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우리 친구 하실래요?
“헉! 헉!”
“헤이! 브라더! 조금 더!”
“아자!”
캘리포니아주 복권국에 공식적으로 복권 실물이 제출되고 1등 당첨금 지급 절차가 개시된 이상, 더는 혹시라도 US 로또에서 나를 해코지하고 복권을 가로챌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편한 마음으로 낮에는 조지를 트레이너 삼아 호텔 피트니스에서 운동을 하였고, 밤에는 역시 조지와 함께 LA의 밤을 즐겼다.
언론 공개는 복권이 제출된 다음 날, 클로버 컴퍼니 이름으로 지분율은 공개되지 않은 채로 제임스가 나서서 진행되었는데, 제임스 역시 얼굴이 팔리는 것을 우려하였는지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기자들 앞에 나섰다.
이제는 정말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한 달이 지나 5월이 되었을 무렵에는 체중이 95kg에서 88kg까지 떨어져서 얼굴의 윤곽이 살아나고 뱃살은 거의 없어졌다.
“이제 좀 볼만해졌군”
“너 군대 있을 때 몇 kg이었는데?”
“그때는 82Kg로 정도?”
“그럼 아직도 6kg은 더 빼야겠네?”
“미쳤냐? 지금은 나이도 들고 군대도 아닌데, 그렇게 어떻게 빼냐? 그리고 내 키가 183인데?”
“하긴, 덩치가 있어서 그건 좀 그렇다. 그래도 3~4kg은 더 빼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응, 84 정도면 적당할 거야. 그 이하는 근육 때문에 어려울 거고. 뭐 지금도 몸은 가벼운 느낌이니까”
“알았고, 오늘은 물 좋은 곳이나 가볼까?”
“아는 곳이 있어?”
“그럼! 내가 여기 토박이 아니냐? 물 반 고기 반인 곳이 있지! 갈까?”
“가즈아!”
한국에서는 슬슬 아저씨 소릴 듣기 시작할 나이인 서른하나이지만, 아직은 청춘이다.
연주와도 헤어졌고, 거의 호텔에서만 한 달을 넘게 버틴 상태.
여인의 향기가 몹시도 그리워졌다.
그 사이에 제프리와도 많이 친해졌다.
“알렉스”
“왜요? 제프리?”
호텔 바에서 둘이서 한잔하는 중에 제프리가 나를 불렀다.
“당첨금이 나오면 뭐 할 거야?”
“글쎄요? 일단은 당첨금을 받을 것만 생각해서 아직은 깊이 생각 안 했었어요.”
일단은 가족을 위하여 집을 사야겠지?
소미가 학교에 다녀야 하니, 인근에 넓고 신축인 아파트로 한 채 살 생각이다.
구역에 따라 입주한 지 얼마 안 되었거나 곧 시작할 가재울 뉴타운이 괜찮아 보여서 관심이 있게 보는 중이고.
그리고, 나도 집 한 채를 사야지.
6평짜리 원룸은 이제 빠이빠이다.
차도 살 거다.
회사 차인 모닝과 레이는 이제 지긋지긋하다.
모닝을 끌고서 부산까지 출장을 간 적이 있었는데, 고속도로에서 큰 차가 옆에서 지나가면 차가 밀려서 핸들을 꼭 쥐고 다니느라 출장이 다녀오면 어깨가 아팠다.
거기다가 이놈 저놈 다 몰고 다니니 더럽고 담배 찌든 냄새가 진동하였고.
대외용으로 제네시스 한 대를 사고 나의 드림카 포르쉐 911을 살 생각이다.
페라리도 생각하였지만, 나중에 천천히 보자.
시선이 너무 집중되는 것은 사양이니까.
그리고 나면?
진짜 뭐하지?
“꼰대의 잔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는데, 지금부터 잘 생각해 봐. 무엇을 할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한지 말이야. 듣기 싫으면 그만할까?”
“아뇨. 편하게 계속 말씀하세요. 저 잘되라고 하는 말일 거 아니에요?”
그간 몇 차례 만나면서 파악한 제프리는 똑똑한 것은 둘째치고 굉장히 현명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의 조언은 돈을 주고서라도 들어야지.
솔직히 1등 당첨금을 받은 후에 무엇을 할지 막상 막막하기도 하였고.
“자, 그럼 생각해 보자. 이제 너는 부자야. 그것도 천문학적인 부자이지. 10억 달러야, 10억 달러. 아마, 미국 부자 순위에도 들어갈걸? 물론 한국에서는 더할 것이고?”
“그렇겠죠.”
미국은 모르겠고, 한국에서는 얼마 전 한국의 50대 부자라는 기사를 보니, 1조면 40위 안에는 들어가는 것 같았다.
물론 부동산과 그 외 금융 자산을 제외한 보유 주식 지분 가액으로 산정한 것이기에, 실질적으로는 한참 뒤로 밀리겠지만.
사성의 이정인 회장이 14조 얼마로 1등이었고, 2위는 의외로 화장품 회사의 회장이 9조 원으로 2등을 차지하였었다.
“문제는 네가 자수성가도 아니고, 하다못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도 아니라는 거야. 자수성가한 부자? 너도 사회생활을 할 만큼 했으니 알 텐데? 얼마나 지독한지?”
“흐흐흐! 잘 알지요. 다니던 회사 사장이 그런 분이었으니까요.”
우리 홍 사장은 깡촌 출신으로 그야말로 자수성가한 사람인데, 자수성가한 사람의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남들에게만 인색한 것도 아니고 본인이나 가족에게도 인색하여, 간부들과 술을 먹어도 6천 원짜리 번데기 탕을 시켜 놓고 소주 몇 병을 마셨다.
그리고, 휘청거릴 정도로 취하지 않으면 택시도 타지 않고 지하철로 귀가하였고.
이거 실화다.
“그래, 그들은 지독해. 특히 맨땅에서 시작한 사람일수록 더 하지. 그리고, 그들은 옳든 그르든 목표의식이 확고하여 흔들림도 없어. 제일 걱정할 필요가 없는 부자라고나 할까?”
“확실히 그렇겠네요.”
“그리고, 부모에게서 재산을 물려받는 금수저들도 그래. 걔들이 마냥 물러 보일 것 같지? 천만의 말씀이다?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상류층 교육을 받는 놈들이야. 끊임없이 사람을 이용하는 법을 배우고, 남들 위에 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덕분에 대체로 싸가지도 없고, 젊을 때 사고도 많이 치지만, 결국에는 대부분 2세 경영인으로서 우뚝 서더라. 뭐 마약에 쩔어서 뒈져 버리거나 하는 놈들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요?”
“응, 미국에 대대로 내려오면서 경영권을 행사하는 가문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일단 시스템이 완벽히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완전히 말아먹는 경우도 많지는 않은 것 같더라고.”
“그렇군요.”
제프리 말처럼, 대체로 싸가지가 없는 것은 사실이고, 좀 재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
작년에 땅콩으로 시끄럽게 한 여자처럼 말이다.
“그런데, 네 경우는 어떨까? 사실, 워낙 전무후무한 케이스라, 솔직히 나조차도 모르겠더라. 네가 당첨금을 받으면? 아마도 처음에는 돈을 펑펑 쓰겠지. 좋은 집과 좋은 스포츠카, 그리고 한국의 강남 텐프로 같은 곳에서 쭉쭉 빵빵한 미녀들에게 돈을 뿌릴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데, 그러고 나면? 이젠 뭐하지?”
“...”
강남 텐프로는 좀 오버 같은데···.
“물론 몇 번 보지는 않았지만, 네 성격에 마약이나 도박에 빠지면서 개차반으로 살 놈은 아닌 것 같고, 그런 놈 같았으면 내가 이런 꼰대질도 하지 않았겠지?”
“죽어도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하여간 말이야, 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목표가 없다는 거다. 나이나 많으면 그냥 그 돈 가지고 편하게 살다 가면 되지만, 너는 그것도 아니잖아? 너 생일 안 지났지?”
“제 생일 7월인데요?”
“그럼 태어나자마자 한 살을 먹는 그 웃기는 한국 나이로나 서른하나지, 실제로는 아직 이십 대지 않아?”
“흐흐흐! 만 나이로는 그렇지요.”
아, 나도 미국에서는 아직 이십 대구나?
이거 좋은데?
“그래, 이제 고작 이십 대야. 돈을 쓰기만 하면서 여생을 보내기는 너무 인생이 아깝지 않을까?”
“동감이요. 뭐라도 해야지요.”
“내 말이 바로 그거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 신중하게 고민을 해보라는 말이야. 그 고민의 결과가 시원치 않더라도, 나중에 할 말이라도 있을 것이 아니냐? 나는 그래도 치열하게 고민하였노라고?”
“맞는 말씀이네요.”
“그렇다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고? 그리고, 너무 어설픈 도덕에 사로잡힐 필요도 없어. 너는 이제 부자야. 그것도 상위 0.001% 이상의 천문학적인 부자란 말이지. 사치? 재산이 1조 원이나 되는데, 너 같은 놈이 사치하지 않으면 누가 사치하냐? 좋은 집도 사고, 페라리든 람보르기니든 슈퍼카도 마음껏 사. 남의 눈치 따위는 볼 것도 없어”
“호오?”
“술? 네가 허구한 날 삼겹살에 소주나 마시면? 그건 서민 코스프레고 위선이야. 물론 맨날 위스키만 마실 수는 없으니, 가끔은 소주도 마셔야겠지만 말이야. 요트? 좋은 요트는 2,000만 달러, 3,000만 달러 이상인 놈들이 수두룩한데, 그런 것도 사고 싶으면 사라고. 그것이 너에게는 합리적인 소비일 수도 있는 것이고, 한국이든 미국이든 경제를 견인하는 한 축이 될 수 있는 거야. 다만, 선을 넘지만 않으면 된다고 봐. 개뿔도 없는 것들이 점심은 라면으로 때우면서 몇백만 원짜리 똥이나 채널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이 과소비요, 허영인 것이지”
“흐흐흐!”
“그리고, 너무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어. 적당하고 적절한 기부는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그것도 한도가 있는 법이다. 교포 사회에서는 유명한 이야긴데, 어떤 교포 아주머니가 예전에 너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한 거액의 복권에 당첨된 적이 있었어. 기억으로는 실수령액이 5,000만 달러가 넘었던가? 아마 그랬을 거야”
“그래요? 그런 일이 있었네요?”
“응, 그런데 끝이 아주 좋지 않았어.”
“어떻게요?”
“그 아주머니 본인은 자신을 위하여 흥청망청 돈을 쓰지는 않았어.”
“그런데요?”
“대신에 기부에 흥청망청하였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기부하는 것에도 흥청망청이라는 말을 쓰나?
“이건 내가 이번 일을 맡게 된 원인 중의 하나이기도 한데, 하여간 그 아주머니는 신원이 공개되면서 엄청난 기부 요청을 받았지. 그런데, 그분 성격이 원래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고, 누가 부탁하면 거절을 못 하는 성격이었나 보더라”
“저런!”
어째 이야기의 결말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였다.
“그래서 달라는 대로 막 퍼주었대. 심지어는 지역 대학교에 그분 이름을 딴 도서관이 만들어졌다니 말 다 한 거 아니냐?”
“대체 얼마나 퍼주었길래···.”
“결론은? 당연히 비극으로 끝났지. 10년인가 지났을 때는 결국 파산 신청을 하였고,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었으니까”
“...”
할 말이 없다.
“그거 미국 사회에서도 굉장한 이슈였어. 대체로 미국 애들 성격이 흥청망청 써대는 일이 많아서, 나중에 파산하는 일은 흔하였지만, 이렇게 기부로 파산하는 경우는 없었거든.”
“그래서 제프리가 이번 일을 맡은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
“응, 전부는 아니지만, 제임스의 말을 들으니 신원이 공개되면 비슷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게다가 미국은 땅이라도 넓고 인구도 많아서 어디 멀리 있는 주로 도망가서 살면 사실상 외국으로 간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한국은 어디 그러냐? 차로 달려봐야 5시간이잖아?”
“글쵸.”
“그래서, 흔쾌히 맡겠다고 하였지. 혹시라도 어디 비리비리한 놈이 맡아서 신원이라도 공개되면, 비극이 재현될 수도 있다고 봤으니까. 물론 내 기준으로는 쉬운 일에 큰돈을 벌 기회이기도 하고? 으하하!”
“에이···.”
살짝 감동하다가 말았다.
그래도 고마운 일이기는 하지만.
“어? 진짜야, 알렉스. 게다가 제임스 놈이 어릴 때부터 알던 놈이라, 할인까지 해주었다고?”
“하하하! 알았어요. 고마워요, 제프리. 이 일을 맡아 준 것도, 그리고 좋은 말씀을 해준 것도요.”
“제길! 술이 이제 좀 되었나? 결국, 꼰대질을 하고 말았군.”
“에이, 이게 무슨 꼰대질이에요?”
“아냐, 가끔 나도 이럴 때 보면, 어떻게 해도 천상 1.5세고 진짜 미국인은 못 되는 것 같아”
“아니 왜요?”
“진짜 미국인은 몇 번 만나서 친해진 고객에게 절대로 이런 충고 짓거리는 하지 않거든?”
“그래요?”
“그럼? 이럴 때 보면, 나도 영락없이 오지랖 피우기 좋아하는 한국인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아이들은 확실히 틀리지만”
“흐흐흐! 한국인이 어때서요?”
“그렇다는 말이야. 아이고! 더 떠들다가는 헛소리가 더 나올 것 같네? 자! 오늘은 이만하자고!”
“네, 제프리!”
주섬주섬 일어나는 그에게 물었다.
“제프리!”
“어? 왜?”
“한국식으로는 친한 선배가 되겠지만, 미국식으로 우리 친구 하실래요?”
“이미 친구가 아닌가?”
“오! 그래요?”
“그럼! 너 같이 돈 많은 친구는 언제든지 환영이지! 으하하!”
“하하하!”
“빠이!”
“조심히 들어가세요.”
어깨를 으쓱하더니 제프리가 호텔을 나갔다.
6월이 초순이 되어, 어느덧 주 복권국에 지급 요청을 한 지가 7주가 넘었다.
띠리리리!
“네, 제임스”
- 알렉스, 드디어 내일 당첨금을 지급한다고 합니다! 하하하!
드디어 내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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