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소각장만도 못한 것이 보육원이라니?
“3월 6일 금요일 저녁이 확실한 겁니까?”
내가 정화 스님을 만난 날을 헷갈릴 일은 없었다.
개같이 멸망하였던 바로 그날인데, 내가 어찌 혼동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 양반이 헷갈렸겠지.
응, 그럴 거야.
말이 안 되잖아?
“왜 그리 물어보시는지는 모르겠지만, 3월 6일 금요일 저녁이 확실합니다. 그날이 마침 경칩이라, 낮에 스님과 벌써 경칩이라고 한담을 나누었던 기억이 생생한데요? 그보다 제가 스님을 모신 것이 십수 년인데, 스님이 입적하신 날을 틀릴 리가 없잖습니까?”
“아,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요?”
점점 무서워졌다.
뜬금없이 이게 무슨 호러냐?
전설의 고향도 아니고?
“아니! 모시고 있던 제가 맞는다고 하는데, 대체 왜 그러십니까?”
중년인이 슬슬 불쾌해지는 모양이었지만, 내가 지금 이 양반 기분을 헤아릴 정신 따위는 없었다.
“그럴 리가 없으니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왜냐하면, 3월 6일 금요일 저녁에 제가 스님을 만났고, 염주를 받았으니까···.”
“뭐, 뭐요?”
양혜원 원장으로 짐작되는 중년인도 황당했는지, 놀라면서 내게 반문을 하였다.
“그럴 리가요? 시주께서 날짜를 혼동하셨겠지요?”
“그랬으면 저도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날은 저도 잊을 수가 없는 날입니다. 애인에게 차이고, 또···. 에휴, 하여간 개같이 멸망하던 날이라 혼동할 수가 없습니다.”
“허어! 이런 일이 있다니? 혹시 그날 스님을 만난 상황을 알려주시겠습니까?”
“하아, 그게 말이지요···.”
나는 중년인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소상히 알려주었다.
스님께서 탁발하러 나왔었고, 마침 5만 원짜리 한 장밖에 없어서 나름 한참을 고민하다가 내밀게 된 일, 그리고 스님은 그 모습을 보고 염주를 내게 채워주던 일까지.
내 설명을 들은 중년인은 눈을 감고, 알 수 없는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선재 선재로다. 착하고, 착하도다. 법신의 인연자여···.”
“네? 무슨 말씀이신지?”
어느새 중년인의 표정에서 불쾌함은 사라졌고, 오히려 미소마저 띠고 있었다.
“정화 스님께서 그날 시주를 만난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럼, 외출하셨다가 돌아오셔서 돌아가셨다는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정화 스님께서는 그날 어디에도 나가신 적이 없습니다. 계속 방에 계시다가 좌탈입망(坐脫立亡)을 하셨으니까요.”
“아, 아니 무섭게 자꾸 왜 이러세요? 그리고, 좌탈입망은 또 뭡니까?”
잠시 가라앉았던 소름이 다시 일어났다.
“허허! 무서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좌탈입망이란 앉아서 열반에 드시는 경우를 말하지요.”
“...”
응, 무서워 죽을 것 같아.
“우선, 스님께서는 탁발하지 않으십니다. 종단 차원에서 금한 일이기도 하고 스님께서도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니까요.”
“그런데, 왜?”
“아마도 시주를 만나러 가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또한 인연이 이끌었을 터···.”
“아니, 외출은 하지 않으셨다면서요?”
“법신의 인연을 맺는 일입니다. 어찌 육신에 연연하시는지요?”
“...”
무슨 말을 이리도 어렵게 하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쉽게 말하면 그 정화 스님이라는 분이 나와의 예정된 인연을 위하여 유체이탈을 하였든, 영혼으로 나타나셨든 하였다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말하니, 스님의 마지막 말이 더 신경이 쓰였다.
정진하여 지금처럼 선업을 쌓으라고 하셨던가?
막말로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내게 일어났으니, 이젠 무시하기도 어려울 듯싶었다.
“스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한마디로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고 이끄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화신 같은 분이었지요. 원래는 집안도 좋으시고, 그 연배에서는 드물게 명문 대학도 나오셨습니다.”
“아니, 그런 분이 어째서?”
“출가하는 것에 어찌 귀천이 따로 있겠습니까? 부처께서는 가장 존귀한 왕자의 신분이셨습니다만?”
“...”
대체 무슨 말을 못 하겠구나.
당신이 먼저 좋은 집안이 어쩌고 명문 대학이 어쩌고 했으면서?
“게다가, 법력이 높으신 것으로도 유명하셨습니다. 간혹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하시고는 하였는데, 나중에 보면 그것이 스님께서 앞날을 미리 헤아리는 것으로 밝혀지고는 하였지요.”
“그러셨군요.”
법력이 얼마나 높은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분이 아니셨던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후우! 저는 여전히 무섭고 두렵습니다. 워낙 옛날이야기 같은 일이 저에게 벌어진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하하! 광명정대하고 선하다면, 그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스님과 인연이 되셨다면, 시주 또한 선하고 특별하신 분일 터, 지금처럼 변하지 않고 용맹정진한다면 좋은 일만 있을 것입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혹시 원장님 되십니까?”
“아, 이런!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사회복지법인 양혜원의 원장을 맡고 있는 장유환이라고 합니다. 보통은 장 원장이나, 장 거사라고 부르지요.”
“저는 강철식입니다. 뭐 하는 사람이냐면···.”
뭐라고 하지?
돈 많은 백수?
전직 백화점 대상 영업맨?
전업 투자가?
투자가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 아직은 아닌 것 같은데?
“투자가입니다.”
결국, 투자가로 대답하였다.
빈말은 아닌 것이, 51달러를 투자하여 1조를 벌었잖은가?
“그러시군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그날 스님을 만난 이후로 투자가 잘 되어서 제법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제법이 아니라, 떼부자, 슈퍼 리치가 되었지.
“허허!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하여간, 스님과의 인연도 있고 해서 앞으로 양혜원을 후원하고 싶습니다.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참고로 저는 정말 많은 돈을 벌었으니,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이거 정말 감사한 말씀이군요. 사실은 스님이 돌아가시고 일이 좀 있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보육원 땅이 전부 우리 땅이 아닙니다. 대지가 350평 정도 되는데, 150평만 오래전에 스님께서 집안의 도움을 받아서 사들이셨고, 나머지는 한 보살께서 스님의 높은 뜻에 공감하여 무상으로 임차해 주셨던 땅이지요.”
“그런데요?”
“문제는 그 보살님께서 몇 년 전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생긴 겁니다. 원래는 생전에 우리 보육원에 기부하시기로 하였는데, 자식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뜻대로 못하다가 그만 덜컥 돌아가신 겁니다. 그다음은···.”
“뭐, 안 봐도 비디오네요.”
생전에도 반대했는데, 돌아가셨으면 끝인 거지.
사이 좋던 친형제지간도 치고박고 싸우는 것이 상속재산인데, 내버려 두면 진짜 보살인 거다.
“그나마 그분들도 워낙 오래전부터 정화 스님과 안면도 있고 해서, 당장 나가라는 말은 차마 못 하고 무상이었던 것을 임차료만 내는 것으로 양쪽이 합의하여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스님이 돌아가시니, 마지막 걸림돌이 없어진 것이지요. 스님이 돌아가시자마자 바로 땅을 팔아버렸습니다.”
“매입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땅을 매도하자마자 바로 대양 건설이란 곳에서 찾아왔습니다. 알고 보니 주변 땅 대부분도 이미 그 사람들의 손에 들어갔거나, 우리 땅이 매입되는 것을 조건으로 가계약된 상태더라고요. 우리 땅의 거의 한 가운데인데, 여기다가 아파트를 지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좋은 조건으로 제안할 때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하아, 거 참 빌어먹을 이군요. 그래서요?”
진짜 하필이면 이상하게도 걸린 것 같았다.
“그래서는요? 우리 이거 팔고 나가면 갈 곳도 없습니다. 20억을 제안했는데, 대체 그 돈으로 이 식구들이 어딜 갑니까?”
“하긴···.”
“거기다가 보육원은 정말 어디 갈 곳도 없어요. 설사 돈이 있어도 말입니다.”
“돈이 있어도요?”
“네, 보육원이 들어선다고 알려지는 순간에 끝장입니다. 지역 주민들 다 달려들어요, 공사 절대로 못 합니다. 주민들이 길을 막을 테니까요.”
“그 정도예요?”
“네, 그 이상입니다. 지자체에서부터 난리 납니다. 허가도 안 내줄 것이고요. 누가 그러더군요. 보육원같이 흔히 말하는 ‘시설’들은 쓰레기 소각장보다도 더 환영 못 받을 거라고요. 쓰레기 소각장은 들어서는 보상으로 지자체에서 이거저거 챙겨주기라도 할 텐데, 시설은 그것도 없다고 말입니다.”
“...”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혔다.
쓰레기 소각장만도 못한 것이 보육원이라니?
이게 말이여 방구여?
“괜히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보육원들이 은평구나 금천구, 그리고 관악구 등 변두리 구에서도 끄트머리 산기슭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들 오래전에 주변이 배추밭이나 달동네라서 주민들 반발도 없고 땅값도 제일 싼 지역에 들어선 거지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다 보니 여기마저도 인구 밀집 지역이 되어 버렸구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아···.”
장 원장은 한숨을 크게 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땅을 매입한 건설사가 보통 건설사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보통 건설사가 아니라니요?”
“그거 뭐라고 하지요? 생활하는 사람들?”
“생활하는 사람들이라니요? 아! 조폭?”
“네, 조폭 맞습니다. 그런 놈들이 계속 찾아와서 땅을 팔라고 강요하지 뭡니까? 은근히 협박도 하고요?”
“아니, 그런 육시럴 놈들이!”
조폭 질을 할 곳이 없어서, 보육원에 와서 해?
“아이들도 겁을 많이 먹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그놈들이 던진 야구공에 유리가 깨져서 아이가 다치기도 했구요.”
“아니, 자꾸 괴롭히면 경찰은요?”
“방금 말한 것처럼, 이 지역에서 우리 보육원은 눈에 가시에요. 길에 세워둔 자동차에 기스만 나도 우리 아이들 소행으로 몰아붙입니다. 그러니, 경찰에서는 우리 보육원을 골칫덩어리로 인식해요. 지난번에 점점 위협이 강도가 세지는 것 같아서 경찰을 불렀더니, 제발 좀 조용히 좀 살자고 하면서 오히려 저를 타박하고 갔습니다. 그런데, 경찰을 불러요?”
“헐···.”
여기 21세기 대한민국 맞아?
“게다가, 그놈들 신분이 건설사 직원으로 되어있더라고요.”
“음? 그건 좀 이상한데요?”
“그게 저도 황당한데, 직원 맞다고 합니다.”
이건 정말 수상한데?
누가 봐도 생활하는 놈들인데, 건설사 직원이라니?
멀쩡한 건설사가 직접 지랄을 떨지는 않는다.
보통 돈을 주고 고용하지.
“제가 알아볼 테니까, 기다려 보세요.”
아무래도 이건 내가 어떻게 하려고 해도 일단 스케일이 너무 큰 거 같았다.
잠시 생각하다가 제프리가 준 번호들을 찾아서 전화하였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 여보세요? 김진호입니다.
“아, 여보세요?”
- 네, 말씀하세요. 어디십니까?
“저는 알렉스라고 하는데요, 미국의 제프리 소개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 아! 제프리에게 말씀 들었습니다. 제프리가 최고 고객이라고 잘 부탁한다고요, 하하하!
제프리가 제대로 약을 쳐놓았네?
“부탁할 일이 있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제프리에게 VVIP면 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말입니다···.”
나는 내가 후원하는 보육원이라고 하면서, 지금까지의 일을 대략 알려주었다.
- 일단 제가 확실하게 알아볼 터이니, 절대로 폭력에는 연루되지 말아 주세요. 일이 복잡해집니다. 2시간 내로 이 번호로 전화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제대로 전화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이런 머리 아픈 상황을 들으면서도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대체 제프리 인맥은 어디까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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