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넌 정말 좋은 놈이구나?
8월 말, 한국에서 두 달을 보내고 다시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보육원은 기동이 형과 신호 형에게 맡겨 놓았으니, 이사할 때까지 큰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김 부장이라는 양반이 새로 소개해준 곳은 안양시 박달동의 새로 생긴 군부대 관사 근처였는데, 기존의 보육원에서 그리 멀지 않아서 고학년 아이들이 굳이 전학하지 않아도 되었고, 무엇보다 부지가 널찍하여 건물만 번듯하게 지으면 이전보다 훨씬 쾌적한 생활이 가능할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스님도 저세상에서 안심할 것이다.
“헤이! 브라더!”
“나왔냐?”
거지 같은 LA 공항 출국장에서 나오자, 조지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한국 생활은 어땠어? 알렉스?”
“뭐, 가족들 챙기고 은인에게 보답도 하고 그랬지”
“은인이 있었어?”
“응”
이 세상 분은 아니지만.
“조지, 집은 다 정리되었어?”
“그럼! 끝내주는 집을 구했지!”
“어딘데?”
“팔로스 버디스(Rancho Palos Verdes)라고 태평양을 바라보는 절벽 위에 세운 동네인데, 부촌이고 전망도 끝내주지!”
“그래? 가보자고!”
“오케이!”
조지의 차를 타고 40분 넘게 달리자, 열어놓은 차창으로 슬슬 바다 내음이 맡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0분 정도를 더 가자 도착한 주택.
“우와와아! 쥑인다! 쥑여!”
“흐흐흐! 그렇지?”
태평양을 바라보는 절벽에서 100여 미터 정도 떨어져 지은 주택은 정말 굉장하였다.
길이가 20m가 좀 넘어 보이는 수영장에 지은 지 얼마 안 되었는지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 그리고 무엇보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태평양의 풍경은 나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전체 대지 면적이 4,000㎡(1,210평)고 지하 1층에 지상 2층, 방은 1층 3개에 2층 3개야. 그리고 화장실은 9개고. 부대시설은 보시다시피 멋진 수영장에 대형 스파가 별도로 하나, 홈 짐과 지하에 극장이 있어.”
“휘유! 이거 얼마냐?”
아무래도 2,000만 달러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은데?
“1,800만 달러야”
“그거밖에 안 해?”
“그거 밖이라니? LA가 샌프란시스코보다는 훨씬 싸지만, 그래도 엄청나게 비싼 건데?”
“아니, 우리 서울 강남의 부촌에 가면 500㎡도 안 되는 고급 빌라가 1,000만 달러가 넘고 그래”
“진짜? 무슨 놈의 집값이 그렇게 비싸냐?”
“뭐, 원체 땅덩어리는 좁은 곳에 인구는 많아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크지”
“하여간 이 집은 1,800만 달러야. 물론 이런 집을 샌프란시스코 같은 곳에서 사려면 2배에서 3배는 더 비쌀 것이고”
“여기가 그래도 싼 편이네?”
“자꾸 싸다고 하는데, 안 싼 거라니까? 여기 부촌이야, 부촌! 물론 완전 슈퍼리치들이 사는 곳은 아니고, 보통 1,000만 달러 이하의 주택이 많지만”
“알았다, 알았어”
계속 집구경을 하였는데, 볼수록 감탄만 나왔다.
홈 짐이라고 한 곳을 가보니, 그냥 어지간한 피트니스 센터다.
“짐은 추가로 기구들을 보충했어. 너 운동해야 할 거 아니냐?”
“흐흐! 잘했다.”
잠시 후, 집을 구경하는 나에게 조지가 동아시아계로 보이는 아줌마와 멕시칸 두어 명을 데리고 왔다.
“알렉스, 인사해라. 이분은 제니 정, 너랑 같은 한국계야”
“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호호호! 한국 음식을 할 사람을 채용한다고 해서 왔는데, 역시 우리나라 분이네요?”
“하하하! 역시 한국 사람은 한식을 먹어야 힘이 나죠? 저는 알렉스라고 합니다. 그냥 편하게 알렉스라고 부르세요.”
“네, 알겠습니다. 저도 편하게 제니라고 부르시고, 한식 드시고 싶으면 뭐든 말씀하세요. 전부 가능합니다.”
“이야? 이거 정말 반가운 소식이네요?”
정말 반가웠다.
그렇지 않아도 음식 걱정을 했는데.
정원 등의 집 관리를 할 멕시칸들과 인사하자, 조지는 다시 나를 끌고 정원으로 데려갔다.
“인사해라. 내가 다니던 이지스 컴퍼니에서 나온 요원들이야.”
미국에서 나를 경호할 사람들이었다.
“이쪽이 팀장 해리, 다음부터 닉, 아론, 트렌트, 코너, 카일 그리고 메이슨이야. 네 요청대로 모두 그린베레 출신이고”
“반갑습니다, 보스”
“반가워요, 모두. 잘 부탁할게요.”
“모두 7명이고, 팀장인 해리를 제외한 6명이 2명씩 3개 조를 짜서 24시간씩 경호할 거야”
“그럼 밤에 2명이 있겠네?”
“응, 그래서 24시간씩 근무하는 거지. 밤에는 교대로 잠을 잘 것이고. 그래서 1층의 방 하나는 이 친구들이 쓸 거니까, 그렇게 알아”
“그래, 알았다. 우리 좀 쉬면서 이야기하자.”
“응”
테라스에 조지와 둘이 마주 앉아 있으니, 제니가 시원한 맥주를 가져다주었다.
“7명은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이지스 컴퍼니의 VIP 개인 경호 프로그램이 그렇게 되어있어. 아니면 좀 저렴한 프로그램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러면 아무래도 수준이 떨어지고”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비용은?”
“1년 계약으로 80만 달러야”
전원 그린베레 출신임을 생각하면 의외로 저렴하였다.
“생각보다 싼데?”
“회사에서 30% 정도 가져가고 나머지는 요원들 연봉이라고 생각하면 돼. 팀장인 해리가 연봉 10만 달러 수준이고, 요원들은 7만에서 8만 정도니까”
“그거밖에 못 가져가냐?”
“너, 부자 된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눈이 굉장히 높아졌다? 전쟁터에 안 가고, 안전한 미국이잖아? 경호 업무는 원래 그리 많은 돈을 벌지 못해. 하다못해 전쟁터 근처라도 가야 돈을 벌지”
“험, 그렇구나”
“그런데, 알렉스”
“왜?”
“나 부탁 좀 하자”
“말해”
“이거 좀 말하기 민망한데, 이지스 컴퍼니가 많이 어려운가 보더라. 사장이 나보고 5% 할인해 줄 테니까, 연간 경호비 전액을 미리 좀 줄 수 없겠냐고 부탁하더라고”
“전액을 선불로 달라고? 많이 어려운가 보지?”
“응, 원래는 10% 계약금에 나머지 금액을 매월 분납 조건이거든. 부담스러우면 못 들은 것으로 해”
“흐음”
대체 PMC가 왜 그리 어려운 거지?
기본적으로 이 바닥도 인력사무소 같은 개념이 아닌가?
그러면 일 소개해주고 30%씩 떼어 가니까, 어려울 일이 별로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어쨌든 간에, 전에 조지가 말한 이지스 사장의 회사 운영방침이 마음에 들어서 여기다가 경호를 맡긴 곳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도와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내 소중한 생명을 지켜 줄 회사이기에, 인색하기도 싫었고.
“알았다. 그렇게 해준다고 해”
“정말? 고마워, 알렉스. 사실 어려운데 나만 빠져나온 것 같아서 미안했거든.”
“하하! 자식! 5% 할인도 됐으니까, 그냥 경호나 잘해 달라고 하라고”
“흐흐흐, 그건 염려 마라. 내가 최고들만 찍어서 데려왔으니까”
“잘했다. 아, 참! 넌 어디서 지내냐?”
“나? 시내 쪽에서 지내는데?”
“너 혼자잖아? 그럼 쓸데없이 비싼 월세 내지 말고, 나랑 함께 지내자. 빈방 많잖아?”
“그래도 돼?”
“그럼! 넌 내 브라더잖아?”
“알렉스! 넌 정말 좋은 놈이구나?”
“자식아! 그걸 이제 알았냐?”
“하하하!”
“하하하!”
좋아하기는?
이렇게 공짜 경호원 한 명을 더 추가했고, 다른 일도 밤낮으로 부려먹어주마!
흐흐흐!
이틀 정도 새집에 맞는 소소한 가구나 소품을 채워 넣으면서 지내다가 뉴욕으로 출발하였다.
물론 조지와 함께.
“야, 조지”
“왜?”
“저 친구들 원래 출장도 따라다니는 거야?”
“응, 그게 원칙이야. 혹시라도 계약 기간에 네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소송에 걸릴 위험이 있으니까. 소송 잘못 걸리면 망하거든?”
“헐···.”
진짜 이놈의 미국은 소송으로 망할 나라 같았다.
뉴욕으로 출장을 가서 며칠 있다가 올 거니까, 경호팀보고 그냥 쉬라고 하는데도 죽어도 따라서 온단다.
그게 계약 조건이라고 하면서.
문제는 이 친구들 출장 비용도 만만치 않은 거였다.
조지와 나는 당연히 일등석이다.
경호팀 친구들은 그냥 이코노미 끊어주면 된다고 하는데, 그게 어디 그러냐?
따지고 보면 나도 한때 군복을 입었던 몸이고, 조지는 얼마 전까지 한 회사 동료였는데?
그리고, 덩치들이나 작나?
그 덩치로 무슨 민폐를 끼치려고 이코노미석이야?
결국, 따라오기로 한 경호팀 4명의 비즈니스 좌석을 끊어 주어야 했고, 호텔도 내가 예약한 특급 호텔의 디럭스룸을 예약해 주었다.
이거 경비 손실이 만만치 않은데?
“영식아!”
“철식이, 이새끼!”
“하하하! 반갑다!”
“하하하! 이게 몇 년 만이지? 4년 만인가?”
내 친구 영식이를 만났다.
아빠에게 거짓말을 했던 바로 그놈인데, 실제로 이놈은 머리가 거의 천재 수준이 아니고 그냥 천재였다.
고등학교 1학년 마치고 이민 가기 전에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미국에 가서도 하버드 MBA를 거쳐서 월가에서 겁나게 잘나가는 놈이었다.
한마디로 난 놈.
“캬! 미국에서 마시는 소주 맛도 좋구나!”
“캬! 불알친구하고 마시는 이 소주 맛! 양놈들하고는 못 느끼지!”
시간이 5시도 안 되었는데, 곧장 영식이가 가끔 간다는 한식집으로 자릴 옮겨서 소주를 파기 시작하였다.
“대체 넌 왜 그렇게 연락이 안 된 거야? 정훈이도 연락한 지 3년이 넘었다고 하더구먼?”
“아, 정말 미안하다. 사실, 내가 따로 독립하여 회사를 차려서 요 몇 년간 정신이 없었어.”
“네 회사를 차렸어? 네 나이에?”
“이 바닥에서 나이가 무슨 소용이야? 실적이지?”
“허! 난 너 계속 골드먼에 있는 줄 알았지?”
“거기 나와서 독립한 지 2년 되었어.”
“무슨 회산데?”
“월가에서 무슨 회사긴? 투자회사(investment company)지?”
“후아! 너희 집이 잘살기는 했지만, 무슨 돈으로?”
“내 돈으로 투자하냐? 남의 돈으로 투자하지? 물론 내 돈도 꽤 들어가 있지만”
“내가 그쪽은 잘 모르지만, 얼마나 운용하는데?”
“지금은 아직 작아. 30억 달러 정도?”
“드아아아!”
서른 하나에 독립하여 투자회사를 차려서, 벌써 30억 달러를 운용한다고?
그게 작아?
이 자식은 진짜 천재였구나!
“야야! 오버하지 마! 월가에서 30억 달러는 아무것도 아니야!”
“미친놈! 지랄하네!”
“진짜라니까? 그나저나 넌? 거지 같은 중소기업 들어가서 개처럼 구른다고 하더니만, 이게 어쩐 일이야? 아무리 봐도 신수가 중소기업에서 구르는 놈 같지가 않은데?”
“흐흐흐, 그러냐?”
“어쭈? 이놈 봐라? 너 그 시계 뭐야? 바셰론 콘스탄틴?”
확실히 성공한 놈은 바로 알아보는구나.
“나도 좀 성공했어.”
“좀이 아닌데? 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중에 말해 줄게. 어찌어찌 미국에 흘러와서 영주권도 따고 돈도 좀 벌었어.”
“혹시 저기 끝쪽 자리에서 네 친구라는 조지와 함께 삼겹살 처먹는 떡대들은 경호원?”
“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자식아? 네 친구도 그렇고, 같이 먹는 떡대들도 머릴 굴려서 밥 먹고 살 스타일은 아니구먼?”
“그, 그러냐?”
하여간 쓸데없이 예리해요.
“그건 그렇고, 너 나 좀 도와줘”
“뭘?”
“나도 제법 돈이 좀 있는데···.”
“싫어!”
“엉? 뭐가 싫어?”
“너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사업 철칙이 있어. 가족과 친구 돈은 절대로 관여하지 않아”
“그러냐?”
“미안하다, 철식아. 대신 나도 네가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묻지 않을게. 친구와 돈 이야기하는 순간에 친구가 아니야. 그건 내가 절대로 깨뜨리지 않는···.”
“기특한 새끼! 미국에서 나 없이도 잘 컸구나!”
“뭐 이 자식아?”
“나도 이하동문이거든?”
나도 친구와는 돈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철칙이다.
그래서, 그 더럽게 어려웠던 시절에도 천 원짜리 한 장 빌려본 적이 없었다.
그냥 달라고 했지.
“응? 그럼 뭘 도와달라는 거였어?”
“사람 좀 구해주라. 그건 되지?”
“뭐? 사람?”
내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영식이는 어이없다는 듯이 반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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