줘야 하는 상황에 유감을 표했다.
“제가 선물 하나 드릴게요.”
“……거절해도 되나?”
심상찮은 경완의 분위기에 김필모 부장판사가 물었지만 경완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그를 향해 검지를 내밀었다.
검지 끝에서 흘러나온 S입자의 줄기가 김필모 부장판사의 척추로 스며들어 갔다. 그러자 김필모의 얼굴에 혈관이 붉어졌다. 얼굴은 터질 듯 달아올랐다.
딱 3초의 시간이 지난 후 경완이 말했다.
“선물의 이름은 웰빙이에요.”
“미…… 친…… 놈…….”
3초간 전신에 필설로 형용하지 못할 고통을 느꼈던 김필모 부장판사는 입가로 침을 흘리며 미약한 목소리를 흘렸다.
경완은 자신을 향한 욕설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욕먹어도 싼 짓임은 분명했다.
“그게 신경을 직접 건드리는 거라 너무 과하게 당하면 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이 올 수도 있어요. 들어봤죠? CRPS라고. 그거 달고 웰빙 라이프는 힘들잖아요.”
이게 뭔 개소린가 싶었던 김필모 부장판사는 경완이 왜 이런 개소리를 늘어놓았나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명색이 법관이 될 정도로 머리가 좋지 않은가?
그리고 그 답에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저 고통을 안 주는 게 선물이라는 뜻이 아닌가? 이 무슨 ‘살려는 드릴게’ 수준의 선물이지?
하지만 그 선물을 거부할 감당이 되지 않았다. 주지 않음으로써 주게 되는 이 기묘한 선물을 거부하게 되면 저 고통을 얼마나 겪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자칫하다간 CRPS인가 하는 게 걸릴 수도 있다잖은가?
김필모 부장판사는 입가에 흐르는 침을 손등으로 닦고 물었다.
“원하는 게 뭔가?”
선물에는 공짜가 없다. 선물을 그저 대가 없는 호의라고 생각하는 놈들은 사회생활 과목의 낙제생이다. 선물이란 그 어떤 형태로든 돌려줘야 하는 빚이었다. 김필모 부장판사는 그렇게 배웠다.
“무죄 같은 걸 바라지는 않아요. 그저 상식적이고 형평성에 맞는 판결 정도면 충분해요.”
“당신이 얽혔는데?”
김필모 부장판사가 반문했다. 그에게는 좀처럼 경완이 얽힌 사건이 단순한 공무집행방해 사건으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경완이 뚱한 표정으로 협박했다.
“저를 상식적으로 대하지 않으면 저도 상식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없죠. 당연한 거 아닌가요?”
“…….”
대답이 없는 그를 향해 경완이 말을 이었다.
“공무집행방해는 상해가 없는 경우 대부분 8개월에서 1년 형이고 그마저도 공탁금으로 해결 가능하다면서요?”
벌금으로 해결 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일반적으로 금액은 약 300만 원 정도로 해결된다나?
마치 돈 없는 서민들은 철저하게 공권력에 복종해야 하고 돈 좀 있는 새끼들은 공권력에 좀 대들어도 된다는 윗분들의 마인드가 드러나는 듯한 판례였다.
굳이 경완이 그러한 판례를 들먹인 건 일종의 가이드라인이었다. 그 정도면 만족한다고.
“돈은 좀 더 내도 되니까 공탁금으로 해결했으면 좋겠어요.”
“나 혼자선 어렵소.”
김필모 부장판사가 대답했다. 경완의 협박을 수용한 것이다.
경완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두 배석판사도 찾아가서 협조를 부탁할 테니까요.”
그 말에 김필모 부장판사는 쓰게 웃었다.
* * *
[……이러한 사정을 보았을 때 검찰의 구형은 다소 과한 면이 있다. 따라서 원고에게 징역 1년을 선고한다.]
이경완 재판 결과는 누군가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다.
도지경이란 이름의 판사가 김필모 부장판사의 방으로 찾아와 항의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이경완을 방면하다니요?!”
“그런 적 없네.”
“징역 1년을 내리셨잖습니까?! 공탁도 허가하고요!”
공탁금을 내고 빠져나갔으니 징역으로 이경완을 제어해 보려는 시도는 무산되었다.
도지경 판사는 김필모에게 눈빛으로 이해가 되는 대답을 요구했다.
김필모는 대답하지 않고 다소 흥분한 도지경 판사를 냉정한 눈길로 살폈다.
도지경 판사. 대법원장의 사위라는 줄을 잘 잡고 올라와서 차기 부장판사로 낙점된 놈.
김필모 부장판사가 그를 향해 물었다.
“혹시 이경완 건 배당되기 전에 검찰과 사적인 장소에서 만난 적이 있나?”
“없습니다.”
“흠. 그래?”
김필모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나왔다. 도지경과 팔 뻗으면 닿을 거리에 선 김필모가 물었다.
“없다고?”
“없다고 말씀드리지…….”
퍽!
아악!
도지경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김필모가 책상 위에 놓인 자신의 길쭉한 명패를 들어 도지경의 옆머리를 후려쳤기 때문이다.
“악! 서, 선배 왜 이러십니까?! 선배! 악!”
김필모는 대답 없이 길쭉한 명패를 휘둘렀다. 머리를 보호하듯 가린 도지경의 팔뚝은 길쭉한 삼각기둥의 명패에 모서리를 맞아 뼛속까지 아려왔다.
“선배님! 고정하세요, 선배님! 악!”
김필모의 폭력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나 놀란 사무관이 들어오고 나서야 멈췄다.
다른 사람을 보고 흥분을 가라앉힌 김필모는 명패를 책상 위에 도로 놓으며 말했다.
“주 사무관은 나가보게.”
“저기…… 그게…….”
“어서.”
낮고 단호한 목소리에 사무관이 쭈뼛거리며 물러났다.
둘만 남은 방에서 김필모가 물었다.
“왜 거짓말을 하나?”
“무슨 말씀이신지…….”
“검찰과 사전에 접촉했잖은가. 사건 배정에 관여하려고.”
“그런 적 없…….”
다시 거짓말을 하려던 도지경의 입은 김필모가 다시 명패를 쥐려고 하자 다물어졌다.
“내가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런 걸 물어볼까? 대법원장 사위랍시고 아주 그냥 앞뒤 없이 미쳐 날뛰는군그래.”
도지경을 보는 김필모의 눈이 이글거렸다. 도지경은 사실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돌아가는 사정을 보면 짐작이 되지.”
“증거가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증거가 없었으니까 그간 입 다물고 있었지.”
그간? 그럼 언제 증거가 생겼다는거지?
도지경이 물어보려는 찰나 김필모가 먼저 말을 이었다.
“자네가 대법원장 사위랍시고 부린 유치한 수작이 눈에 뻔히 보였지만 그래도 사법질서라는 대의가 있다고 보고 눈을 감았지. 그런데 일을 이따위로 하나?”
도지경은 저 질책이 김필모의 분노, 그리고 증거와 관련되어 있음을 짐작했다.
“혹시…… 새어 나갔습니까?”
“그래. 누구한테 새어 나갔는지는 아나?”
살벌한 김필모의 눈빛에 도지경은 마른침을 삼켰다.
“서, 설마.”
“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 괴물새끼에게 빌미를 주냔 말이야!”
김필모는 다시 눈을 부릅뜨고는 명패를 집어들어 휘둘렀다. 그날 밤 겪었던 고통과 수모의 원인이 눈앞에 있는 일처리도 제대로 못 하는 병신 같은 새끼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악! 선배님! 악! 고정하십시오! 악!”
김필모는 세 번 더 명패를 휘두르고 나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지경은 얼굴에 희열을 띠었다. 그는 맞은 팔뚝을 문지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