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312화
29-역사는 거꾸로 간다
“정말 감사합니다. 경완 씨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깔끔하게 일을 끝내지 못했을 겁니다.”
경완은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없었더라도 미국의 히어로들을 동원했다면 초능력 바이오해저드가 일어나지 않고도 마약 생산 기지를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웜홀 능력이 아니었다면 좀비헐크마약의 생산에 대한 자료와 샘플로 삼을 수 있는 생산물, 그리고 생산장비까지 이렇게 깔끔하게 처분할 순 없었을 것이다.
이동 거리와 시간이 길어지면 빼돌릴 가능성도 커지니까.
경완이 다시 생각해 보니 요하네스가 부탁한 이유가 단순히 그가 공인된 최강의 초능력자이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는 웜홀 능력이 더 중요했던 건 아닐까? 일종의 병목지대를 만들어서 미국조차 물건을 빼돌리지 못하게 계략을 짜기 위해서 말이다.
저렇게 미국 히어로들의 도움까지 미리 준비한 것을 봐도 경완의 웜홀 능력을 통해 자료와 마약이 운반될 것이라 예견했다는 방증이었고, 이 모든 상황을 요하네스가 조정했다는 말이었다.
“역시 총수님은 감탄만 나옵니다.”
“과분한 칭찬입니다.”
경완의 감탄에 대답하는 요하네스의 미소는 잔잔했다.
그는 경완과 악수한 손을 놓으면서 말했다.
“돌아가시면 귀찮은 일이 대부분 마무리되어 있을 겁니다.”
“귀찮은 일이라면?”
“한국의 질서는 정청완 중장의 영향력 아래 재편될 겁니다.”
그 말에 경완의 머리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혹시 중화 영역 장비가…….”
“더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죠. 지금은 우선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요. 나중에 제가 먼저 연락하겠습니다.”
요하네스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떠버렸고, 경완은 헐…… 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요하네스 발푸기스의 손에 조정되고 있었다?
“소오름.”
집으로 돌아온 경완으로부터 이 모든 이야기를 들은 미연은 누운 그의 옆구리에 달라붙은 채 팔을 문질렀다.
경완도 그녀의 매끈한 팔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쿠데타가 일어난 배경엔 위버, 아니 요하네스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
하긴 생각해 보니 아무리 우연이 겹쳤다고 하더라도 중화 영역 장비 같은 물건이 아무리 초능력자라지만 무지성 징집으로 이루어진 초능력 병사 집단에서 자생적으로 튀어나왔을 가능성은 너무나 낮았다.
우연이 겹쳤다고 쳐도 중화 영역을 카피할 코어는 어디서 구한 걸까? 군용 장비의 것을 빼돌렸을 수도 있지만, 요하네스의 의미심장했던 말을 들어보면 그 가능성도 의심해 봐야 했다.
미연이 물었다.
“정호태 지부장이 알고 있었을까?”
“글쎄. 모르는 눈치이기는 했지.”
“알려줄 거야?”
“먼저 요하네스랑 이야기해 보고.”
입은 만화(萬禍)의 근원이라지 않은가? 정호태에게 말하는 건 요하네스와 이야기를 해본 뒤에 고민해도 늦지 않았다.
* * *
요하네스가 했던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한국의 대기업들은 정청완 중장에게 매우 협조적인 자세를 취했다.
어느 정도냐면 정청완 중장의 요구에 따라 해외 페이퍼 컴퍼니에 도피한 비자금 대부분을 인정하고 회사나 정부로 환수했을 정도였다.
아니 이게 무슨 천지가 개벽할 일인가 싶었지만, 경완이 내막을 파악하기엔 알려진 정보가 너무 없었다.
다만 요하네스가 쿠데타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되어 있었던 만큼, 어떤 도움이 있지 않았겠냐고 추측 정도는 하고 있었다.
인터넷에선 역시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아니 이젠 초능력에서 나온다며 적폐청산에 대한 기대와 초능력 군사정권에 대한 우려 섞인 여론이 흘렀고, 언론에선 당연히 민주주의는 죽었다, 공산빨갱이가 나라를 장악했다며 날뛰었다.
어떻게든 정권에 타격을 주고자 온갖 근거 없는 비난과 유언비어를 퍼뜨리던 언론에게 정청완 중장은 신문 부수 조작에 대한 감찰 시행이란 철퇴를 내렸다.
사실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종이신문은 경쟁력이 추락한 지 오래였지만 신문사들은 굳이 종이신문을 발행해서 부수를 조작한 다음 수천억의 정부보조금을 받아내고 있었다.
부수 조작으로 혈세를 빨아먹고, 윤전기에서 막 나온 따끈따끈한 신문을 또 계란판 공장에 팔아서 이윤을 얻는 주류 언론 신문사들의 수익구조는 쉬쉬해도 감추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경완은 돈이라는 발작 버튼이 눌린 언론이 어떻게 날뛰는지 구경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어 보였다.
딱 봐도 대세가 정청완 중장에게 넘어간 상황이라 더 이상 경완의 무력이 필요해서 귀찮게 할 이들이 없어 맘 편하게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정청완 중장이 초심을 잃을 가능성이 우려스러웠지만, 그건 요하네스와 이야기한 이후에 고민하는 게 순서에 맞았다.
경완이 요하네스의 연락을 기다리며 집에서 쉬고 있을 때, 하루는 정호태 지부장이 방문했다.
“경완 씨.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뭐, 정 지부장님은요?”
“갑자기 일이 너무 잘 풀려서 얼떨떨합니다.”
군부정권과 대기업 사이에 끼어서 피곤해질 줄 알았는데 갑자기 전경련이 군부정권에 전폭적으로 협조하여 국가경제와 민생이 안정되도록 힘쓰겠다고 발표하니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과연 그들이 발표한 대로 위버멘쉬 코리아는 여러 대기업과 쿠데타 전과 큰 차이 없이, 아니 오히려 더 편하게 다양한 계약을 하고 사업을 진행했다.
초능력이 앞으로의 국가 경제에 핵심이 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으니까.
경완은 뭐, 그럴 때도 있는 거라며 정호태 지부장을 안심시키고는 슬쩍 미끼를 던졌다.
“그런데 요새 위버멘쉬 본부에는 별일 없답니까?”
“별일이 있기는 했죠.”
“뭔데요?”
“갑자기 창립 멤버들을 불러 모으더군요.”
“무슨 일로요?”
“봉남 씨 말로는 배신자가 생겼다나?”
“봉남 씨도 간 거예요?”
“네. 잠시 브라질 간다고 휴가를 내더군요.”
경완은 요하네스가 마약 생산 장비에서 꺼낸 코어에서 일련번호를 확인하는 걸 떠올렸다.
“혹시 코어에 일련번호가 새겨져 있어요?”
“어? 그걸 경완 씨가 어떻게 아세요? 아는 사람이 많이 없는 사실인데?”
“아니, 그냥 전자제품에도 일련번호가 있잖아요. 부품에도 일련번호가 있는 경우가 많고요. 그러니 초능력 확장 장비도, 또 그 구성품인 코어에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요하네스가 코어 일련번호를 확인하는 걸 보고 알았다고 말할 순 없어서 에둘러 말하자 정호태는 이렇게 설명했다.
“아무래도 코어가 강력하고 중요한 물건이잖아요. 민간에 풀리는 물량은 거의 없죠. 있다고 해도 히어로 컴퍼니 같은 곳에나 공급합니다. 기업이나 제조업에 공급하는 코어 장비는 주기적으로, 혹은 불시에 점검을 받게 되어 있어요. 일련번호를 붙이는 건 관리를 위해서라도 당연한 일이죠.”
“그 일을 본사에서 하나요?”
“아니요. 그러기엔 너무나 많죠. 그래서 독립한 지부에 외주를 맡깁니다.”
그 말에 경완은 잠시 고민하다가 요하네스의 부탁으로 남미에 갔던 일을 언급했다. 거기서 좀비헐크마약이라는 초능력 마약의 존재도 말이다.
“아마 김봉남 씨가 브라질에 간 게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코어가 유출되었다는 소리군요.”
경완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호태 지부장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지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정청완 중장의 병력이 사용하던 중화 영역 장비의 코어는 어디서 유출된 걸까?”
“그야 군에서 유출된 거 아니겠습니까?”
경완은 요하네스가 건네줬을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대꾸했다.
그러자 정호태 지부장도 말을 아꼈다.
“아니,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하죠.”
“왜요?”
“확인되지 않은 추측을 말하는 건 득보다는 실이 많기 때문입니다.”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호태 지부장도 쿠데타에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는 걸 짐작한 모양이었다.
이윽고 화제를 전환한 정호태는 위버멘쉬 코리아의 방침에 관해서 의견을 교환하다가 돌아갔고, 경완은 위버멘쉬 코리아의 비상임이사로서 거액을 연봉을 받기로 했다.
그 대신 위버멘쉬 코리아에 큰일이 나면 나서야 하는 의무를 지기는 했지만, 대신 위버멘쉬 코리아가 사회경제적 울타리가 되어주기로 했으니 서로 윈윈이었으며 경완이 목표했던 바도 이루어졌다.
그래서인지 미연도 수혜를 받았다.
“어쩐지 최근에 광고가 좀 자주 들어오는 것 같더라니…….”
아무래도 위버멘쉬 코리아와 경완, 미연의 관계를 알기 때문인지 점수 좀 따고 싶은 기업이 있는 모양이었다.
광고료가 들어온 광고의 성격치고 높기는 했지만 결국엔 연예인의 이미지를 소비하기 때문에 미연은 광고료가 높다고 섣불리 수락하지 않았다. 어차피 음원 수익도 좀 있고 드라마나 영화로 번 수익도 재무설계사를 통해 잘 관리 중이었다.
“사람이 원래 그런 거니까 너무 실망하지 말고.”
“알거든.”
미연이 웃으며 경완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경완은 뺨을 쓰다듬으며 어제 요하네스와의 통화내용을 떠올렸다.
[경완 씨. 궁금한 게 정말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청완 쿠데타의 뒤에 총수님이 있었던 겁니까?”
[전 그냥 불씨에 불쏘시개를 살짝 얹어줬을 뿐입니다. 불을 지르기로 결정한 건 당사자들이죠.]
“그럼 결국 중화 영역이라는 것도 위버멘쉬에서 확보한 능력이군요.”
[네. 초능력 각성이 일어났던 초기에 풀리면 기득권의 손에 쥐어져서 초능력자 탄압과 착취에 사용될 여지가 크니까요.]
경완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위버멘쉬가 이렇게 세계 각국에 자리를 잡고 그 세력을 인정받기도 전에 중화 영역이라는 능력과 장비를 확보했다는 말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먼 미래를 내다보고 행동하는 걸까?
[너무 놀라실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엔 정말 별의별 능력이 다 있으니까요. 경완 씨도 중국에서 초능력자를 죽여 그 능력을 흡수하는 초능력자를 겪어보셨잖아요.]
“그럼 어딘가엔 그 위험한 초능력 마약 같은 걸 생산할 수 있는 초능력자도 있다는 말이군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그리고 그렇게 다양한 능력이 있는 만큼 상극인 능력도 존재하고요.]
“혹시 저에게 상극인 능력자도 있을까요?”
[뭐가 걱정인가요? 경완 씨는 시간과 기회만 있다면 상대방의 능력을 복사할 수 있지 않나요?]
경완이 보유하고 있는 능력과 상극인 능력은 존재하지만 결국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상성이 없다는 말이니 요하네스가 경완을 극진히 여기는 또 하나의 이유인 걸까?
“혹시 이번 일 아니고도 또 그러한 수준의 위기가 닥치는 겁니까? 세계적으로 거대한 재앙이 닥칠 정도로?”
[흐음……. 지금으로서는 말하기 힘들군요.]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아마 스스로 확신이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 같은데, 이미 예언능력자라고 확신하는 경완에게 그런 요하네스의 말은 마치 멀리서 날아오는 소행성 충돌 같은 미래는 미리 예지하기 쉬워도, 갑작스런 인간의 변심에 의한 사고는 그러기 힘들다는 말처럼 들렸다.
경완이 물었다.
“그럼 적어도 큰일이 나기 전에 알려는 주실 거죠?”
[제가 부탁할 말입니다. 경완 씨가 손을 보태준다면 어떤 위기도 헤쳐나갈 수 있겠죠.]
경완은 헤쳐나가다는 말에 ‘쉽게’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은 것이 심히 걱정되었지만, 굳이 묻진 않았다.
“기꺼이 돕겠습니다.”
[좋군요. 아주 좋아요.]
뭐가 그리 만족스럽기에 좋아요를 연발하는 걸까?
원래 경완에게 잔뜩 이유 모를 호의를 품은 인간이라 경완은 묻지 않고 주제를 살짝 바꾸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