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348화
32-레지스탕스
그는 한국의 기울어진 형평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믿고 위험한 일을 감수한 부하들과 도움을 준 이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독이 든 성배를 마셨다. 그들의 계획을 막으려면 현 법치체계를 벗어난 초법적 수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을 빌런의 짓으로 위장해 모조리 죽였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길 문제들을 자신의 죽음으로 봉합하기로 했다.
여기까지가 초능 특수전 부대 빌런 습격 사건, 일명 적폐 학살 사건의 배경이었다.
문제는 정청완 중장이 죽기로 한 것이 문제의 해결책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초법적인 방법으로 큰 타격을 준 것은 분명했지만 적폐의 뿌리를 뽑지는 못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복수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반격의 날을 세웠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험난할 것은 분명하다고 정청완 중장은 예견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최후의 보루로 경완을 떠올렸다. 충분히 강한 힘은 때론 모든 문제의 해결책일 수 있었으니, 중국 공산당을 무너뜨린 그의 무력이라면 대한민국이 최악의 상황에 처하진 않을 거라고 본 것이다.
“마냥 바보는 아니었네?”
내용을 같이 본 미연이 혀를 찼다. 바보 같다는 건 자살을 선택한 것에 관한 평이고, 바보가 아니라는 건 경완에게 만일의 상황을 부탁한 것을 평한 것이다.
그녀의 눈에도 경완이 나서면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해?”
“오빠 외에 대안이 없다면 그래야 하지 않을까?”
그녀의 말에 경완은 나이로비 테러에서 받았던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미연은 그의 분위기가 변한 것을 느끼고 물었다.
“왜? 무슨 고민 있어?”
“새삼 귀찮다 싶어서.”
미연은 편지를 보면서 수긍했다. 확실히 경완의 성정을 생각하면 귀찮겠다 싶었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래도 돼?”
미연의 기반은 한국에 있었다. 따라서 한국이 망가지면 그녀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었다.
특히 문화 사업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해도 먹고 살기 팍팍해지면 문화 소비부터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이 나라가 오빠한테 뭘 해줬다고 책임을 지려고 해? 정청완 중장 이 사람 똑똑하기는 하지만 염치는 없네.”
그 말에 경완은 피식 웃고 말았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엔 어떤 다짐이 새겨졌다.
그는 염동력으로 편지를 가루로 만들어 없애 버렸지만 그 내용은 머릿속에 집어넣어 두었다.
* * *
요하네스가 연락해 왔다. 그간 조사 내용을 공유하기 위해서였다.
[세상이 저를 억까하는 것 같습니다.]
“왜요?”
[그렇게 업보를 안 만들려고 노력을 해왔는데 그걸 사람들이 몰라주는군요.]
요하네스가 조사한 결과, 예언가를 돕는 이들이 많았다. 반(反) 위버멘쉬 세력도 있었고, 반(反) IAMSR, 반(反) 세계정부, 반(反) 기독교, 반(反) 서양 세력도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세력이라기보다는 저러한 생각을 가진 어떤 소수여론, 파편화된 개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었는데, 당연하게도 이런 이들이 생겨난 건 그간 위버멘쉬나 IAMSR이 보여온 행보 때문이었다. 모두가 요하네스의 구상과 생각에 찬성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예언가는 이런 자들과 접촉해 점조직 형태로 조직을 구성했다. 조직의 이름은 프리덤 얼라이언스.
“거참 개성 없는 이름이네요.”
‘자유’와 ‘연대’는 시민단체의 국밥 메뉴이기도 했다. 하지만 경완은 한국에서 살면서 자유 외치는 인간들 중에 남의 자유 지켜주는 인간 못 봤고, 연대 외치는 인간들이 남과 연대하는 걸 보지 못했다.
오직 나의 자유만이 중요하고, 우리끼리가 아니면 연대하지 않겠다는 이들만이 ‘자유’와 ‘연대’를 외쳤다.
경완은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솔직히 다 예상한 거 아닌가요?”
[그래도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생각보다 더 시궁창이네요.]
요하네스는 경완의 말을 완전히 부정하진 않았다. 반발할 사람이 있다는 건 충분히 예상했다.
그래서 최대한 적을 만들지 않고 아군을 만들려고 했지만, 이렇게나 사람들은 세계평화에 대한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었다.
물론 인간이란 이기적 존재이니 당장 자기에게 손해가 된다면 경제가 망하든, 세상이 망하든 일단 외면하는 존재라는 걸 요하네스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기는 했다. 그래도 이해는 하지만 용납할 순 없었다.
[일단 대충 용의자는 추렸습니다만…….]
“제가 확인하러 갈까요?”
진실의 스무고개라면 정보를 캐내기에 수월할 터였다. 하지만 요하네스는 거절했다.
[점조직 형태입니다. 함부로 정보를 캐내려고 하면 더욱 깊숙이 숨어들겠죠. 예언가. 그놈을 잡아야 합니다.]
“어떻게요?”
[똥볼을 좀 차야 할 것 같습니다.]
“예언가잖아요? 일부러 허점을 드러내는 식의 함정엔 안 걸릴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실제로 타격을 좀 입어야죠.]
“괜찮겠어요?”
[제겐 비장의 카드가 있으니까요.]
경완을 뜻하는 말이었지만, 그 당사자는 여전히 노파심이 좀 있었다.
“그것도 예지하면요?”
[예언가는 분명 많은 부분에서 유리하지만 전지(全知)하지는 않아요. 초능력을 쓰는 것도 결국 능력을 소모하죠. 그리고 놈의 가장 큰 약점은 경완 씨를 상대할 만한 카드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놈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뻔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경완을 제거하든가, 아니면 테러나 여론전 따위를 펼쳐 저항의 미약한 불씨를 살려나가며 기회를 엿보던가.
하지만 전자는 불가능했다.
이경완을 죽일 수 있는 초능력자라면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는데 과연 세상을 멸망하게 두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미치광이와 손을 잡을까?
아니면 핵 같은 무기를 기습적으로 사용해야 하는데 과연 그런 물건을 입수하고 설치하고 사용하는 그 모든 과정에서 요하네스와 IAMSR 테러 사건 때문에 눈이 벌게진 강대국들의 첩보망을 피할 수 있을까?
[비유하자면 예언가는 감이 좋은 쥐새끼와 같은 놈이죠. 차근차근 구석에 몰아넣을 수 있도록 포석을 놔야 합니다.]
“그럼 언제 놈을 잡을 수 있을까요?”
[글쎄요. 아직 각이 안 보이네요.]
경완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역시 요라에몽이라고 만능은 아닌 모양이었다.
“자살 특공을 한 놈들에 대해선 좀 나온 게 있어요?”
[CCTV와 목격자 증언을 통해서 놈들이 묵었던 호텔 등을 확인해서 몇 명의 신원을 파악하기는 했는데…… 외톨이 늑대였어요.]
A lone wolf attack. 기존의 테러리즘과 달리 조직적이지 않은 테러를 일컫는다. 미국의 학교 등에서 벌어지는 총기 난사 테러 등이 대부분 이런 외로운 늑대형의 테러라고 할 수 있었다.
예언가가 그런 외로운 늑대들을 끌어들여 나이로비 IAMSR 총회합 테러에 이용했다는 것이 각국 조사단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정신계 초능력자가 협조한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설득만으로 과연 자기 생명까지 버릴 수 있는 광신도로 만들 수 있을까?
한두 명이라면 몰라도 습격자들은 죄다 초능력자들이었지 않은가? 필시 강력한 정신계 능력자가 개입한 정황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 능력자가 왜 그랬을까요?”
[사실 지금 세태에 불만을 가진 정신계 능력자들은 많습니다.]
정신계 능력자는 그 능력의 특수성과 영향력 때문에 그 어떤 초능력자들보다 빡빡한 제약을 받고 있었다.
이는 정신계 능력에 대한 상류층과 권력자들의 공포심 때문이기도 한데, 정신계 초능력은 그들의 정신에 간섭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한순간에 빼앗아 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신계 능력자는 다른 초능력자보다 강력한 규제를 받는다. 일단 능력 발현 시 S입자의 요동을 감지해 다양한 방식으로 신호를 발신하는 감지기의 부착 의무가 있었다.
물론 서양에선 인권 침해라고 말이 많았지만, 정신계 능력자는 소수였고, 정신계 초능력을 꺼리는 이들이 그 사회의 룰을 정하는 이들이었다.
취지는 나쁘지 않았다. 정신계 능력이 눈에 띄는 효과가 없기 때문에 정신계 초능력자에게 감지기를 착용하게 함으로써 사회로부터 경원시 당하지 않도록 하자는 거니까.
이를 위해서 감지장치를 다양한 액세서리 형태로 만들기도 해서 각자 목걸이, 팔찌, 시계 등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와 저항의 목소리가 없을 순 없었다. 그런 안전장치를 의무적으로 착용하는 게 대형견 입마개 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는 주장도 있었다.
정신계 초능력자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한다는 말도 있었고.
당연히 이런 의견은 극소수였고, 그런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힘이 없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외면당했다.
게다가 초능력 감지 기술과 정신계 저항 장비가 개발된 이후 그나마 정신계 능력에 대한 경계 수단으로써의 수요도 사라졌다. 이래저래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다.
“확실히 꼴받은 인간들이 있겠네요.”
[관리 밖에 있는 초능력자일 가능성도 외면해선 안 되니까.
요하네스가 첨언했다. 정신계 초능력자 관리가 안 되어 있는 나라는 많았고 그중에 예언가에게 협조할 이도 있을 수 있었다.
[아무튼 종종 연락해 진행 상황을 알려드리죠.]
요하네스의 수완도 보통이 아닌데 아직도 잡히지 않는 걸 보니 그 예언자라는 놈도 대단한 놈이기는 했다.
하지만 경완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대단한 놈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삐리리리 삐리리리.
발신번호 제한 표시에 경완은 전화를 받지도 않고 끊었다. 하지만 상대가 제정신이 아닌지 지겹도록 전화를 해대길래 경완도 오기가 생겨서 계속 끊다 못해 설정을 조작해서 발신번호 제한을 차단해 버렸다.
그러고 나서야 낯선 번호를 통해 전화가 왔다. 그제야 경완은 전화를 받아주었다.
[경완 리?]
낯선 음성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기계로 변조한 목소리였으니까.
경완은 ㅈ같은 기분에 바로 전화를 끊고 걸려온 번호를 차단했다. 그러자 잠시 후 다른 번호로 전화가 왔다.
경완은 혹시나 다른 사람 전화일 수도 받았지만, 아까 그놈이었다.
[이번에도 전화를 끊으면 후회하게 될 것이다.]
기계음이 영어로 경고하자 경완은 피곤해졌다. 세상은 넓고 겁 없는 놈은 반드시 있달까?
“누구시죠?”
[당신의 소중한 사람을 납치한 사람이다.]
“…….”
경완의 머리에 웃고 있는 미연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그는 일단 현실을 부정해보았다.
“진짜?”
[목소리 들려줄까?]
“그래.”
[미스 리. 당신 애인이 목소리를 들려달라는군.]
…….
하지만 전화기 너머로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짜악 하고 누군가의 뺨을 때리는 소리가 잡음처럼 들려왔다.
[독한 년. 입을 열지 않는군.]
사실일까? 정말 미연이 납치당했다는 게?
경완은 급하게 뉴스채널을 틀어 미연이 납치당했다는 속보라도 있는지 확인해 보았지만, 그런 내용은 없었다.
하지만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어느 미친놈이 감히 이경완에게 장난 전화를 친단 말인가? 경완은 서둘러 전화를 끄고 미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녀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자칭 납치범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쉽게 믿지 않는군.]
“아직 그녀의 목소리를 못 들었는데?”
[그녀는 당신에게 폐를 끼치기 싫은 모양인지 뺨을 때려도 비명 한 번 안 지르더군. 굳이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더 강한 수단을 써야 할 것 같은데 괜찮은가?]
“안 괜찮지.”
이 씨발새끼야.
경완은 뒤에 튀어나올 말을 간신히 삼켰다. 혹시 모르니까.
도대체 CIA나 국정원은 뭐 하는 걸까? 도감청을 하고 있다면 당장 이 건방진 똥덩어리의 위치를 추적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김준이었다.
경완은 불안감을 느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서 미안합니다.]
“혹시 미연이 납치당했어요?”
[……어떻게 알았습니까?]
“지금 납치범 새끼랑 통화 중이거든요.”
[……바로 가겠습니다.]
경완은 김준과의 통화를 끝내고 리얼 납치범과 통화를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