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전생 더 빌런-364화 (363/367)

[364] 036. 에필로그-강의 앞물, 그리고 뒷물 (2)

‘고모처럼 될 거야!’

그녀가 말한 고모란 다름 아닌 김마리아 여사였다. 그분의 카리스마와 미모는 유명 연예인인 모친의 곁에서도 빛이 바래지 않았으니, 그렇다. 소희의 꿈은 그녀와 같은 매드사이언티스트가 되는 것이었다. 별명도 정했다. 매사걸. 매드사이언티스트 걸이라는 의미였다.

그런 내심은 누구에게도 밝힌 적 없었지만 이과를 가기로 한 그녀의 선택에 친모인 이미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누굴 닮았기에 저렇게도 취향이 독특할까? 그냥 이미연의 딸로서 연예인 직업 물려받으면 남들보다 좀 더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을 텐데 굳이 가시밭길을 걷겠다니.

하지만 본인이 원한다기에 밀어줬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깨닫는 젊음의 무모한 객기가 우리 딸만 예외일 순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엔 약간의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긴 했지만 말이다.

“소희야, 왔어?”

“응.”

등교한 소희는 짝꿍의 인사에 시크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김마리아 여사를 동경하는 소녀는 쿨 앤 시크, 걸크러쉬의 가면을 쓰고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약점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

“소희야. 어제 조선 레인저가 화재 진압했다더라?”

스쿨 카스트의 최상단에서 소희와 경쟁을 벌이고 있는 학우, 민희가 청순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이름도 하필 ‘희’자가 같은 위치에 있어서 많은 부분에서 은연중 비교 대상이 되는 라이벌이었다.

“어…… 어.”

“너희 오빠 대단하다. 초능력 변질 작업하는 공장이라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화재 진압이 안 된다던데.”

칭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네 오빠는 촌스러운 조선 레인저의 레드라고 꼽주는 대사였다.

‘멍청한 오빠. 조선 레인저 따위를 해가지고.’

소희는 속으로 오빠를 씹으며 굴욕감을 견뎌냈다. 쿨 앤 시크, 걸크러쉬의 가면이 깨지지 않도록 겉으로 그런 굴욕감을 전혀 드러내지 않느라 힘을 냈다.

그리고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게 출동한 다음 날은 좀 집에서 쉬었으면 좋겠는데, 위험한 일을 하고 나서도 팬미팅에 갔다지 뭐야? 소속사가 좀 너무한 거 같아. 돈 잘 버는 히어로라고 그렇게 혹사시켜도 되는 걸까? 너희 오빠는 소속사 잘 고르라고 그래.”

이건 우리 오빠 돈 잘 버는데 너희 오빠는 지금 뭐 하니? 라는 공격이었다. 참고로 민희의 오빠는 만년 히어로 지망생이었다. 백수라는 뜻이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뭘, 친구 사이인데.”

민희의 미소 띤 말에 소희는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일단은 판정승에 가까운 무승부랄까?

라이벌에게 굴욕감을 당할 뻔한 위기를 모면한 소희는 쿨 앤 시크 걸크러쉬하게 학교생활을 착실하게 보냈다. 어떻게 쿨 앤 시크 걸크러쉬와 착실한 학교생활이 연결될 수 있을까 편견을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소희의 머릿속에 학교 가기 싫다고 째는 행동이 쿨 앤 시크하다는 개념은 박혀 있지 않았다.

쿨하고 시크한 사람은 자신의 의무를 외면하지 않는다. 빈티와 빈티지가 한 글자 차이인 것처럼, 힙찔이와 래퍼를 가르는 기준이 아주 단순하고 명확한 것처럼, 걸크러쉬와 개념크러쉬는 딱 하나에서 차이가 날 뿐이었다.

그리고 학교를 째서 머릿속에 지식을 채워 넣지 못하면 마리아 고모처럼 쿨 앤 시크 카리스마 걸크러쉬한 뇨자가 되지 못한다. 물론 학교 수업의 수준이 낮으면 모르겠지만, 소희가 다니는 학교는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소녀의 소망을 들은 마리아 여사가 추천해 준 비싼 사립학교였다.

학교 수업을 마친 소희는 바로 귀가하지 않고 다른 곳에 들렀다. 멀지 않은 곳에 김마리아 여사의 개인 연구소 겸 자택이 있었다.

“고모! 저 왔어요!”

“무슨 일이니?”

여러 종류의 화분이 놓여 마치 정원을 연상시키는 연구실에서 한가로이 커피 한 잔을 음미하고 있던 마리아가 이상한 어조로 대꾸했다.

“에이. 무슨 일이 있어야 와요?”

그 말에 마리아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야자는?”

“야자? 아! 야간 자율학습이요? 전 그거 안 해요.”

왜냐? 소희는 초능력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초능력을 각성한 아이는 굳이 야자가 필요 없었다. 야자를 하는 이유가 뭔가?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고 하는 짓 아닌가?

그런 관점에서 초능력을 각성한다는 건 청소년들에겐 수시 프리패스 티켓이었다. 그리고 이미 소희는 수시 프리패스 티켓을 발급 받은 상황이고 말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공부를 안 한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율학습을 하는 것보다 마리아 고모의 가르침을 받는 게 더 효율이 좋을 뿐이었다. 부친도 말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효율을 포기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솔직히 야자도 안 하면서 학교에서 순위에 드는 점수를 보여주는 게 짜릿했다. 나 공부 안 해도 이만큼 성적 나오는 여자야! 같은 무언의 외침이랄까? 그렇다. 그녀는 전날 밤늦게까지 시험공부를 해놓고 다음 날 학교에 와서는 ‘어떡해! 나 공부 하나도 못 했어!’라고 엄살 부리는 타입의 학생이었다.

“그보다 저번에 고모께서 말씀하신 책 읽어 왔어요.”

“호. 고등학생한테는 제법 어려운 책일 텐데 대단하네.”

마리아가 언급했던 책이란 ‘초능력의 양자역학적 소개’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그녀가 아는 지인이 쓴 일종의 교양서적으로, 초능력 공학에 대한 필요성이 날로 증가하는 가운데, 일반인들에게 초능력에 대한 과학적 관점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다만 이 책에도 단점이 있었는데, 양자역학과 고전 물리에 대한 어느 정도의 배경 지식이 필요하단 것이었다.

마리아는 소희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며 책을 잘 읽었는지 확인했다.

“잘 읽었네.”

“열심히 읽었어요.”

“거의 대학원생 수준의 속도인데? 어떻게 된 거니? 네 능력은 에스퍼 계열 아니었어?”

아무리 마리아 입장에선 교양 수준의 책이었지만 책을 언급했던 날짜를 생각해 보면 보름 만에 이 정도 개념을 이해한 소희의 수학(修學)능력은 대학원생에 필적했다.

“아빠가 가르쳐 줬어요.”

“책 내용을?”

“아니요. 공부에 능력을 응용하는 법이요.”

소희의 능력은 감각이 예민해지는 에스퍼 계열이었다. 에스퍼 계열 중에서도 가장 계발이 어렵다는 다중감각형으로, 시청각을 비롯한 인간의 오감을 다 예민하게 만들 수 있었다.

계발은 어렵지만 S급 에스퍼나 가질 수 있다는 S입자 감지 능력으로 계발할 수 있는 여지가 큰 능력이었고, 무엇보다 그녀의 부친은 이경완이었다.

아무튼, 그는 성적 향상을 원하는 딸아이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딸의 초능력을 이용한 학습법을 제안했으니, 일명 초능력 몰입법이었다.

감각을 예민하게 할 수 있다면 그 역(逆)도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발상에서 시작한 소희만의 능력 제어법은, 불필요한 감각을 닫아서 그녀에게 책이나 학습 내용에 쉽게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감각의 예민함이나 둔감함을 조절하는 것만으로 잡념을 날릴 수 있는 자기통제의 요령을 가르친 것이다.

“여전히 네 아빠는 대단하구나.”

“그래요?”

“그 대단한 능력으로 내 연구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요즘 집에서 뭐 하시니?”

“어…… 놀아요?”

소희의 대답이 의문형인 것은 스스로의 대답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친이 집에 있는 시간이 길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일을 안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요즘엔 요리, 아니, 스테이크에 취미를 붙여서 부엌에서 고기를 굽고 있는 모습만 보이고 언제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소희의 뇌리에는 이년 전 사건이 머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인도에서 벌어진 초능력 재난, 초능력 소 떼 난동을 선두에서 진압한 사람이 바로 그녀의 부친 아니었던가?

그 과정에서 소를 많이 죽여서 힌두교도들의 원성을 많이 샀지만 아빠는 그딴 거에 1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소녀는 잘 알고 있었다.

소녀의 대답에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전화기를 들고 물었다.

“저녁 먹고 갈 거니?”

“어? 차려주시는 거예요?”

“아니. 시켜 먹지.”

“감사합니다, 고모!”

소희는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아빠도 말하지 않았던가? 먹을 복을 걷어차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이다.

그 말이 뇌리에 남은 건, 그 말을 한 아빠의 등짝에 엄마의 스매싱이 날아왔었기 때문이었다. 틀린 가르침은 아니었지만 시기가 별로 좋지 못했다. 아마 그때가 누가 맛있는 거 사준다고 따라가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아야 하는 유치원 시기였을 것이다.

“그럼 전화한다.”

“네! 그런데 어디에 시키시려고요?”

“일단 너희 아버지에게 말은 해야지.”

그래서 경완은 마리아 소장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소희 먹이고 보내려고요.]

“어휴. 감사합니다. 한 입 더 먹이기 귀찮았는데.”

[농담도 참.]

“네, 농담이죠. 그래도 지금부터 하는 말은 농담이 아니에요. 소희한테 요즘 체지방비율이 좀 늘어난 것 같다고 전해주세요.”

[아빠!]

전화기 너머로 소희의 노성(怒聲)이 들려왔지만 경완은 무시하고 전화기를 껐다. 한참 성장기이니 체중이 느는 거야 당연하지만 비만이 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아무리 모친의 미모를 물려받았다고 해도 여자의 미모란 관리하지 않으면 금방 시드는 법. 미모가 곧 권력인 이 시대에 딸이 미모 권력을 좀 쥐고 편하게 살았으면 하는 것이 애비의 마음이었다.

소속사에서 대본도 좀 보고, 연기 연습도 받고, 스튜디오에서 광고도 좀 찍으며 바쁜 하루를 보내고 온 미연이 집에 돌아와서는 남편을 보고 물었다.

“소희는?”

아들은 조선 레인저인가 고려 레인저인가 하는 것 때문에 늦게 들어오거나 잘 안 들어오니 이제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딸은 아직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한 미성년자였다.

“먹고 온대.”

“어디서?”

“마리아 소장님 댁에서.”

“아, 개인 연구소?”

“뭐, 사실상 집이지?”

매드사이언티스트 기질이 있는 마리아 여사는 기어코 회춘 기술을 확립해서 자신에게 시험했다. 쭉쭉빵빵 색도시발한 모습으로 공적인 자리에 등장한 그녀의 모습이 전 세계적 이슈 블랙홀이 된 건 당연한 일이었고, 그녀는 회춘 기술을 특허로 공개했다.

당시 그녀가 만든 회춘 시술의 비용은 1회에 약 천억 원. 지금은 계속된 연구와 기술개량으로 절반까지 비용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일반인들은 엄두도 못 내는 가격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회적 갈등과 논란이 지펴지고 있었다.

아무튼, 회춘 기술 특허로 돈방석에 오른 마리아 여사는 좀 더 편리한 연구를 위해서 개인 연구소를 차렸다. 지금은 100% 지분을 확보한 대한 세립 초능력 연구소와 원격으로 완벽히 연동되는 연구소를 말이다.

AI로봇기술 및 화상통화 기술 등으로 집이나 마찬가지인 개인 연구소에서 세립 초능력 연구소를 운영하며, 이것저것 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 세립 초능력 연구소에 출근하는 직원들은 그녀를 직접 마주하는 대신 그녀의 얼굴이 띄워진 모니터를 머리인 양 달고 다니는 로봇을 따라다니며 지시를 받는 첨단 IT 시대 속에서 살고 있었다.

“마리아 소장님은 남자친구 있어?”

“글쎄? 모르겠는데?”

“사귈 마음은 있데?”

“모르겠는데?”

“주변 사람에 관심 좀 가져.”

“오지랖과 관심은 종이 한 장 차이지.”

경완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런 남편의 태도에 미연은 왠지 안심이 되었다. 아무리 마리아 여사의 나이가 많다고 해도 그 미모와 재력, 뿜어내는 카리스마 같은 매력은 나이를 신경 쓰지 않게 할 정도였다.

실제로 마리아 여사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것이 알려진 미연은 그녀를 사적으로 소개시켜 달라는 선후배들이 많아서 한때 곤란할 지경이었다.

지금도 재벌 집안은 물론, 미국 정계의 자제들이나 심지어 아랍 부호까지 마리아 여사와 남녀 간의 만남을 가지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남편이 어느 날 마리아 여사와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란 일말의 걱정이 있었던 미연이었다.

하지만 저런 심드렁한 반응이라니 아내로서 한결 마음이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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