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355화
33-업보
[지금 당장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소리군.]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제가 그동안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으면 단서가 나올지.]
또 단서일 뿐인가?
경완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숨바꼭질이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단서라도 얻기 위해 입을 다물고 나바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말하길 제가 이란 정부에 의탁한 대로 있다가는 발푸기스의 손에 잡혀서 비참한 꼴이 될 거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란이 저의 단물을 다 빨고 나면 충분히 거래감이 될 수 있었죠. 그런데 그가 말한 내용은 제 생각과 조금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란에 오버마인드 사건이 일어나고, 이로써 이란은 IAMSR의 필요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IAMSR의 문제 해결 능력과 예방책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신 IAMSR의 영향력을 받는 걸 감수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이란 당국에 요하네스의 입김이 들어갈 창구가 만들어진다는 이야기였다.
[전 총수의 방식을 잘 압니다. 한 번 틈을 만들면 기어코 비집고 들어와 균열을 만들죠. 전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오버마인트 사태가 종료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이란을 탈출했다. 이란 당국의 억류 시도가 있었지만 그를 돕는 이가 있었다. 바로 '순응하는 자'가 보낸 초능력자였다.
[그가 아마 당신이 찾던 초능력자일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알지?]
[제가 빠져나갈 때 그 어떤 교전도 없었거든요. 마치 뇌물이라도 먹인 것마냥, 아니 처음부터 잘 알고 친했던 관계인 마냥 아무런 잡음 없이 검문을 통과했습니다.]
심지어 같은 인종도 아니었다. 혼혈도 아닌 순수 동양인을 마치 동향 사람처럼 반기고 호의를 베푼다는 것이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본인 말로는 가치 조정 능력이라더군요. 인간의 가치 우선순위를 조절하는 능력이라고요.]
가치 조정이라. 조금 미묘하지만 그놈이 미연에게 초능력을 사용한 놈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놈이 그녀에게 초능력을 걸었나?]
[네.]
[어디로 가면 놈을 만날 수 있지?]
[그가 이리로 올 겁니다.]
[뭐?]
경완의 반문에 나바하는 우묵한 눈으로 반문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가 왜 여기서 따로 홀로 지내고 있는지?]
수상한 낌새에 경완은 바로 초감각 레이더를 돌렸다. 그러자 이미 오두막이 수십 명에 의해 포위된 걸 알아차렸다. S입자의 농도를 보아 모두 초능력자였다.
나바하가 경완의 굳어진 표정을 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가장 강력한 능력은 S입자를 방사하고 그 상호작용을 읽어내는 색적 능력이죠. 하지만 그런 식의 활용은 당신 혼자만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벽을 넘은 고등급 에스퍼들은 다 할 수 있는 능력이죠. 그래서 강대국들은 생각했습니다. 이걸 어떻게 군사적으로 활용할 방법은 없을까. 그리고 군사적으로 활용될 이 초능력 색적 기술을 피하거나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또 없을까. 그리고 작은 성과를 냈죠.]
초능력 신소재 공학의 결과로 만들어진 인조가죽은 경완은 물론이고 S입자를 이용해 탐색하는 에스퍼들의 눈을 속일 수 있는 물건이었다.
마치 스텔스 도료가 반사되는 전자파를 없애듯이 이 스텔스 인조가죽은 S입자의 간섭을 상쇄해 시전자에게 돌아가는 신호를 없애거나 극히 줄인 것이다.
그래서 이 스텔스 인조가죽을 뒤집어쓴 인간은 경완의 초감각 레이더 속에서 마치 희뿌연 연기나 안개, 혹은 조금 수분 밀도가 높은 공기 같은 존재감만 가졌고, 이렇게 경완이 포위망 안쪽까지 오도록 함정을 파고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나바하는 음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세계에서 에스퍼의 초감각을 전술적으로 운용하는 유일한 초능력자가 바로 당신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이 소재 기술은 당신을 겨냥한 겁니다.]
[준비를 많이 했군.]
경완이 대답했다. 나바하가 여기에 있다는 정보 자체가 저들이 면밀하게 준비한 함정이었다. 저쪽에 예언가가 있었으니 어떻게 해야 이쪽을 속일 수 있는지 미리 내다본 것일 수도 있었다.
아마 승산을 계산해보고 이런 함정을 팠을 테니 경완을 상대할 수단도 비상할 것이 틀림없었다.
경완이 속으로 전의를 다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나바하는 말을 이었다.
[이 기술을 저희가 개발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이미 강대국들이 개발하고 있던 것 중에 하나를 우리가 얻어온 겁니다. 드러내진 않지만 당신은 전 세계 모든 국가가 두려워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나를 여기서 처리한다는 건가?]
[필요하다면요.]
[그게 가능할까?]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유일한 방법은 찾았습니다.]
경완을 상대로 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의 강점은 초감각 레이더란 우월한 색적 능력, 그리고 거의 모든 대치 상황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는 염동력과 중력 제어, 거기에 어떤 지연전도 일순간에 끊을 수 있는 절단 능력의 화력까지.
그뿐인가?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그 자리를 이탈할 수 있는 웜홀 능력까지 있으니 이경완을 잡는다는 건 정말 많은 노력과 준비, 거기에 운도 따라줘야 했다.
[당신이 지금 웜홀 능력을 사용해서 도망가는 것은 잡을 수 없습니다.]
[사실이군.]
경완의 초감각이 나바하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확인했다.
[다만 돌아가면 다시는 꼬리를 잡을 수 없을 겁니다. 제가 겪어봐서 알지만 이 사람들은 죽은 듯이 잠적하는 능력만큼은 위버멘쉬조차 어쩌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경완이 이 함정을 바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는 TSTG를 입고 오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이런 함정이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쥐새끼 같은 놈들이군.]
[맞습니다. 쥐새끼. 그리고 그런 쥐새끼를 잡는 건 고양이나 개죠. 하지만 위버멘쉬는 개나 고양이라고 하기엔 덩치가 너무 크죠.]
[그래서 내 여자에게 초능력 건 쥐새끼가 바로 저놈인가?]
경완은 소리 없이 열리는 문으로 들어온 젊은 남자를 보았다. 눈이 째지고 광대뼈가 돌출된 사내는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안으로 들어왔다. 밖에 있던 자들은 한층 더 포위망을 촘촘히 짜고 있었다.
[혹여 저 친구를 제압해서 도망가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에 대해서도 충분히 준비를 해뒀으니까요.]
경완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바하를 보았다. 나바하가 지금까지 길게 말한 건 결국 이 포위망을 구성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경완이 굳이 불리함을 감수하고서 포위망이 구성될 때까지 기다린 것은 미연에게 초능력을 건 저 남자에게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경완도, 나바하도 알고 있었다.
[저는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기엔 준비를 아주 잘한 것 같군.]
[당신도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있겠죠.]
당연하지. 하지만 경완은 대답하지 않고 나바하를 보았다. 사이 좋게 대화를 나누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경완은 나바하에게서 시선을 돌려 동양인 남자를 보았다.
[당신 이름은 뭐지?]
[르 샤우루.]
[어디 이름이지?]
[중국.]
짧은 단답에 경완의 동양계 남자의 시선이 교차되었다.
마치 눈싸움과 같은 시선의 충돌 와중에 먼저 입을 연 건 경완이었다.
[내 여자에게 능력을 건 이가 당신인가?]
[그렇다.]
[해제 방법은?]
그것만 알면 다 찢어 죽이겠다. 아니, 제발 죽여달라고 소리 지르게 만들어주겠다.
경완은 무표정한 얼굴 안으로 살의와 악의를 감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르 샤우루는 이렇게 대답했다.
[모른다.]
[…뭐라고?]
[난 능력을 쓸 줄만 알지, 거둘 줄은 모른다.]
경완이 주먹을 쥐었던 손을 풀었다. 폭발적으로 순발력을 내기 위해서 긴장을 풀고 근육을 부드럽게 준비하는 것이다.
그때 나바하가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그는 의사가 아니니까요. 그래도 이야기를 좀 더 나눠보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면 그녀를 원래대로 돌릴 수 있는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도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지? 나를 죽이고 싶다며?]
[다시 앞의 대화를 떠올려 봅시다. 필요하다면 죽인다고 했지, 죽이고 싶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이 함정도 사실상 대화를 나누기 위해 준비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경완은 대꾸하지 않고 계속해 보라는 듯 나바하를 보았고, 나바하는 이런 함정까지 준비한 목적을 꺼냈다.
[경완 씨. 저와 손잡지 않으시겠습니까?]
[뭐하려고?]
[균형과 견제입니다. 누군가는 요하네스의 폭주를 막아야 합니다.]
[그런 거라면 당신이 아니라도 알아서 잘할 수 있는데?]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요하네스를 잘 몰라요.]
[댁보다는 많이 아는데?]
그가 무한회귀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나?
경완은 그렇게 쏘아붙여 보고 싶었지만 그 정보는 이쪽의 중요한 이점이었기 때문에 침묵했다.
나바하는 어두운 표정을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니요. 모릅니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에요.]
[원래 크게 성공한 사람들은 다 어딘가 미친 구석 같은 게 있어.]
적당한 성공은 노력과 운이 따라주면 된다. 하지만 큰 성공은 그만큼 미친 짓을 해야만 가능했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란 말은 그러한 원리를 설명하기엔 식상할 정도지만 이 세상의 법칙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위버멘쉬의 체제가 총수가 폭주하더라도 문제없는 것 같던데?]
지부 독립이라는 제도야말로 요하네스의 권력을 견제하는 장치였다. 야망 있는 이는 지부 독립을 통해 성장해 나갈 것이지만 총수라는 걸출한 지도자 밑에서 안온하게 지내고 싶은 지부들은 요하네스가 정말 미친 짓을 하고 나서야 독립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한 논리에 나바하는 쓰게 웃었다.
[요하네스는 걸출한 위정자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필요없는 것을 마치 그들에게 필요한 것인 양 속여서 팔아넘기고 대가로 정말 중요한 것을 받아 챙기죠.]
[그게 뭐지?]
[자유. 바로 그겁니다.]
[어이가 없군.]
[패권이라는 건, 권력이라는 건 바로 그런 겁니다. 사람들의 자유를 거두는 대신 나의 자유는 늘리는 것. 얼핏 민주적이고 견제장치가 충분히 있는 것 같은 위버멘쉬의 체제는 결국 총수 본인이 지키지 못할 것을 넘겨주는 대신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독립한 지부는 해외 진출을 할 수 있다. 즉, 다른 지부의 영역과 이권을 침범할 수 있다는 말이다.
[디바이드 앤 룰. 어디서 많이 본 수법 같지 않나요?]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당신은 어떻습니까?]
[뭐가?]
[당신이 진정 원하던 것이 지금의 삶입니까? 높은 지위에 오르고 국가로부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겁니까?]
경완의 눈이 가늘어졌다. 굳이 이런 문답이 필요할까 싶었지만 장단을 맞추어주었다.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면…….]
[그러니까요! IAMSR이 나서야 할 정도의 사고들 전부다 자연 발생한 걸까요?]
나바하가 경완의 말을 잘라먹었다. 그는 눈을 이글거리며 말했다.
[요하네스는 어느 나라에서도 가지 못한 CN폭탄을 만들고 보유하고 있던 인간입니다! 평양의 그 많은 사람들을 일순간에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고들은 어떻겠습니까?!]
열변을 토한 그는 다시 심호흡을 한 채 경완에게 물었다.
[당신은 그를 얼마나 믿습니까?]
[…필요한 만큼만.]
경완은 대답했다.
내게 이득이 되는 만큼만 믿는다. 그게 어찌 올곧은 믿음일 수 있겠냐만은,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신에게 바치는 것처럼 올곧은 믿음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면 인간은 배신하는 존재기 때문에.
타고나길 배신자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저 인간이 미약한 존재일 나름이기 때문에, 타인이 일방적으로 믿고 신뢰해도, 언젠가 어느 상황에선 그러한 믿음이 깨질 수밖에 없는 유한자라는 뜻이었다.
경완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나바하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경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