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338화
31-빅브라더
[그러니까 아이샤의 말은 저들이 협조를 안 하면 조사할 수 없다는 소리죠?]
[네.]
일본인이 일본인 특유의 완곡어법 진의를 정확히 확인해 줬으니 오해의 여지는 있을 수 없었다.
경완이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풀었다.
[일단 상황부터 정리해야겠네요.]
[저, 저기 이 상!]
아이샤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경완을 불렀지만 그는 그녀의 부름을 무시하고 연구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
경완의 앞을 막았던 사내가 무슨 야로, 야메로, 같은 어딘지 익숙해서 귀에 들리는 단어를 섞어 말하며 경완의 앞을 막았지만 경완은 대꾸할 생각도 없이 초능력을 전개했다.
중력 제어 능력이 사내의 몸을 지면에서 띄우자 사내는 허우적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타스껫떼구래~
그러자 저 연구소에 있던 인원들이 서둘러 달려왔다.
그중에는 초능력자도 있는지 누구보다 빠르게 일이 벌어진(?) 곳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사람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광경에 범인(?)이 초능력자임을 파악하고 침착하게 상황을 살폈다.
경완은 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자기소개를 했다.
[유엔 IAMSR의 현장감찰팀 이경완입니다.]
영어로 말해서 알아들을지 우려스러웠지만 일본어를 할 줄 모르므로 계속 말했다.
설마 이 많은 이들 중에서 영어 한 마디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겠는가? 뭐, 설사 못 알아듣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유엔 협정에 의거해서 지금부터 이 현장은 저희 IAMSR가 통제하겠습니다.]
경완이 선언하듯 말하자, 그의 앞에 대치하듯 선 일본 내각부 조사팀 중 한 명이 영어를 잘하는지 알아듣고는 언성을 높였다.
[누구 마음대로?!]
[막을 수 있으면 막아보든가.]
경완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졌다.
그 뒤로 난리가 났다. 조사팀에 소속된 초능력자들은 전투의 전문가가 아니었기에 중력과 염동력의 콜라보를 이겨낼 수 없었다. 이에 경찰이 출동해서 권총까지 꺼내들었지만 소용없었다.
하지만 염동력으로 순식간에 권총까지 압수한 경완은 아랑곳하지 않고 현장으로 들어갔다. 일본 정부 기관에서 대응을 시작하기 전에 현장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의 초감각 스캔이 연구소를 훑었다. 전체적으로 호스피스 병원처럼 생긴 연구소는 지하 1층에 전기설비나 창고 따위 등이 있었지만, 지하2층에는 마치 정신병원 독방을 연상시키는 방이 여럿 있었다.
그는 이누스케를 불러서 그 사실을 말해주고는 지하로 향하는 길도 알려주었다. 일단 현장 사진부터 찍으라고 말이다.
그리고는 아이샤를 불렀다. 그녀는 경완에 의해 제압된 경찰과 내각부 조사팀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경완의 부름에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경완이 그녀에게 물었다.
[여기 연구소 책임자 누군지 알죠?]
[네.]
[어디있어요?]
[어…….]
어렵게 이야기를 꺼낸 그녀가 말하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실종되었단다.
[증인이 될 만한 사람은요?]
[인근 정신병원에 있습니다.]
경완은 나중에 만나러 갈 생각을 하고는 다시 연구소를 스캔했다.
아날로그의 일본이니 뭔가 중요한 기밀자료를 전산화하지 않고 종이 문서화해 놨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과연 그 기대대로 한 위치 좋고 창문 밖 경치도 좋아 아무래도 소장실이 아닐까 의심되는 방에서 두툼한 서류뭉치가 보관된 금고를 발견했다.
경완은 연구소에 들어가지도 않고 염동력으로 그 금고를 꺼내왔다. 비밀번호를 알아낼 필요는 없었다. 절단능력으로 금고문을 따버리면 끝.
열린 금고문 안으로 서류가 잔뜩 보이자 아이샤는 경완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그녀에게 서류를 보여줄 생각이 없었다. 대신 잠시 후 사진을 다 찍고 올라온 이누스케에게 보여주었다.
서류를 확인하는 이누스케는 혀를 차기도 하며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리기도 했다. 대충이나마 서류의 정체를 확인한 그가 경완을 보았다.
[이거 대박인데요?]
[인체실험인가요?]
이누스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다이이찌샨쿄 오키나와 연구소에서 벌어진 인체실험의 목적은 초능력 강화, 혹은 다중 각성이고, 방법은 주로 S입자 주입이었다.
물론 타인의 S입자를 주입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론을 연구개발할 필요가 있었고 그 방법까지 연구소의 업무에 포함되었다.
또한 생각과 다르게 인체실험의 피험자들은 강제로 모집된 건 아니었다.
초능력을 각성했지만, 출력 자체가 너무 낮아서 초능력 시장에서 외면받은 이들. 그렇다고 초능력을 강화하는 훈련을 받기엔 재능도, 돈도 없는 이들이 다이이찌산쿄의 제안을 받아 이 오키나와까지 왔다.
강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더 나은 대우를 받을 기회라는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좋지 않은가? 오키나와는 휴양지로서도 유명하니까 초능력도 강화하고 휴양지에서 쉬기도 하고.
그래서 처음엔 지하 감금실은 잘 쓰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실험이 진행될수록 피험자들의 상태가 조금 수상해져서 지하 감금실이 사용되었고, 끝내 사고가 일어났다.
이누스케의 설명을 듣는 동안 경찰차들이 줄지어 왔다. 자가용인지 관용인지 중형세단을 타고 양복을 입은 이들도 서둘러 다가왔다.
경완은 그들이 오는 걸 보고 사로잡고 있던 이들을 놓아주었다. 잡혀있던 이들은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감히 경완에게 항의하지 못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머리에 떠오른 것이다.
[이 상이십니까? 반갑습니다. 내각부의 오야모토라고 합니다.]
경완이 그가 내민 명함을 받아들자 이누스케가 옆에서 속삭였다.
[내각부 오키나와 진흥국 소속이군요.]
오키나와 진흥국? 사건이 일어난 이곳이 오키나와였고, 또 이렇게 등장했으니 관련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반갑습니다. 이경완입니다. 하지만 딱히 드릴 명함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괜찮으시면 잠시 자리를 이동해서 말씀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중요한 자료를 손에 넣었으니 현장에서 더 조사할 필요는 없었다.
정신병원에 있다는 목격자를 찾아갈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건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충분할 것이다.
경완은 오야모토의 뒤를 따라 어느 관공서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차도 나오고 다과도 놓였다. 상대방이 충분히 예의를 차리고 있다는 인상을 경완이 받았을 때 오야모토가 입을 열었다.
[이 상.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규정대로요.]
[규정이라 하심은…….]
경완은 솔직하게 말했다. 일단 자료를 IAMSR로 보내 검토하고 위험성을 평가한 뒤에 전 세계 정부와 연구기관 등에 전파한다. 이런 실험이 벌어져 사고가 났으므로 이런 실험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본디 초능력 인체실험의 위험성에 대해 주의를 주기는 했지만 이번 일로 확실히 규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
그 말에 오야모토의 표정은 잔뜩 굳어졌다. 경완의 말대로 되면 일본의 체면은 땅에 떨어지게 된다.
오야모토는 어떻게든 경완을 설득해 조용히 묻고 넘어가자고 했지만 경완이 해줄 수 있는 말은 IAMSR 본부와 이야기해 보라는 말뿐이었다.
오야모토가 소득 없이 잔뜩 굳은 얼굴로 돌아가자 경완이 이누스케에게 말했다.
[잠시 한국에 피해 있는 게 어때요?]
[네?]
[쟤들 실력 행사 할 것 같아서요.]
[설마요.]
이누스케는 그렇게까지 할까 싶었지만, 경완은 피식 웃었다.
[이누스케 씨는 아직 순진하시네요.]
그 말에 이누스케는 굳은 얼굴로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경완은 웜홀을 열었다.
[자, 잠시만요!]
그 장면을 본 아이샤가 손을 뻗으며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이누스케와 경완은 웜홀로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증거가 될 중요한 자료들을 손에 쥔 채 말이다.
그 뒤의 일은 소란스러웠지만 경완과는 큰 관련이 없었다. IAMSR은 일본 정부의 항의에 언론에 공개하지 않는 조건을 내걸었고, 일본 정부는 그것이 IAMSR이 내건 최대한의 양보라는 것을 깨닫고 어떻게든 언론이 오키나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분주히 움직였다.
그래서 일단 오카나와의 다이이찌샨코의 연구소의 사고는 테러, 그 주위에 일어났던 살인이나 실종은 알 수 없는 빌런의 범죄로 알려지게 되었다.
언론에서 이 두 사건의 연관성을 파헤치려면 적잖은 노력과 시간이 들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 정부의 조치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일본 정부의 음습함과 치졸함은 한국에선 유명하지 않던가?
경완은 IAMSR 아시아 지부장 자호멧과 재만남을 가졌다.
[이런 일로 부르게 되어서 미안하게 됐어요.]
[일본의 항의가 강렬한 모양이죠?]
[그렇죠. 당장 분담금을 가지고 협박하는 상황이니까.]
IAMSR 같은 조직을 운영하는 건 각국의 협조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IAMSR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무료 봉사하러 온 것도 아니고, 그들이 활동하는 데 필요한 교통비, 식비, 하다못해 본부와 지부 사무실도 월세가 나갔다.
위버멘쉬의 인적 자원과 시스템을 분할해서 초기 설립 비용과 시간은 많이 줄일 수 있었지만 그만큼 덩치가 커져서 고정비도 많은 상황이었다.
아예 처음부터 차근차근 규모를 키웠다면 분담금을 내는 국가가 적응해서 이해하는 시늉이라도 했겠지만, 당장은 분담금 많이 낸다고 생색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튼, 경완 씨에게 징계를 주라고 하더군요.]
[징계요?]
[일단 실력행사를 한 건 사실이니까요.]
[실력행사 안 했으면 증거 다 뺏겼을걸요?]
[그러니까 이렇게 시시콜콜한 사정까지 다 설명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발 좀 이해해 달라고 말이다.
[그래서 징계 수준은요?]
[음……. 일정 기간 직무 정지요.]
[이야. 강하게 나오는군요.]
[그 정도는 되어야 일본 정부에 면피할 수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체면이 중요하잖아요.]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기분이 좀 복잡했다. 직무 정지는 집에서 편하게 쉴 수 있다는 소리기는 하지만 그가 손 놓고 있는 동안 어디서 어떤 똥덩어리가 눈뭉치처럼 구르면서 커지고 있자 않을까라는 불안도 있었다.
그런 양가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 자호멧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우회 방법은 얼마든지 있죠. 직무 정지는 결국 IAMSR 아시아 지부에서 내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 말은…….]
[직무 정지 기간 동안 다른 지부로 가서 활동할 수도 있다는 말이죠. 외부적으로는 징계지만 내부적으로 근무지 일시 조정 정도랄까?]
[누군가 저를 필요로 하는 모양이죠?]
[경완 씨 능력을 필요로 하는 곳은 많습니다. 모든 지역이 치안이 좋거나 정부의 장악력이 확실하지는 않거든요.]
경완은 왠지 장기 출장의 냄새가 나는 말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절 어디로 보내실 거죠?]
[보낸다는 말은 틀렸습니다. 경완 씨가 원하지 않으면 집에서 쉬셔도 됩니다. 그저 경완 씨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을 뿐이죠.]
[어딘가요?]
[중동입니다. 정확히는 IAMSR 아프리카 지부죠.]
거창하게 출범한 IAMSR 지부지만 사실 유엔 사무국에 빌붙어 있는 신세기 때문에 전 세계를 골고루 감찰할 정도로 지부나 사무실이 치밀하게 있진 않았다.
특히 중동 같은 곳은 문제가 많은 곳이라 변변한 사무실이나 거점을 마련하지 못해서 아프리카 지부에서 담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골치 아플 것 같은데요.]
[그렇긴 합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경완 씨의 능력이 더욱 빛을 발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절 아프리카 지부에 배치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음……. 경완 씨를 아시아 지부에 배치한 건 발푸기스 총수님의 의견이었습니다.]
[그랬어요?]
자신이 아시아 지부에 배치된다는 소리를 듣긴 했는데 그것이 요하네스 총수의 의견이었다는 건 몰랐다. 혹시 그것도 총수의 포석이었을가?
자호멧이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보죠.]
경완은 거절하지 않았다. 이것 역시 요하네스 총수의 포석이라면 아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호멧과의 면담이 끝난 경완은 이누스케를 비롯한 팀원들에게 연락해 사정을 설명했다.
일단은 일본 정부의 삐짐(?)이 풀릴 때까지 아시아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는 엄살에 다들 피식 웃으며 경완이 직무 정지 기간 동안 푹 쉬길 바란다고 농담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