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전생 더 빌런-317화 (317/367)

무한전생-더 빌런 317화

29-역사는 거꾸로 간다

귀빈 환영을 위한 리셉션은 내일 열릴 계획이라 일단은 숙소를 안내받았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경완이 방을 한번 둘러보며 창밖의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최재빈의 수행비서가 문을 두드렸다. 최재빈이 같이 식사를 하자고 보냈단다.

수행비서를 따라 최재빈의 방에 들어간 경완은 룸서비스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최재빈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얄라라는 친구가 친중파였답니다.”

“아, 그래서…….”

경완은 이얄라의 표정이 안 좋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한 가지를 우려했다.

“그럼 방해가 많지 않을까요?”

경완도 나름 필리핀에 대해서 대강은 알고 있었다. 화교가 경제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던가? 이얄라 같은 이가 경완을 경계한다면 우선 일부러 최재빈의 애로사항이 꽃필 수 있었다.

하지만 최재빈은 그다지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얄라 그 친구가 좀 특이할 뿐이죠.”

모든 화교가 친중은 아니었다. 필리핀을 장악한 화교는 오랜 시간 필리핀에 살아왔기에 과거 중공이 주장하던 하나의 중국이라는 구호에 시큰둥했다.

이미 기득권으로 자리 잡은 화교에게 친중이란 그저 중국과의 관계에서 본인들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위장에 불과했었다.

반면에 뒤에 필리핀에 들어온 화교들은 친중 성향이 강했다. 화교를 다시 경제적 계층으로 나누면 중산층 이하쯤 되는 계층이 친중이라는 뜻이었다.

그들에게 하나의 중국, 중국몽은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사상적인 기반이자, 중국의 영향력을 통해 경제적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비전이기도 했던 것이다.

경완은 최재빈의 설명에 허허 웃었다. 결론적으로 이경완이라는 사내가 그들의 비전을 박살 냈다는 소리니까.

“이야. 이거 길거리에 돌아다니다가 돌 맞겠는데요.”

“하하. 엄살도 참.”

최재빈은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웃었지만 경완에겐 농담이 아니었다.

“중국에서의 경험에 따른 확신이에요. 중화사상은 종교나 다를 바가 없었거든요.”

주변의 모든 사람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눈인 걸 경험해 봐라. 초능력이 일 푼이라도 있으면 몰라.

아무런 능력도 없는 무지렁이조차 적대감 어린 눈으로 주변을 살피다가 경완을 발견하면 즉시 공안에게 신고하고, 그럼 군대가 출동하고, 그럼 싸우거나 탈출해야 하는 경험을 하다 보면 경완과 같은 편견을 가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 사람들 하는 거 보면 종교가 참 중요하다 싶어요. 제대로 된 종교가 없으니 그런 사이비들이 퍼지는 거잖아요.”

최재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도 사이비가 판을 치고 있었기에 피부에 와닿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물었다.

“혹시 경완 씨, 믿는 종교가 있어요?”

“아니요. 없는데요.”

그럼 왜 제대로 된 종교 운운하면서 종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거지? 최재빈은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입단속을 해야 했다.

* * *

최 회장과의 저녁 식사는 나름 재밌었다. 그가 말해주는 재계와 재벌의 썰은 매체에 표현된 것과는 많은 것이 달랐고, 결국 그들도 희로애락을 느끼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다만 돈이 ㅈ나게 많아서 돈 때문에 고민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큰 차이일 뿐.

물론 그러한 인상은 경완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가 만일 쥐뿔도 없는 인간이었다면 과연 재벌인 최재빈이 그런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줬을까? 아니, 식사에 초대하는 일조차 있을 수 있었을까?

빈자들에 대한 가진 자들의 경멸과 거부감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한다. 한국만 해도 임대 아파트 사는 이들을 임대거지 운운하면서 아이들까지 차별하지 않던가?

그런 한국이나 부촌 구역과 관광지에만 치안력을 집중하는 필리핀이나 빈자에 대한 무시와 경멸 어린 태도는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리고 경완이 최재빈을 따라 참가한 파티의 내용에선 그런 인식을 더욱 적나라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에 세부의 한 지역을 재개발할 생각인데 한국 기업의 투자가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 지역은 빈민가 지역이지 않습니까? 보상금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하하하! 미스터 최. 여기는 필리핀이에요. 그리고 세부에 한국인들이 많지 않습니까? 세부의 빈민가가 재개발되면 한국인을 상대로 하는 범죄도 줄어들고 한국 관광객도 더 안심하고 많이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필리핀의 족벌들은 그들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빈민촌을 밀어버리는 일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한 고통과 사회적 비용은 족벌의 관심 밖이었다.

한국에서도 용역 깡패를 동원하는 일이 오래전 이야기가 아니었으니 비단 필리핀 족벌들만의 잔인함이라고 치부할 순 없는 이야기였다.

경완은 다른 이들과 인사하기 위해 자리를 옮기는 최재빈의 뒤를 따라가며 조금 전의 대화에 관해 물었다.

“투자하실 거예요?”

“아니요. 외부인의 부동산 투자는 여러 가지로 제약이 많아서요.”

최재빈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목적은 동아시아 남북 무역 망에서 한 자리 차지하는 거지, 부동산 투기가 아니었다.

솔직히 그런 막대한 이득이 나는 부동산 사업에 국민적 반감을 감수하면서까지 외국인을 참여시켜 주겠는가? 저 투자 제안은 그저 외국 자본을 빨아먹어 볼 수 있지 않을까 간을 보는 것뿐이었다.

자리를 이동한 최재빈은 연회장 한편에 모여 있는 무리에 끼어들었다. 아까 전부터 그 자리로 가려고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 자리에 중요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갑습니다, 조셉. 저는 한국 영호 그룹의 최재빈이라고 합니다.]

[아, 반갑습니다.]

그리고 경완은 사진으로만 조셉의 얼굴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 백인피가 섞인 혼혈인 조셉은 사진으로 본 인상과는 달리 말쑥하게 잘생기고 건장한 체격의 남자였다. 장소와 몸에 걸친 옷 덕분인지 귀태까지 났다.

조셉은 최재빈과 인사를 나누다가 최재빈의 어깨너머로 경완을 발견했다.

경완의 얼굴을 본 조셉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점점 표정이 굳어졌다.

“Who’s he?”

조셉의 말에 최재빈은 이경완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조셉은 아무도 모르게 빠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경완에게 손을 내밀었다. 애써 웃어보려 했지만 잔뜩 긴장한 기색인 것을 경완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세계 최강의 초능력자를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이랄 것까지야. 저도 필리핀 지부장님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경완은 악수를 나누면서 언제 어디로 가든 추적할 수 있도록 그의 피부에 마커를 남겼다.

솔직히 지금 단계에서 조셉을 만날 계획은 아니었지만 최재빈 탓을 할 순 없었다. 그에게 일의 전모를 밝히지 않았기에 그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방어적으로 움직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조셉과 조우하는 것도 향후 변명이나 알리바이를 대기 위한 방어적 심리의 발로라 할 수 있었다.

조셉은 경완과 악수를 나눈 후 질문을 던졌다.

[필리핀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여기 최 회장님 따라왔어요.]

[그래요?]

조셉이 최재빈 회장을 보는 시선이 변했다.

어떻게 당신 같은 인간이 이경완을 데리고 다닐 수 있냐는 시선에 최재빈의 기분은 복잡해졌다.

명색이 재벌인데 이런 무시는 처음이야!라는 모욕감에 자신이 그동안 이쪽 초능력자들의 세계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는 회의감이 섞였다.

복잡한 기분이었지만 확실한 건 경완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최 회장이 회사로 돌아가 아랫것들을 닦달할 계획을 세우는 동안 조셉은 경완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딱히 목적이 있으신 건 아닌 모양이죠?]

[네. 그냥 최 회장님 따라다니면서 구경 좀 하다가 괜찮은 곳 있으면 나중에 걸프렌드랑 놀러 오려고요. 필리핀은 관광지로 유명하잖아요.]

조셉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고 보니까 곤잘레스 아십니까?]

[누구요?]

[이 친구 말이에요.]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 얼굴이네요. 아! 예전에 제가 교도소에 있을 때 교도소 담벼락 무너뜨리고 들어온 친구네요.]

그걸 친구라고 부를 수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경완의 대답이 천연덕스러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조셉은 일단 경완과의 인연이 닿았다는 것이 제법 기꺼운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 친구는 현재 위버멘쉬 필리핀에 소속되어 있답니다. 제 밑에서 일하고 있죠.]

그러면서 위버멘쉬 필리핀의 업적, 아니, 본인의 업적을 자랑하는 티가 나지 않도록 설명하는 재주를 부렸다.

경완은 감탄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꽃피었다. 이렇게 자신의 호의를 사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뒤통수를 쳐야 하니 당연히 마음이 불편한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야밤에 몰래 호텔 옥상에 올라와 그런 심정을 토로하는 경완을 보며 곤잘레스는 멍한 얼굴로 얼굴을 긁적였다.

“그렇습니까?”

“이게 사람이 양심이 있지. 솔직히 조셉 그 친구가 필리핀 지부를 위해서 세운 공이 적지 않잖아요?”

경완이 이런 소리를 하는 건 조셉이 그냥 욕심쟁이 우후훗인 줄만 알았는데 대화를 나눠보니 사람이 진중하고 카리스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괜히 지부장이 된 것이 아니랄까?

그런 사람이라면 필리핀 지부 내에서도 지지세력이 많을 텐데, 과연 곤잘레스가 하극상하고 쿠데타를 벌이면 어찌 될까?

아마 내분과 분열이 일어나 위버멘쉬 필리핀 지부의 역량이 꺾여 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필리핀의 족벌들이 위버멘쉬 필리핀이 쥐고 있던 초능력자 공급 시장에 손을 댈 것이 분명했다.

이는 한국지부와 필리핀 지부를 연대해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냐는 본래의 목적에 대한 의문과 맞닿아 있었다.

곤잘레스는 이내 착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기는 합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필리핀은 다시 식민지 꼴이 날 수도 있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무슨 식민지인가 싶지만, 사실 제국주의는 좀 더 세련되어졌을 뿐 사라지지 않았다.

미국에 본사를 둔 초거대 다국적 농업기업은 남미의 농부들을 조져서 거대한 식량 제국을 일구었고, 세계적인 오일 컴퍼니는 시장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로비와 불법 행위는 물론 심지어 전쟁까지 부추겼다.

아프리카의 지하자원을 점유하기 위해 독재자와 손잡는 기업들도 있었다.

제국주의는 결국 영향력과 기득권, 이득을 보장하기 위한 사상일 뿐이었고, 제국주의가 채산성이 맞지 않다는 걸 역사적 경험으로 터득한 이들은 다른 방법으로 영향력과 기득권, 이윤을 보장하려 했고,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매우 훌륭한 대체재였다.

제국주의는 붕괴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던 착취의 시스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은 서구세력에 의해 회유당하거나 숙청당해야 했다.

그래서 많은 아프리카의 나라들은 식민지를 벗어난 후에도 수십 년간 차관과 돈을 갚기 위해 이권을 빼앗기고 원료들을 헐값에 공급했다. 괜히 아프리카 각지에서 군벌들이 일어나 자원 민족주의를 부르짖었겠는가?

식민지배를 벗어나더라도 경제적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기 힘들었던 것이 식민지의 비애였다. 한국도 미국의 비호와 일본의 버블붕괴가 아니었다면 가마우지 경제로 여태 일본에게 피를 빨리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곤잘레스는 이러한 세상의 이치를 잘 알았다. 필리핀의 족벌들은 본인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필리핀 사람들의 삶을 가난의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을 준비가 된 자들이었다.

다른 위버멘쉬 지부가 대가를 제시한다면 언제든 위버멘쉬 필리핀 지부와의 손도 놓을 자들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