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329화
30-요하네스 발푸기스
그런 경완의 반응에 요하네스는 피식 웃고 말았다.
“맞습니다. 명백히 다른 인물이죠. 하지만 저는 알고 있어요. 당신에겐 백마탄 초인의 씨앗이 잠재되어 있다는 걸. 당신은 세상의 비극을 충분히 경험할 때마다 지금의 그 가볍고 무책임한 겉모습을 벗어던지고 세상의 위기 앞에 나섰습니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초인이었죠.”
“아……. 그랬던가요?”
경완은 곤란한 표정으로 볼을 긁었다. 얼마나 미래가 시궁창이었으면 자신이 못 견디고 나섰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부디 그런 미래가 찾아오지 않도록 귀찮더라도 자신이 지금보다 좀 더 열심히 굴러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저 멀리 헬기가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하늘 높이 전투기도 날고 있었다. 높으신 누군가의 행차인 모양이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미(美)대통령이었다.
미대통령은 현장에 방문하자마자 요하네스를 찾아 감사인사를 했다.
[그대와 위버멘쉬의 도움에 감사를 표하지.]
[뭘요. 미국이 미리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저의 도움은 무용지물이었을 겁니다.]
[하하! 그렇소?]
입에 발린 말이었지만 어느 정도 사실이 담겨 있었기에 대통령의 입가엔 안심이 섞인 미소가 띄어져 있었다.
사태 해결에 결정적 키를 제공한 요하네스가 여섯 발의 핵이 무용지물이 아니라고 확인해 준 건 미대통령의 정치적 부담도 확 줄었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마냥 주기만 하는 요하네스는 아니었다.
[그리고 제가 부탁한 규제안 말입니다.]
[물론 해야지. 당연하고말고요. 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잖소.]
미대통령은 각오 서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하네스가 말한 규제안이란 초능력 연구 감시 및 관리감독에 관한 법률이었다.
미국 기업들의 대대적인 로비와 반발이 있을 것이 분명하지만, 미대통령은 자신 있었다.
이런 사태가 빚어지게 된 일의 책임이 무분별한 초능력 실험에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누군가는 여섯 발을 핵을 사용하게 된 사태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했다.
그리고 미대통령은 그 책임을 자신이 질 생각이 없었다. 이런 사태의 원인이 된 자들이 마땅히 그 책임을 져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미대통령은 요하네스가 부탁한 규제안을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이 일을 벌인 기업에 대한 철퇴의 의미로서 말이다.
요하네스와 대화를 나누던 미대통령은 경완을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미국에 대한 미스터 리의 헌신은 잊지 않겠소.]
[아유. 별말씀을요.]
경완은 입에 발린 말 정도는 능숙하게 할 수 있었다.
미대통령은 이어서 군인들과 연구원 및 작전에 투입되었던 이들을 만나 사건을 해결한 그들의 공을 치하한 후 돌아갔다.
그제야 모두는 각자의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었음을 느꼈다.
요하네스가 떠나기 전에 경완에게 말했다.
“경완 씨, 미국의 동향을 주시하는 것도 재밌을 겁니다.”
“음……. 정치나 시사 문제는 골치 아픈데요.”
“하지만 그 흐름을 보다보면 경완 씨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짐작이 되실 겁니다. 그리고 모쪼록 이번에 배운 능력에 대해서도 숙고하시길 바랍니다.”
“그냥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능력이 있으면 막 가르쳐 주면 되지 않나요?”
“그러면 대놓고 하면 위협을 느끼는 이들이 생깁니다. 경완 씨가 적극적으로 능력을 카피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는 거죠.”
백인의 입에서 타초경사라는 고사성어가 나오니 나름 신기했다.
“절 싫어하는 이들이 많나 보네요?”
“권력자는 통제할 수 없는 변수를 싫어하기 마련이죠.”
요하네스는 냉소적이지만 당연한 말을 남겼다.
경완은 자신의 배웅을 받고 떠나는 요하네스를 일별하고는 김준을 찾았다.
개고생한 자신도 이제 집에 돌아가서 쉬어야지 않겠는가? 하지만 번거롭게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긴 싫었고, 그 의견을 들은 김준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관련 수속은 이쪽에서 처리하죠.”
웜홀 타고 바로 돌아가겠다는 소리였다. 정상적인 입국 절차를 따르지 않으니 당연히 후속조치가 필요했지만 어차피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었다.
경완은 김준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미국에 올 때 함께 온 이들을 보며 물었다.
“같이 웜홀로 한국에 가실 분?”
미국대사관과 국정원에서 붙여준 직원들이 탐탁지 않은 얼굴로 나섰다.
경완은 김준을 보았다.
“표정들이 왜 저래요?”
“가면 할 일이 많아서요.”
비행기를 타고 가면 이동 시간을 핑계로 조금이나마 쉴 수 있겠지만, 웜홀로 바로 한국으로 간다면 그런 시간이 없다나?
경완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할 일인데 몸 편하게 가서 빨리하고 쉬는 편이 낫지 않아요?”
“경완 씨. 일이라는 건 말입니다. 하면 할수록 느는 겁니다.”
“그런 직장을 왜 다녀요?”
“…….”
김준은 경완의 대답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눈빛으로 심한 욕을 할 뿐.
경완은 어깨를 으쓱했다. 더 이상 나가면 쓸데없는 오지랖이었다.
* * *
경완은 한국에 돌아간 후 여러 곳의 방문을 받았다. 국정원부터 대기업에서 대관업무하는 이들은 물론 청와대에서 나왔다는 이까지.
청와대에서 부른다고 딱히 가고 싶지 않았던 경완은 고집을 부려서 청와대엔 가지 않고 대신 정청완 중장과 전화통화를 했다.
정청완 중장의 용건은 미국에서 있었던 사건의 교차검증이었다. 미국에서 발표한 대로의 내용이 맞는지 그곳에서 직접 겪었던 경완의 말을 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발푸기스 총수의 우려가 들어맞았군요.]
“미리 언질을 받으셨나 봐요?”
[네. 그래서 제약 벤처나 거대 제약 회사에 압박을 좀 줬죠.]
자본주의 민주국가에서 그게 가능한가 싶겠지만, 굳이 그런 일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독재자가 아니라도 가능한 일이었다. 세무조사 좀 때리거나 검찰을 동원해서 얼마든지 근거 없는 혐의를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물론 정청완 중장이 그런다는 건 아니었다. 그는 그저 관련 업체 기업인들을 모아서 경고 한마디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것으로 정신계 능력을 가진 그였으므로, 그의 ‘진심’은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불충분한 조치였다.
정청완 중장의 조치는 단지 권력을 이용해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가의 본성을 잠시 억누른 행위였고, 계속 그런 본성을 억누르면 반발과 부작용이 일어날 건 자명했다.
가정할 수 잇는 최악의 상황은 몰래 비밀 연구실 같은 걸 지어서 연구를 진행하는 경우였다.
비밀 연구실인 만큼 비밀을 유지하는 일에 역량을 쏟아서 안전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면 자연히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초능력 연구 윤리 감사실을 설치할 겁니다.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출 수 있는 조직으로 만들 예정이요. 김마리아 박사님도 흔쾌히 도와주시겠다더군요.]
“그분이야 말로 매드사이언티스트 아니신가요?”
[그분만큼 연구 윤리를 철저하게 지키는 분은 없습니다. 초능력 공학의 위험성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분이죠.]
경완은 잠시 인지부조화에 빠질 것 같았다. 정청완 중장이 말하는 마리아 여사와 자신이 알고 있는 마리아 여사가 동일인물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정청완 중장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감사실에 경완 씨를 넣을 생각입니다.]
그 말에 인지부조화에 빠져있던 경완의 정신이 번쩍 깨어났다.
“왜요?”
[음……. 발푸기스 총수의 권유였습니다. 만일 경완 씨가 싫다고 하면 이런 말을 해달라더군요.]
“뭐라고 했는데요?”
[세계 평화를 위한 거라더군요.]
그렇게 말하는 정청완 중장 본인도 그 말을 쉽게 믿지 못했다. 어떻게 한국의 초능력 연구 윤리 감사실에 경완을 집어넣는 것이 세계 평화랑 연결된단 말인가?
하지만 이해는 못할망정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는 아니었다. 무려 세계평화였으니까. 그보다 정청완 중장은 그 조언의 효용성과 이득을 생각했다.
[저야 나쁠 것 없는 조언이었죠. 경완 씨는 색적이나 탐색에도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경완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초감각 레이더는 중국에서의 전과(戰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군인인 정청완 중장은 정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경완의 전과가 단순히 무력에만 의존하지 않았다는 걸 꿰뚫어보았다.
그런 그의 능력이라면 기업들이 몰래 감춰둔 비밀 실험실 따위는 유리벽 꿰뚫어보듯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음, 거절하기 어렵네요.”
정청완 중장만의 제안이라면 슬쩍 말을 돌리며 거절했겠지만 요하네스의 조언이라지 않은가?
저 초능력 연구 윤리 감사실에 가는 것이 요하네스가 그리는 그림의 일부라면 함부로 거절하기 어려웠다. 나중에 사고가 나면 그걸 처리하는 데 필요할 수도 있잖은가?
경완은 감사실에 가야 하는 이유는 나중에 요하네스에게 물어보기로 하고 일단 수락했다.
그리고 김마리아 여사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연구소로 경완을 불러낸 그녀는 그에게 서류 한 뭉텅이를 내밀었다.
“뭐예요?”
“경완 씨가 공부해야 하는 거요.”
마리아 여사의 입가에는 누군가를 잡아먹은 듯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기어코 이경완을 지식인의 길로 인도하고 말리라는 버킷리스트를 완수할 순간이라 그런지 마리아 여사의 기분은 아주 흐뭇한 모양이었다.
“거부할 수는 없나요?”
“경완 씨. 경완 씨는 초능력 연구 윤리 감사실의 현장 단속반장으로 내정되어 있어요. 단속 대상의 연구가 위험한지 아닌지 판단하려면 그 머리에 관련 지식이 박혀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닐까요?”
“박혀 있을 정도까지야…….”
“그 정도로 관련 지식을 쌓아야 한다는 거죠.”
“족집게 과외는 안 되나요?”
“미안하지만 초능력 공학의 가능성은 정말 무궁무진해요. 내가 단속반에 직접 가더라도 실수할 가능성이 있을 정도죠.”
“그런 단속에 효용성이 있을까요?”
단속을 했는데도 사고가 나면 단속은 왜 했냐고 욕만 먹을 것 같은데…….
“하지만 여기에 경완 씨의 능력이 결합되면 달라지죠. 경완 씨는 S입자의 흐름과 구조를 직접 느끼고 제어할 수 있잖아요?”
경완의 초능력 카피 능력은 저 본질적인 능력의 파생일 뿐이었으며, 마리아 소장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S입자에 민감한 경완의 능력에 전문가의 지식을 더할 때의 시너지를 누구보다 기대하는 사람이 그녀였다.
경완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녀가 하는 말이 감사실 업무에 필요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아. 알겠어요.”
“좋아요. 그럼 공부를 시작하죠.”
경완은 그렇게 팔자에도 없는 공부를 시작했다.
미연은 매일 연구소에 출근하는 경완의 모습을 신기함과 대견함이 섞인 눈으로 보며 감탄했다.
“세상은 변하는 거구나.”
“당연한 말을 너무 거창하게 말하는 거 아니야?”
“난 오빠가 변하지 않을 줄 알았거든.”
“환경이 바뀌면 행동도 바뀌는 게 사람이야.”
그 말에 미연은 살짝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가 변했는데?”
“음……. 세계정세?”
솔직히 미연 입장에서 경완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가 그리 커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경완은 그녀에게 세계멸망급 사건 사고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부지런해졌다고 말할 순 없었다. 말해봤자 괜히 불안감만 느끼게 할 뿐인데 굳이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미연은 경완의 대답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세계정세라니? 언제부터 그렇게 스케일 큰 사람이 된 거야?”
“나도 몰라.”
어어 하다 보니 요하네스랑 얽혀서 세계평화를 추구하게 되어버렸다. 무한회귀자가 그러겠다는데 경완도 별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