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332화
31-빅브라더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김준이 불순한 생각을 했다는 것 정도는 읽어낸 경완이 응징을 시작했다.
“김준 씨는 여친 없어요? 여친이 있었으면 제 말이 이해가 될 텐데요?”
“…….”
김준은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어설프게 대꾸했다가는 경완의 뼈 때리는 팩트폭행이 시작되리라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너무 잘 알았다.
“왜 대답이 없어요? 제 말이 말 같지 않아요?”
“아니, 그건 아니고. 잠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모르길 뭘 몰라요? 연애해 본 사람이라면 딱 답이 나오는 문제잖아요? 혹시 모태솔로?”
“아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은 애인이 없지만, 그래도 학창 시절에는 연애도 해보고 인기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그때 연애할 때는 경완처럼 능수능란한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다.
“아. 연애해 보셨구나. 그런데 어떤 연애를 했기에 제 말에 바로 대답을 못 해요?”
왜 내 연애 사정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이거 사생활 침해야!
김준이 속으로만 소리칠 때 그를 구원한 건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미연이었다.
“오빠, 나왔어.”
“빨리 왔네? 작은 거? 악!”
“오빠는 그 입이 문제야.”
경완은 꼬집힌 허벅지를 문질렀고 김준은 피곤한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 사람이 방콕에 도착했을 때, 경완은 그의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들고 있는 이를 발견했다.
‘한국에서 오신 이경완 씨’라는 팻말을 들고 있는 이는 검은색 양복을 입은 백인이었다. 그는 경완의 얼굴을 알고 있는지 일행이 다가오자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리. 저는 발푸기스 총수님의 비서인 루자간이라고 합니다.]
[네, 반갑습니다.]
[그럼, 가시죠. 총수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총수님이요? 왜요?]
[경완 씨가 IAMSR에 몸담게 되는 기념비적인 날인데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게 총수님의 뜻입니다.]
경완은 부담스러워서 먹었던 기내식이 식도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너무 티 내면 부담스러운데요.]
[총수님께선 경완 씨가 받아 마땅한 대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너무 개의치 마시고 저를 따라오십시오.]
경완 일행이 루자간의 뒤를 따라가자 리무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완 일행이 타려고 하자, 루자간이 김준의 어깨를 붙잡았다.
[경완 씨와 그분의 소중한 사람을 위해 준비한 차량입니다. 불청객은 다른 차를 타고 오시죠.]
루자간이 가리킨 곳에는 택시가 있었다. 김준은 갑자기 서러워졌다.
그때 미연이 한마디 했다.
[그냥 같이 타면 안 될까요?]
그녀의 말에 루자간은 경완을 보았고,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준 씨는 참 운이 좋군요. 전생에 좋은 카르마를 많이 쌓았나 봅니다.]
길을 비켜주며 하는 루자간의 말에 김준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생에 좋은 카르마를 많이 쌓았으면 재벌 2세로 태어나 떵떵거리며 살지 FBI 소속의 공무원이 되어서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
김준이 어이없어하든 말든 루자간은 그를 리무진에 밀어 넣고 자신도 리무진에 탔다.
리무진이 도착한 곳은 방콕의 어느 5성급 호텔. 요하네스는 그곳의 스위트룸에서 경완을 기다리고 있었다.
“왔군요.”
“아니, 총수님께서 왜 이런 누추한 곳에?”
“5성급 호텔이 누추하면 안 누추한 곳이 어딨나요?”
두 사람은 농담과 함께 악수를 나누었다.
이어서 요하네스는 미연과도 악수를 나누었는데 그때 보인 태도가 그녀를 당황하게 했다.
“언제나 항상 고맙습니다.”
“네? 네에.”
“미연 씨는 모르겠지만 본인은 존재만으로 세계평화에 공헌하고 계십니다.”
미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표정을 보니 ‘이게 뭔 개소리지?’라는 소리를 차마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경완이 끼어들어서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말라는 말로 핀잔을 주고 나서야 요하네스는 세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는 우선 김준에게 말했다.
“김준 씨는 경완 씨와 미국의 연락책이죠. 맞죠?”
“네.”
“제게 미국은 참 여러모로 고마운 곳입니다. 저는 미국의 패권이 계속되길 바랍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김준은 요하네스가 왜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요하네스가 말을 이었다.
“김준 씨. 혹시 권력에는 관심 없습니까?”
“네?”
생뚱맞은 소리를 들은 김준은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경완 씨와 오랜 신뢰를 쌓은 연락책이라는 위치는 김준 씨의 생각보다 더 영향력 있는 자리거든요. 생각이 있으시면 제가 워싱턴 정가에 아는 친구들을 소개…….”
“아, 아니요! 전 그런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김준은 급히 손사래를 치며 요하네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요하네스의 얼굴엔 만족감 어린 표정이 지어졌고, 그런 표정에 김준은 안절부절못했다.
자신이 위버멘쉬 총수라는 거물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 그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 저 미소의 이유가 아닐까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는 경완은 요하네스의 성질머리에 쓴웃음을 지었다. 요하네스는 방금 김준을 시험한 것이다. 야망 때문에 경완을 이용할 가능성이 있는지 말이다.
김준이 그런 인간이었다면 진즉 경완이 미리 인연을 끊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요하네스는 다시 한 번 검증 절차를 거쳤다. 김준은 영특하고 눈치가 좋기는 하지만 자기 본분에 충실한 소시민적인 인간이었다.
“하하. 그렇군요. 아쉽네요. 경완 씨와 말이 통하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 오해도 잘 안 생기고 참 좋을 텐데 말이죠.”
그렇게 말한 요하네스는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연락하라고 자신의 명함을 건네주었고, 김준은 이게 뭐지?라는 멍한 태도로 명함을 챙겼다.
방금 일어난 일이 현실인지 실감이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위버멘쉬 총수 같은 거물이 자신 같은 FBI 말단에게 명함을?
“일단 이 호텔에 김준 씨 이름으로 방을 예약해 뒀으니 나중에 프런트에서 키를 받아가세요. 물론 비용은 제가 지불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요하네스의 말이 김준의 현실감이 바로 돌아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돈이 최고였다.
요하네스는 경완과 미연 두 사람을 보며 말을 이었다.
“두 분은 태국에서 지내시는 동안 여기서 지내세요.”
“이 방에서요?”
미연이 놀란 듯 물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공짜나 사치를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선물을 받았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리고 선물을 받을 때는 선물의 내용만큼이나 선물에 담긴 의미와 선물을 준 사람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미연에겐 그녀와 경완 두 사람에게 스위트룸을 내줬다는 걸 항간에 명성이 드높은 위버멘쉬 총수라는 사람이 두 사람 사이를 인정하고 밀어준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요하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물론이죠. 물론 비용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그리고 경완 씨.”
요하네스는 경완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번에 IAMSR 아시아 지부의 현장감찰팀장이 된 걸 축하합니다.”
“벌써 직위까지 정해졌어요?”
“제가 힘 좀 썼죠.”
요하네스가 자랑하면서 김준에게 슬쩍 시선을 던졌다.
그는 요하네스의 눈치를 보면서 슬쩍 엉덩이를 뗐다.
“전 좀 호텔 좀 구경하고 있겠습니다.”
어느새 경완의 보신주의에 물들어버린 김준은 모르는 게 약이라는 걸 몸소 실천하기 위해 자리를 떠버렸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더 듣겠다고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정도로 김준은 눈치가 없진 않았다. 설사 뻔뻔한 얼굴로 앉아 있는다고 해도 발푸기스 총수가 가만히 있겠는가?
게다가 이미 경완을 현장감찰팀장에 앉히기 위해 요하네스가 힘을 썼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 정도면 충분히 김준에게 호의를 보인 것이니 자리를 비켜주는 게 양심상 도리에 맞다. 기왕 방을 나온 김에 프런트에 들러 방 키도 찾고 말이다.
김준이 아예 자기 짐가방까지 챙겨서 자리를 뜨자 요하네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 표정에 미연도 긴장했다.
하지만 요하네스는 그녀가 들으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당분간은 경완 씨는 바쁠 겁니다. 아시아 지부 전체를 장악하진 못하더라고 적어도 본인이 지휘하는 팀은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귀찮은데.”
“IAMSR이 발족하면서 유엔이 허락하지 않은 방식의 연구가 몇 가지 있습니다. 위험한 사고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방식의 연구지만 이미 그걸 진행하고 있다는 정황이 확인되고 있어요.”
그런 그들에게 IAMSR의 활동내용은 그들의 연구 성과를 보호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경완이 대꾸했다.
“첩자가 들어올 수도 있겠군요.”
“아니면 기존 인원에 대한 회유가 있을 수도 있죠.”
“그런데 애당초 정보가 안 새어나갈 수 있나요?”
경완은 회의적이었다. 유엔의 영향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상대국의 국력에 따라 상대적이었다.
그렇다면 어지간한 소국보다 강한 영향력을 가진 기업에 대한 영향력 역시 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기업이 유엔이 압박한다고 가만히 있을 리가 있겠는가? 그들만의 인맥이나 자본, 조직력이 스스로를 보호할 것은 물론이고, 일단 국가 자체가 일차적인 방벽이었다. 이 개새끼가 아무리 개새끼라도 일단 우리 개새끼라는 논리부터 넘어가려면 할 일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유엔은 태생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유엔이 나라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따라서 유엔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각국에서 차출되거나 지원한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과연 그의 조국에 충성할까, 아니면 유엔에 충성할까? 각자의 이유나 대의가 있겠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정계에 돈을 뿌리는 이들이 파고들 여지는 너무나 많았다.
유엔은 국가 같은 강제력을 보유하지 않았기에 구성원들에게 확실한 목줄을 채울 수 없었다.
요하네스가 대답했다.
“하지만 현장감찰팀장에겐 인지수사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죠. 비단 유엔 사무국이나 IAMSR로부터 정보를 얻지 않아도 불법적인 연구 활동을 인지한다면 수사하고 증거를 수집할 권한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 부분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한다?”
“네. 그 부분이 중요합니다. 위버멘쉬가 정보를 넘겨드려도 그것이 세어나가면 헛고생만 하게 되니까요.”
경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제가 그 부분은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유, 감사하긴요. 제가 더 감사하죠. 아, 그런데 관할권이 부딪히면 어쩌죠?”
민감한 문제였다. 아무리 IAMSR이 초능력 연구의 위험성 방지라는 대의로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한 나라의 주권과 밥그릇을 함부로 건들 순 없었다.
나라가 없는 상태인 중국이야 그렇다고 쳐도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까지 경완이 가서 깽판을 치며 억지로 수사할 순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런 경완의 말에 요하네스는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슬쩍 피했다.
경완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제게 짬처리하려는 거죠?”
“미안하지만 저도 신은 아니라서요. 현장의 부패한 공권력이 협조하지 않는 것까지 어떻게 할 순 없습니다. 위버멘쉬의 조직 중 일부를 IAMSR로 돌리느라 휴민트를 많이 소모했거든요.”
“그럼 정보망에도 타격이 있겠군요?”
경완의 말에 요하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때를 놓쳐서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면 IAMSR이 필요없는 거 아닌가요?”
“몇 번 사고가 더 나줘야 IAMSR의 필요성을 느끼겠죠. 그때가 되어야 제대로 된 지원도 올 테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