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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전생 더 빌런-356화 (356/367)

무한전생-더 빌런 356화

33-업보

[그런데 예언가는 그냥 대놓고 미친놈이잖아? 차라리 요하네스가 더 믿음직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사람을 정신계 능력으로 세뇌시켜서 자폭 공격하는 인간도 정상이라고 보기엔 힘들었다.

[예언가를 믿으라는 게 아닙니다. 저를 믿으라는 겁니다.]

[예언가는 세상이 망하게 두라는 놈 아니던가?]

[제가 비록 예언가의 도움을 받고는 있지만 제가 세상을 망하게 둘 리 있습니까? 애당초 이 짓거리를 하는 것도 총수가 세상을 망가뜨리지 않도록 하려는 건데!]

[그런 거라면 총수랑 잘 이야기해 보는 게 어때? 내가 보기엔 목적이 같아 보이는데?]

[목적이 같다고요? 목적을 위해 수십만 명을 폭살시켜 버린 광인이 추구하는 세계 평화가 어떤 꼴일지 상상해 본 적은 있습니까?]

경완이 보기엔 세계 평화를 원하는 건 요하네스나 나바하나 같지만, 어떻게 말해도 나바하는 평양 대폭발을 일으킨 요하네스를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뭐, 나바하의 논리가 틀린 것도 아니지만 경완이 보기엔 나바하는 너무 순진하게 세상을 보고 있었다.

요하네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그간 세계 평화에 별로 도움도 되지 않았던 평양쯤이야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희생양으로 날려버릴 수 있었던 것 아닐까?

너무한다고 생각하지만 위정자란 본래 그러한 것이다. 전쟁을 결정하는 것도, 이웃국가를 침략해서라도 내 나라가 잘되어야 한다고 판단하는 것도, 개발도상국에 경제 위기를 일으켜서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도, 모두 위정자라면 기꺼이 고려할 만한 판단이었다.

그리고 굳이 요하네스가 아니라도 각 나라의 위정자들은 지금도 수많은 인생과 생명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것이 국익과 본인의 권력에 도움이 된다면 말이다.

[그래서 내가 댁과 손을 잡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저 친구가 드디어 입을 열어주는 건가?]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과 그녀밖에 생각하지 않는군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따위의 소리는 하지 마.]

[하지만…….]

[흐하하하!]

그때 갑자기 르 샤우룽이 웃기 시작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는 나바하를 향해 말했다.

[더 듣고 있으려니 어이가 없군. 그도 말하지 않았나? 저 이기적인 인간은 결코 당신 이야기를 수긍하지 않을 거라고.]

[조금만 더 설득하면…….]

[저자가 지금 당신 말을 귀담아듣는 것 같아? 저자의 머릿속엔 온통 여자 생각뿐이라고.]

맞는 말이기는 한데, 표현이 좀 거시기 했다. 저렇게 말하면 누가 경완보고 난봉꾼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잖은가?

[그래서 말 안 해줄 건가? 도대체 내 여자에게 어떤 능력을 건 것인지?]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곧 일어날 싸움을 예견하는 듯 폭풍전야처럼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이제는 내가 이야기하지.]

르 샤우루가 입을 열었다.

[길진 않을 거야.]

경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인내심이 다해가고 있었다.

[넌 중국을 무너뜨렸다. 위대한 중화의 얼굴에 먹칠을 했어!]

[그럼 청나라는? 아편 전쟁에, 신축조약에. 그건 먹칠보다 더한 거 아니냐?]

[만주족은 우리나라의 역사가 아니다!]

[아, 그래? 그럼 그 만주족에 수백 년간 지배를 당한 위대한 중화?]

중화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공산당은 민족주의를 이용했지만, 그래서 현대 중화사상은 딜레마에 빠졌다.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다. 그렇다면 한족은 청나라의 지배에 기꺼이 굴복했던 나약한 민족이란 말인가? 청나라 배경의 사극을 보고는 헷갈려 하는 중국인들이 인터넷에 이해가 안 된다고 댓글을 남길 정도였다.

그렇다고 만주족을 한족으로 치부하는 것은 명백한 무리수였다. 백번 양보해서 청나라 구성원 대부분이 한족이었기 때문에 한족의 국가라고 친다고 하더라도 경완이 언급한 청나라의 뼈아픈 치부는 어떻게 할 건가?

[닥쳐!]

소리를 질러 칼자루를 자신이 잡고 있음을 알린 르 샤우루가 말을 이었다.

[비록 공산당은 무너졌지만, 위대한 중화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래서?]

[너희 조선족 역시 위대한 중화 역사의 일부분이니…….]

[만주족은 아니라며? 한국인들 들으면 복장 터지는 소리 하네.]

르 샤우루의 역사관은 좀 이상했다. 청나라는 한족의 역사로 치지 않으면서 조선족은 중화의 일부분이라니? 혹시 동북공정에 물든 중화사상인가?

[너 조선족 혼혈이니?]

[닥치고 들어!]

정곡을 찔려서인지 아니면 경완이 계속 딴죽을 걸어서인지 다시 언성을 높인 르 샤우루가 경완을 보며 가리켰다.

[네게 위대한 중화(中華)를 일굴 자랑스러운 의무를 부여하겠다!]

[…….]

뭐지 이 미친놈은?

경완이 할 말을 잃은 사이에 르 샤우루는 스스로 한 말에 고취되어 열정적으로 외쳐댔다.

[각지의 군벌을 제압하여 분열된 중국을 다시 하나로 합쳐서 강대한 국가를 만드는 거다! 조선도, 일본도 다시 과거의 영광된 중화질서 아래로 영도하여 세계의 패권을 서양, 백인이 아니라, 우리 동아시아로 끌어오는 거다!]

르 샤우루가 열변을 토해낸 이야기는 경완에겐 더없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런 거창한 건 그런 거 좋아하는 사람에게 맞기면 되지 왜 나한테 헛소리를 하는 걸까? 자신이 저따위 말을 듣고 감화될 리도 없는데 말이다.

[내 여자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하지 않겠다면…… 죽이는 게 낫겠지.]

[루롱에게 듣지 않았나? 난 그저 그 여자의 가치 순위에서 너를 가장 높이 올려놨을 뿐이야. 연인에게 가장 가치 있는 인간이 되는 건 누구나 바라는 거 아닌가?]

[그것만으론 그녀가 광기에 빠질 리가 없지.]

경완의 대꾸에 르 샤우루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더불어 발푸기스 그자에 대한 우선순위를 한껏 낮춰줬다. 세상에 그보다 혐오할 수 있는 것이 없을 정도로 말이야.]

[그렇군.]

경완은 르 샤우루의 능력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인지를 뒤트는 힘이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는 패스를 이용하는 정신계 능력의 상식 안에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원래 정신계 능력이란 정신을 연결시키기 때문에 서로에게 간섭하기 때문이었다. 인지를 뒤틀 정도의 압력을 가하면 본인의 정신도 그만한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미연을 광기로부터 건져낼 단서는 발견할 수 있었다.

미연의 사고가 극단적으로 치우친 건 여전히 초능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그것을 제거하면 정상으로 회복될 가능성이 있었다.

인간에겐 기본적으로 안전장치가 내재되어 있었다. 인간의 몸은 한계 이상 힘을 쓰면 신체가 망가지기 때문에 신체가 적정 수준에서 가동하도록 무의식적으로 제어되고 있는데, 이는 인간의 정신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해코지를 했을 때, 분노와 증오를 오래 품고 사는 인간은 많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인간은 한없이 분노할 수 없다. 한없이 증오할 수도 없다. 왜냐면 그것이 스스로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정말 그만한 증오를 품고 사는 이들은 그럴만한 극소수의 자질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충분히 납득할 서사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미연이 요하네스에게 적개심을 가진 이유는 전혀 맥락이 없었다.

오직 눈앞의 저 중국인이 정신계 능력을 걸었다는 것뿐. 그러니 초능력을 제거하면 광기의 수준은 악화되진 않을 것이다.

회복이 문제기는 하지만, 그건 트라우마도 고치는 회복계 능력자도 있으니 괜찮을 거다.

경완은 그렇게 믿었다. 그러니 결론이 나왔다.

범인들에게 미연을 고칠 방안 따위는 없으니 죽여도 된다.

아니, 반만 죽이자. 살아나면 다시 반만 죽이고, 또 살아나면 반만 죽이고.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감정은 움직이라고 하지만 무한전생자로서 오랫동안 쌓아온 통찰이 그의 움직임을 망설이게 했다.

[이경완. 지금만이 유일하게 자의로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 기회다.]

[저 말은 절대 허언이 아닙니다!]

옆에서 나바하가 외쳤다.

경완은 비릿한 미소로 대답했다.

[미연이를 원래대로 돌리지도 못하는 너희를 내가 살려둬야 하는 이유를 대봐.]

그러자 르 샤우루가 외쳤다.

[그딴 소리를 할 수 있는 것도 마지막이다!]

순간 경완은 르 샤우루의 눈동자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어느새 정신계 능력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언제부터? 포위당했을 때? 아니, 시간을 끌기 위한 나바하의 헛소리를 듣고 있을 때?

경완이 기억을 더듬어 위화감을 찾을 때 르 샤우루의 광소가 울려퍼졌다.

[이경완! 위대한 중화전사가 되는 거다!]

그리고 수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아니, 단순한 시선이 아니었다. 그것은 각각이 의식이었고 자아였다. 그건 르 샤우루의 능력을 통해 정신적으로 연결된 타인들이었다.

그리고 그 자아들은 하나같이 르 샤우루와 뜻을 같이해 경완의 정신을 압박했다.

경완은 자신을 포위한 것이 단순한 포위망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전력을 분석해봤을 때, 무력으로 그를 함정에 가두는 건 무리였다. 그 일신이 품은 전투력은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웜홀 능력이 있잖은가?

그러니 그가 불리함을 느껴서 달아나기 전에 확실한 올가미가 필요했다. 공격당했다고 의식하기 전에 공격을 하려면 역시나 정신계 능력의 은밀성이 가장 유효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했다. 나바하는 위버멘쉬에 소속되어 있을 때 우연히 경완에 대한 첩보를 하나 입수했는데, 그것은 남미의 볼라스라는 조직과 마인드 브레이커라는 존재와 관련되어 있는 내용으로, 경완의 정신이 매우 단단해 정신계 능력이 쉽게 먹히지 않는다는 정보였다.

이런 정보를 알면서도 준비를 소홀히 할 순 없었다.

그래서 준비했다. 르 샤우루라는 패를. 아니 자칭 순응하는 자가 준비해줬다.

정신계 능력으로 사람을 조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고, 특히 세뇌 능력은 능력자의 역량에 따라 그 결과가 천차만별이었다.

세뇌를 걸려다가 반 백치가 되는 경우도 일쑤였다. 하지만 르 샤우루는 특별했다. 그의 정신계 능력은 아무리 심지가 곧은 사람이라도 저항할 수 없었다.

왜냐면 혼자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동지를 모아서 상대하기 때문이다.

[복종해라!]

[위대한 중화의 일원이 되어라!]

[위대한 동아시아의 시대를 열 때가 되었다!]

[복종하라!]

[복종해!]

수없이 뇌리에 꽂히는 말들.

천 명? 만 명?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 인간의 정신이 모였는지 셀 수 없었다.

경완은 주변을 포위한 인원들이 일종의 인간 중계기가 되어 먼 거리에 있는 인간들의 정신도 불러와 르 샤우루의 능력 행사를 돕는 방식이라는 걸 간파했다.

정신력이 결국 정신계 능력의 성패를 결정하는 핵심이라면, 르 샤우루는 이렇게 자신의 사상을 ‘감염’시킨 인간들의 정신을 다시 세뇌에 사용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마치 악성코드를 심어 좀비 PC를 만들어낸 후에 이용하는 식이랄까? 이때 악성코드란 아마 ‘중화사상’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중화사상에 물든 그들의 정신이 경완의 정신에도 똑같은 것을 강요했다.

중화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 열망, 자기희생, 서양 백인 중심적인 세계 질서에 대한 반감 등의 감정이 경완의 정신을 쓸어버릴 듯한 기세로 몰려왔다.

그는 그들의 감정이 ‘이해’되었다.

‘이해’란 감정적 동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작업.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 인간은 없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이 단계에서 굴복했다.

이 폭풍 같은 군중의지의 압박이 스스로의 가치관을 뒤트는 걸 피할 수 있는 인간은 없었다. 하다못해 인터넷 악플로도 자살하는 이가 있을 정도인데, 이건 고작 악플 정도가 아니라 정신계 능력을 통해 무수히 많은 이들의 의식과 직접적으로 접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들이 강요하는 정신적 압박은 한 사람의 자아와 가치관을 뒤틀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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