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306화
29-역사는 거꾸로 간다
“네게 부담될까 봐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설마 소개팅 때문에 걸릴 줄은 몰랐네.”
경완의 푸념에 미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빠. 원하는 일이 아니면 안 해도 돼. 나 이미연이야.”
경완은 그녀의 얼굴을 잠시 물끄러미 보다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네가 여태 쌓아올린 것들을 무시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이 일은 네 영역 밖의 일이야. 잔인한 폭력과 냉혹한 권력이 얽힌 일이지. 그리고 이 분야의 전문가는 나고.”
미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빠 여태 백수였잖아.”
“사자는 백수라고 해도 사자야.”
시답잖은 농담으로 진지한 분위기를 환기해보려고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미연은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오빠, 나 때문에 희생하지 않아도 돼.”
결국 경완도 진지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희생할 생각도 없으면 누군가와 같이 살 이유가 없지. 너도 나 때문에 많은 걸 희생했잖아.”
그러니 나 역시 너를 위해 희생하겠다, 원치 않는 일이라도 하겠다는 각오였다.
미연은 그의 결심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닫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경완은 그녀를 품에 안으며 다독였다.
“괜찮을 거야. 그러니 너무 걱정 하지마.”
“응.”
미연은 작게 대답했다.
* * *
29-역사는 거꾸로 간다
군부 정권이 국가 권력을 장악했지만 의외로 서민생활에 큰 타격은 없었다. 아직 그 여파가 아래에까지 전파되지 않을 것일 수도 있었지만 군부 정권은 정책적으로 서민 경제에 손을 대기보다는 인적 청산부터 진행했다.
향후 있을 개혁은 국민의 선택을 받은 전문가에게 남겨두고 본인은 그러한 개혁에 걸림돌이 될 적폐부터 우선 몰아내겠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다.
일단 숙군 작업으로 별들을 갈아치우고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도록 완전히 장악한 후, 감사원을 털고 기획재정부를 털었다.
사법 마피아를 털어냈으니 이젠 모피아 등의 엘리트 카르텔을 털어내겠다는 의지가 노골적이었다.
그리고 여기엔 먼저 장악했던 법원과 검찰의 존재가 매우 유용했다.
아무리 정청완 준장에게 정신계 능력이 있더라도 인텔리들의 지적 능력과 업계 대한 법률적 지식이 지원되지 않았다면 진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디까지 용납하고 어디까지 잘라낼 것인가 그 기준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아군을 절대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언론은 한층 더 가열차게 거품 물고 욕설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으며 여론 선동을 시작했다. 언론사주가 잡혀갔을 때보다 더 격렬했다.
누군가의 말을 빌자면 발광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다음 적폐가 언론임을 그들도 뻔히 알기 때문이었다. 공직자 사회의 적폐가 정리된 후엔 그 칼이 민간 영역의 적폐로 향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이렇듯 언론이 온갖 허위선동으로 여론몰이를 시작했지만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은 생각만큼 그리 크진 않았다. 적어도 광주 때처럼 대대적인 범국민적 반발을 기대한 언론의 의도는 정청완 준장의 속도전에 완전히 뭉개졌다.
국회의원도 잡아가고 법관도, 검사(檢事)도 신속하게 잡아가는 대대적인 물갈이가 뭔가 변화가 일어날 거라는 기대를 국민들에게 심어주는 것에 성공한 덕분에 범국민적인 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단은 두고 본다는 민심을 저변에 까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산발적인 데모와 시위가 없진 않았지만, 그 규모가 그리 크진 않았고, 소규모 시위는 무시해도 무방했다. 혹여 폭력 사태가 일어나도 초능 특수전 부대의 초능력자들이 나서면 순식간에 무력화되었다.
이쯤 되면 쿠데타의 성공만이 아니라 군부 정권 역시 안정기에 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걸 21세기, 정보화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성공했다는 점에서 정호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한 사람이네요.”
“그러니 초능 특수전 부대원들을 휘어잡았죠.”
경완이 대꾸했다.
그와 정호태는 위버멘쉬 코리아 지부장 사무실에서 앞일에 대해 논의 중이었다. 그러니 군부 정권과 그 수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연구소는 잘 다녀왔습니까?”
정호태가 물었다. 마리아 소장과 만나서 중화 영역에 대응하는 방법에 관해서 실험한 일을 물은 것이다.
“다녀는 왔는데…….”
“결과가 신통찮았던 모양이네요.”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화 영역은 파동의 형태로서 S입자가 물질계에 간섭하는 과정을 교란했다. 간섭 과정 자체를 교란하기 때문에 S입자의 출력이 강해도 좀처럼 막기가 어려웠다.
마리아 소장이 설명하길, 순수한 출력으로 중화 영역의 효과를 막아내는 건 불가능하진 않지만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했다.
역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중화 영역이 투과하지 못하는 초능력 신소재를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경완이 초능력 신소재로 만들어진 TSTG를 입고 다닐 순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그걸 두고 볼 군부 정권도 아니었다.
하지만 궁리하면 방법이 있다고, 경완에겐 교도소에서 살던 시절 배웠던 괴력 능력이 있었다.
S입자 구성체를 근육 사이에 박아 넣는 식이라 쿨타임이 있는 능력이었지만 그 부수적 효과가 이런 경우에 꽤 쓸만했다.
거죽을 질기게 하는 능력.
경완은 그것만 떼어 내어 전신의 피부에 적용했고, 결과적으로 중화 영역이 피부 안으로 침투하는 건 막아낼 수 있었다. 거죽을 질기게 하는 능력이 물성변질 계열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염동력이나 중력 제어 같은 능력은 제한된다는 약점이 있기는 하지만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괴력 능력은 발휘할 수 있었으니까. 당장은 이 정도만 해도 훌륭한 성과였다.
“차근차근 대응책을 찾아봐야죠.”
그런 기대가 딱히 소용없진 않은 게 마리아 소장이 중화 영역에 대한 연구로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경완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중화 영역이 초능력에 간섭하는 방식을 통해 S입자가 현실에 간섭하는 원리를 캐내보겠다는 것이다.
다만 그 연구가 경완에게도 이로울 것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원리를 파악하면 중화 영역을 막을 방법도 찾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아쉬운 점이 있었다. 중화 영역 능력을 복제할 수 있었다면 그 작업이 더 쉬울 텐데, 정청완 준장, 아니 이젠 진급해서 중장이 된 그는 마리아의 요청에도 중화 영역 능력자의 정체나 소재에 대해서 일절 함구했다.
혹여나 그녀가 중화 영역 능력자와 경완을 만나게 했을 때 벌어지는 일이 수습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경완이 중화 영역이라는 능력을 복사한다면 그에게 강력한 칼을 하나 쥐여주는 셈이며, 중화 영역을 탐내는 자들에게 이경완이라는 선택지를 추가해주는 것만으로 정청완 준장은 중화 영역이라는 카드를 외교상으로 활용하는 일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중화 영역은 중요한 협상 카드였다. 그건 대(對) 초능력 대응 방법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점이었으니까.
“어때요? 정청완 중장이 무리한 부탁은 하지 않아요?”
“일단 정상적인 영업은 해도 된다는 소리를 받았습니다. 다만 대기업, 아니 재벌들과는 거리를 두어달라는 요청은 받았죠.”
“여전히 무력적인 측면으로 도와달라는 말이 있나 보죠?”
“어디요? 재벌요?”
경완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호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거절하는 핑계가 절묘한지 이해는 하더라고요. 중화 영역 말이죠. 그거 때문에 우리 위버멘쉬 코리아에 소속된 초능력자들이 맥을 못 춘다고 하니 딱히 별말 없더군요. 잠적한 핑계로도 좋고요.”
사실은 괜한 누명을 쓰거나 손해를 보기 싫어서 잠시 몸을 피한 거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편리한 핑계였다.
“거절해도 그리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죠?”
경완의 물음에 정호태는 눈빛이 깊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단 제 능력 때문은 아닌 것 같아요.”
정호태의 능력은 호르몬 조작으로 상대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아무래도 재벌과의 협상 자리에선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라도 분위기가 좋도록 능력을 써야 했겠지만 그 자리에 있던 장본인으로서의 판단으론 단순히 능력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역시 중화 영역의 약점을 파악한 모양이죠?”
“재벌이 보유한 초능력 전력도 그리 우습지만은 않거든요. 아마 쿠데타를 막는 과정에서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이 크죠.”
아무리 위버멘쉬가 많은 초능력자를 확보했다고 해도 구속력은 느슨했다. 원래 초능력자들의 권익을 보장한다는 슬로건을 내밀고 확장한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 많은 부귀영화를 노리는 초능력자들은 기꺼이 대기업과 손을 잡고 그 산하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초능 특수전 부대의 쿠데타를 막지 못했다는 건 그들 역시 중화 영역의 쓴맛을 진하게 맛봤을 가능성을 암시했다.
“TSTG를 확보하려고 난리겠네요.”
“그렇죠. 강력한 방탄성능도 갖출 수 있으니까.”
경완의 예측에 정호태가 맞장구쳤다.
TSTG는 중화 영역을 전개해 초능력을 무력화한 후 총기를 사용하는 초능 특수전 부대원들에겐 완벽한 카운터였다. 왜 쿠데타 와중에 TSTG의 활약이 들리지 않았는지 이상할 정도로 말이다.
“다들 마리아 소장님을 찾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TSTG 제작에도 일가견이 있는 전문가였으니까.
정호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저희에게 그분의 위치를 찾아달라는 문의도 있었죠.”
“아니, 위버멘쉬를 뭐로 보고 흥신소 취급을 하는 거죠?”
경완의 과장된 어투에 정호태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뭐, 별반 다를 게 없을 수 있죠. 흥신소나 저희나 적절한 능력을 가진 인력을 통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잖아요?”
“에이, 그렇게 따지면 보안업체도 흥신소나 마찬가지죠.”
“그 말도 맞습니다. 미국의 보안업체 중엔 흥신소 못지않은 정보력을 가지고 있는 곳도 많아요. 없으면 외주를 주기도 하죠.”
경완은 그 말에 한국에서 탐정업을 허가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정보라는 자원에 내재된 폭력성은 곧 권력과 연결되니까.
“아참, 오늘 정청완 중장의 중간발표가 있다던데. 알고 계세요?”
“알죠. 언론에서 요즘 한창 까댔잖아요.”
언론의 제1주적이나 표적이라고 한다면 단연코 쿠데타 사령관인 정청완 중장이었고, 당연히 그에 대한 중상모략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그의 가족 관계는 이미 까발려진 지 오래였으며, 세력인지 민심인지 모를 키보드 워리어들이 그의 가족을 씹어댔다.
정청완 중장 본인은 독자(獨子)에 아직 결혼도 안 해서 다행이었지만, 그의 부모와 친척은 이미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라는 건 언론이 보도하지 않아도 언론의 극성스러운 태도를 목격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슬슬 할 시간이네요. 보시겠어요?”
“그래야겠죠?”
정호태의 반문에 경완은 입맛을 다시며 대꾸했다. 위버멘쉬 코리아를 울타리 삼고 한국에 자신과 미연을 보호할 영역을 구축하기로 했을 때부터 사회와 상호작용을 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국민 여러분. 정청완 중장입니다. 오늘은…….]
[쿠데타 수괴는 물러나라!]
정청완 중장이 발표하려는 와중에 갑자기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누군가가 단상에 난입한 것이다. 누가 봐도 히어로 코스튬을 입은 것이 히어로임이 분명해 보였다.
[나 히어로 켁!]
자신의 히어로명을 자랑스럽게 떠벌이려던 이름 모를 히어로는 그대로 초능 특수전 부대의 중화 영역에 초능력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제압당한 뒤 끌려갔다.
순식간에 일어났다가 끝난 해프닝에 경완이 감상을 말했다.
“요새도 저런 관심종자가 있나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