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326화
30-요하네스 발푸기스
“아무런 조건 없이라…… 대단하네요.”
[뭘요. 미국이 스스로의 탐욕으로 빚어낸 시련은 이제부터 시작인걸요. 저는 그때마다 미국이 필요한 걸 건네줄 생각입니다.]
마치 맹견이 먹이에 길들여지듯 그렇게 길들일 거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은 착각일까?
“근거지가 유럽 아니셨어요?”
[미국의 패권을 무너뜨리는 것보다는 그대로 이용하는 편이 낭비가 덜하죠.]
수백 년 동안 서로 죽고 죽여 온 역사는 물론 인종과 문화 차이마저 있는 곳이 유럽이었다. 아무리 EU니 하는 걸 만들어도 분열의 씨앗은 언제고 싹틀 수 있었다.
물론 미국도 인종차별 같은 불씨가 있기는 하지만 미국의 패권이 약화되었을 때, 그 혼란을 이용하는 시나리오는 변수가 너무 많았다.
경완은 요하네스의 구상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미국에서 제 힘을 필요로 하는 것 같은데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경완 씨 원하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저들이 위버멘쉬에 의존하든, 아니면 경완 씨에게 의존하든 그 끝은 하나로 귀결될 테니까요.]
요하네스는 경완을 세계평화로 향한 발판으로 삼는다는 계획을 밀고 있으니, 사실 경완이나 위버멘쉬나 한몸이지 않은가?
그런 요하네스의 대답에 경완은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이제 곧 연락할 김준이나 한국 정부에서 나올 공무원을 상대로 선택지가 더 넓어졌기 때문이다.
경완은 이것이 요하네스의 배려라고 느꼈다.
“언제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 너무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마우면 이번 회귀를 마지막으로 만들어달라는 뉘앙스로 받아들이는 건 비약일까?
아니다. 경완은 요하네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얼마나 사는 게 지겨울까? 그것도 사람 편하게 두는 것도 아니고 언제 세계멸망급 사건이 터질지 모르는 이 세계가 아닌가? 그런 세계를 회귀를 반복해서 경험하고 있으면 사는 게 지겨울 수밖에. 아니 정신을 놓지 않은 것만으로도 아주 대견한 일이었다.
요하네스와 통화를 끝내자마자 국정원의 이관영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괜찮다면 지금 만나러 가도 괜찮겠냐는 전화였다. 경완이 허락하자 이관영은 주한미국대사관 소속 국방무관실의 암스트롱 소위라는 자와 함께 방문했다.
경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암스트롱 소위는 시급한 미국의 상황을 경완에게 알렸다.
[지금 보여드리는 건 극비입니다.]
암스트롱 소위가 노트북으로 보여준 영상은 마치 SF 외계 영화를 연상시키는 듯 했다.
운석을 맞은 듯 깊게 파인 크레이터의 바닥엔 붉고, 검붉은 점액질이 울룩거리면서 천천히 퍼지고 있었다.
[네바다 주의 그레이트 베이슨 한복판에서 일어난 기이한 현상입니다. 저 점액질은 모든 유기물을 빨아들이며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으며 그 속도는 기하급수적입니다. 저희 국방부의 계산으론 한 달 안에 크레이트 베이슨 전역이 저 괴생명체에게 덮히고 두 달이 지나면 미국의 절반이, 세 달이 지나면 미국 전역이 저 생명체에게 뒤덮일 겁니다.]
[기이한 현상이라고 한다면, 미국에서 저 괴생명체가 자연발생했다고 보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암스트롱 소위의 말에 경완은 소파에 몸을 깊게 밀어 넣었다. 진실을 감추는 암스트롱 소위의 대답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경완은 추궁하지 않았다. 본인은 자세한 사정을 모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세 번이나 핵폭탄을 터뜨린 건가요?]
[네.]
암스트롱 소위가 대답했다. 저 괴생명체의 뿌리가 지하 깊숙이 박혀 있어서 단순 핵폭탄의 화력만으로 제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경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렇게 저를 찾아오신 건 제 도움이 필요해서죠?]
[그렇습니다.]
[미국의 그 많은 초능력자들은 뭐하고요?]
[……이미 한 번 투입했지만 위험만 부추겼습니다. 이게 관련 사진입니다.]
암스트롱 소위가 새로운 영상을 재생했다.
거기엔 초능력자로 보이는 이들이 방호복을 입고 뭔가를 뿌리며 유기물 덩어리를 제거하려고 했지만, 화면속의 유기물 덩어리들은 꾸물거리더니 갑자기 사람들에게 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몇 개는 촉수 같은 것을 뻗어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을 붙잡으려 들기도 하고, 어떤 것은 가시 같은 것을 만들어 접근을 방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무시무시한 장면은 화염 방사기가 지나간 자리에서 시커멓게 타버린 껍질을 벗고 폭발하듯 용솟음치는 살덩어리였다. 그것은 오히려 화염방사기를 집요하게 노리며 촉수를 뻗어와 결국 요원이 화염방사기를 버리고 도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화염방사기를 덮은 살점은 폭발하듯 증식했다.
[유기물과 에너지원을 확보한 후 증식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점점 엄청난 속도로 변이, 진화하고 있죠.]
크레이터의 중심엔 검붉은 색의 거대한 버섯이 있었다.
[저희는 이것이 광합성을 시작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엄청난 속도로 대기의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면서 양분을 만들고 있죠.]
[와우. 지구온난화도 해결할 수 있겠네요.]
경완의 농담에 이관영은 차마 못 보겠다는 듯 눈을 감았고, 암스트롱 소위는 화라도 난 듯 아주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미스터 리. 이건 세계적인 재앙입니다.]
저 살덩이의 가장 무서운 점은 적응력이었다. 이미 세 번의 핵폭발로도 소거하지 못한 살덩이는 이제 우주왕복선의 겉에 설치하는 단열타일과도 같은 대응 시스템을 만들어 고열로도 소각하기 힘든 물건이 되었다.
강염이나 강산에 대해서도 빠르게 적응하고 있어서 서둘러 제거해야 했다.
[그런 재앙을 저보고 어쩌라고요?]
[다행인 건 물리적으로는 충분히 파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경완 씨에겐 무엇이든 절단할 수 있는 절단 능력과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염동력이 있죠.]
[그러니까 저것이 뿌리내린 곳 깊숙이 핵폭탄 따위를 설치하고 터뜨리겠다는 건가요?]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다른 염동력자는요? 그 작전이 저만 가능한 작전입니까?]
[경완 씨만 투입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이 보유한 최고, 최강의 염동력자들이 함께할 겁니다.]
경완은 그 말에 머리를 긁적이더니 물었다.
[위버멘쉬에 지원요청은요?]
[음…….]
암스트롱 소위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진실의 스무고개를 구사하는 이경완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순 없었지만 너무나 민감한 이야기였다.
[사실 위버멘쉬와 알력 다툼이 있습니다.]
핵무기라는 패권의 한 축을 차지하는 물건에 관련된 일이니만큼 경완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미국은 저 사태를 미국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건가요?]
[네. 그래야만 합니다.]
[좋아요. 돕죠.]
경완은 일단 돕기로 했다. 미국의 전략은 충분히 들었고, 납득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일단 책임 소재는 정확히 하기로 했다.
[만일 이 작전이 실패해도 그게 제 책임은 아닙니다. 아시겠죠?]
암스트롱 소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경완은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아무리 미국에서 정보 통제를 한다고 하지만, 분지 중앙, 핵버섯이 세 번이나 피었던 폭심지 크레이터 중심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괴한 이들을 모두 가릴 순 없는 일이었다.
아름드리나무 크기로 자라난 폭심지 중앙의 검붉은 버섯은 이미 매스컴을 탔고, 시민들은 관계 당국에 무슨 일인지 문의가 빗발치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리고 경완이 전세기를 타고 미국으로 출발했을 쯤엔 그것이 초능력 바이오 해저드라는 사실이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고 있었다.
내용은 진실에 가까웠다. 그레이트 베이슨 분지에서 번지고 있는 저 생물학적 재해가 S입자를 잔뜩 주입한 헬라 세포라는 것을 정부조차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게 왜 저기 그레이트 베이슨 분지 한가운데 있는지는 유언비어가 많았다.
경완은 그러한 소문을 흘려들으며 그레이트 베이슨 근처의 공항에 도착했다.
“51구역에 들어가지 못해서 아쉽네요.”
경완이 동행한 김준에게 말했다. 네바다 주하면 51구역이 최고의 관광명소 아니겠는가?
김준이 피곤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굳이 갈 필요 없어서 그러지 않겠어요?”
왜 FBI소속 수사관인 자신이 이런 자리까지 따라오지 않으면 안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경완의 협소한 인맥을 생각하면 같은 한국계이자 가장 오래 옆에 붙어 있었던 김준이 아무래도 경완의 딱딱한 마음을 부들부들 어루만질 수 있다는 상부의 탁상행정 때문이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김준이 경완과 친분이 있다고 해도, 어느 지점에선 결코 넘을 수 없는 선이 있었다. 김준 본인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고 말이다.
주한미대사관과 국정원에서 붙여준 수행원들을 따라 두 사람은 공항에서 다시 경비행기를 타고 그레이트 베이슨 근처에 있는 베이스 캠프에 도착했다.
다양한 기자재와 음압구역도 있어서 사실 캠프라기보다는 임시 연구소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잘못 온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제대로 왔어요.”
초능력 헬라 세포의 특성을 연구해야 그것을 구제할 방법도 알아낼 수 있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논리였다. 하지만 명확히 구제할 방법을 찾기 전에 저것이 번지는 속도가 어마어마하다는 걸 먼저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이번 작전안이 나온 것이다.
경완은 대원들을 소개받았다. 미국의 S급 초능력자이자 히어로인 마이티 가이가 일행에 포함되었다. 신체강화능력자이자 동시에 강력한 염동력자이니 미국의 위기에 나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마이티 가이가 경완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경완은 눈을 껌벅이며 손을 내밀며 물었다.
[혹시 기싸움한다고 유치하게 손에 힘주거나 그러진 않겠죠?]
그 말에 마이티 가이는 활짝 웃었다. 흑인이라서 그런지 하얀 건치가 더욱 인상적이었다.
경완은 그 미소에 손잡을 생각이 사라졌지만 마이티 가이의 염동력이 경완의 손목을 붙잡았고, 반강제로 악수를 나누어야 했다.
[유치하게 꼭 이래야겠어요?]
경완은 검은 연기의 염동력으로 손을 보호했지만 손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압력에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마이티 가이가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하! 그동안 실력이 떨어지지 않았나 걱정되어서요.]
참 히어로스런 대꾸에 경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간단한 실력 테스트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아무리 이경완이 중국에서 벌인 일로 명성(?)이 높아도 마이티 가이쯤 되는 사람이면 그 명성이 사실인지 가늠할 자격쯤은 있었다.
솔직히 경완이 미연과의 달콤한 생활로 꿀을 빨 때 마이티 가이는 현역으로 활동하며 그간 실력과 역량을 쌓아오지 않았던가?
아무튼, 마이티 가이의 작은 시험을 통과한 덕분인지 별다른 트러블 없이 경완은 브리핑에 참석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전 세 번의 핵폭발은 총 세 개의 뿌리를 만들었습니다. 핵폭발에 타격받은 살덩이들은 지하 깊숙이 파고들었죠. 위험을 감수한 에스퍼들의 탐지에 의하면 그 깊이는 약 300미터. 그러니 적어도 250미터는 파고들어가야 합니다.]
가운을 입은 사람이 그래픽까지 가미된 프리젠테이션으로 목표깊이를 말하자 좌중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니까 저 흐물거리는 살덩이를 파내며 지하 300미터까지 파고들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경완이 혀를 찼다.
[괜히 핵폭탄을 터뜨려서…….]
아무리 스마트 포스필드 기술 덕분에 제염작업이 쉬워졌다고 해도 핵폭탄을 너무 쉽게 사용한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