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선업이 포인트란 말이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서 몇 번을 다시 파일에 손을 올려 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염주는 무조건 약쟁이를 강추.
“아니 이거 뭐야? 염주도 잘못 찍는 거 아니야?”
이건 아니잖아?
약쟁이라니?
내가 마약은 잘 모르지만, 적어도 하나는 알고 있다.
한번 약쟁이는 영원한 약쟁이라는 거지.
죽어야 치료되는 중독이 마약 중독으로 알고 있고, 그게 맞을 거다.
그런데, 그런 약쟁이에게 내 돈 10억 달러를 맡기라니?
염주, 미친 거냐?
“아우! 나보고 어쩌라고?”
승질이 팍팍 났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염주의 권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일단 25억 달러짜리 파워볼에 당첨된 것 자체가 사기였으니까.
그렇게 어쩔 수 없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계속 일말의 희망을 품으면서 6개의 파일 위로 왼손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반쯤은 화풀이성 염주질을 하였다.
그런데.
“음? 이거 이상한데?”
아무 생각 없이 염주질을 하다가 문득 느낀 점, 염주의 발광 광도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뭐야? 배터리가 나가는 거야? 푸흐흐!”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처웃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이거 웃기는 일이 아니었다.
이거 염주질을 그냥 계속하면 언젠가는 발광을 안 한다는 소리잖아?
방전 각이냐?
사안이 워낙 심각하여 바로 정자세를 취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처음 염주의 발광도 확실히 파워볼을 찍을 때 보다 훨씬 밝았었다.
처음 파워볼 찍을 때는 그저 간신히 알아볼 정도로 희미했었는데.
그렇다면, 그때와 지금 사이에 염주의 발광이 밝아진 원인이 있다는 소린데?
시간이 지나서?
이건 아닌 것 같다.
그럼, 햇볕을 쬐어서?
무슨 태양광 발전이냐?
이것도 아니다.
이거저거 다 생각해 봐도,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보육원 일을 처리하면서 선업(善業)을 쌓았다는 것!
이거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다는 말은?
만약에 선업을 쌓는 일을 게을리한다면, 언젠가는 염주의 능력을 쓸 수 없다는 말인데?
“우와와와! 이거 기가 막히네? 그러니까, 선업이 포인트란 말이잖아?”
한마디로 영주의 능력을 계속 쓰고 싶으면, 부지런히 선업을 쌓으라는 말이다.
선업 포인트 떨어뜨리지 말고.
이제야 정화 스님이 마지막에 내게 한 말이 이해가 갔다.
- 명심하시고 정진하여 끊임없이 지금처럼 선업을 쌓으신다면 더 좋은 결과를 보실 겁니다.
“그냥 하신 말인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사용법이자 경고였구나···.”
허허! 세상에 공짜는 없구나.
이거 착한 일은 의무적으로라도 해야 할 판이다.
게다가, 반대로 악업을 쌓으면 선업 포인트가 차감되어 염주를 사용할 수 없거나, 심하면 저주가 내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아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양이 있으면 음도 있는 것이고, 산이 높으면 골짜기도 깊은 것이 세상 이치니까.
그리고, 가만?
정화 스님은 분명히 정진하여 선업을 쌓는다면, ‘더 좋은’ 결과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뭐여? 그럼 레벨업이라도 한다는 소리야, 뭐야? 푸하하하!”
이건 망상이겠지.
망상일 거야.
머리가 복잡해서 한참을 더 생각했지만, 결론은 하나다.
스님도 ‘지금처럼’이라고 하였다.
나는 나다.
내가 어거지로 선업을 쌓는다고 하여, 그게 포인트로 인정될 것 같지도 않았다.
어차피 원래도 불쌍한 사람을 보면 가만히 있지 못하던 것이 내 천성이었다.
아빠에게서 물려받은.
이대로 즐길 것은 즐기고, 또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능력이 닿는 한도 내에서 열심히 돕자.
그럼 되겠지.
아니면 말고.
최소한 내가 나쁜 짓을 하고 돌아다닐 놈은 아니었으니까.
다음날, 영식이에게 곧장 찾아갔다.
시간 끌 일은 아니니까.
“결정했어”
“벌써? 며칠 더 심사숙고하지 그러냐?”
“장고 끝에 똥 싼다는 말도 몰라?”
“그런 더러운 말은 알고 싶지 않구나”
“하여간, 시간을 끈다고 번복할 일도 없는데, 뭐하러 며칠 더 보내? 시간 아깝게?”
“너답다, 너다워. 그럼 누구로 결정했는데? 아너 해링턴? 아니면 데이비드 웨버?”
“아니다.”
“그래? 그럼 누군데?”
“존 스미스”
“...”
영식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해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야···. 이···. 미친놈아! 진짜 존을 선택하면 어떻게 해!”
“이 자식이 돌았나? 네가 추천해 놓고 왜 지랄이야?”
“그, 그게 임마! 아요! 내가 미친놈이지! 내가 미쳤었어!”
“이제야 바른말을 하는구나?”
“하아! 어째 밤새 불안하더니만···.”
“그러니까, 불안한 짓을 왜 한 거야?”
이건 내 진심이다.
왜 파일을 껴 넣어서 염주가 선택하게 만드냐고?
“야! 내가 잠시 미쳤었다. 그놈의 정이 뭔지!”
“뜬금없이 웬 정?”
“너 만나기 며칠 전에 존이 내게 찾아와서 약을 끊었으니, 일하게 해달라는 간청을 들었던 것이 에러였다. 하필 네가 사람을 구해달라고 한 것이고. 너도 알다시피, 내가 제정신으로 이런 짓을 하는 놈이 아닌데,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봐.”
살짝 소름이 돋았다.
영식이의 자백(?)처럼, 영식이는 이런 일에 절대 정을 개입시키는 놈이 아니다.
그런 놈이 이렇게 스러질 사람이 아니라는 등, 다시 빛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등의 개소릴 해?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이 나갔다고 한다.
이거 염주가 미리 장난친 거 아니야?
“하여간, 내가 잘못한 거 인정할 테니까, 해링턴이나 웨버 둘 중에서 뽑아. 둘 다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고, 실력도 좋다고. 알았냐?”
“싫어!”
“야! 철식아!”
“시끄러워 임마! 추천하지 말던가!”
“내가 실수한 거라고 하잖아?”
“됐어! 난 이미 정했으니까, 오라고 해. 그래도 면접은 봐야지”
염주가 영식이 정신세계까지 영향을 끼쳐서 만든 일인데, 나보고 어쩌라고?
분명히 약쟁이를 선택하게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인데?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거야?”
“응, 나는 후회 하지 않아. 네가 할지는 몰라도?”
“야!”
“크크큭! 농담이다, 농담. 진짜로 나도 생각이 있어서 선택한 것이니까, 부르기나 해. 오늘 오후에 볼 수 있을까?”
“왜 그렇게 서두르는데?”
“내 돈이 놀고 있는데, 서둘러야 하지 않겠어?”
결국, 존 스미스와의 면접이 오후 늦게 잡혔고, 나는 영식이와 점심을 먹은 다음에 조지와 뉴욕 구경을 하다가 면접 시간인 6시에 맞추어서 다시 돌아왔다.
“안녕하십니까? 존 스미스입니다.”
나와 비슷한 키에 상당히 마른 편의 백인이다.
하지만, 정장 수트가 헐렁한 것으로 봐서는 예전에는 건장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아마도, 약쟁이 시절에 살이 빠졌겠지.
게다가, 이제 미국 나이로 41살인데, 40대 후반으로 보였다.
역시 마약의 후유증일 것이고.
다만, 의외로 눈빛은 맑아서 그나마 안심은 되었다.
“반갑습니다. 나는 알렉스 강입니다.”
“네, 스티브에게 말씀 들었습니다.”
“스티브?”
“내 미국 이름이다. 신경 꺼라”
새끼가 까칠하긴.
그리고, 하필이면 왜 스티브야? 하고 많은 이름 중에서?
영식이는 성이 유 씨다.
강릉 유씨.
“자! 우리 이런 거 저런 거 따지지 말고, 솔직히 이야기합시다. 나는 사람이 필요해요. 어쩌다가 큰돈을 벌었는데, 더 크게 벌고 싶단 말이에요?”
“3억 달러만 해도 엄청난 성공입니다.”
“그래도 사람 욕심이란 것이 그게 아니란 말이지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본인이 더 잘 알겠지.
전성기 시절에 자산이 7억 달러가 넘었다고 하니까.
“하여간, 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팀을 구성해서 내 돈을 불려 줄 사람이 말이지요. 이야기 들으셨겠지만, 투자의 최종 판단을 내가 할 겁니다.”
“저, 원래 투자계와는 거리가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내게도 소스가 있어서 그런 겁니다. 거기에 대하여는 더는 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죄송합니다.”
“업무수행 방식은 이렇게 할거에요. 일단 먼저 존이 내게 투자했으면 하는 유망한 종목이나 금융상품 등을 권하면 거기서 내가 선택할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왕년에 상당한 거물이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런 방식이 괜찮겠어요?”
“다 지나간 이야기입니다. 지금 저에게는 월세를 내고 밥을 사 먹을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할 뿐입니다.”
존이 회한이 어린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그리고, 나는 실력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실력이야, 영식이, 그러니까 스티브 유가···.”
“날 영어 이름으로 부를 때는 성을 빼지?”
“알았다, 자식아. 끼어들지 좀 마!”
“알았다.”
“하여간, 스티브가 실력은 보장하였으니까,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솔직히 내가 검증할 능력도 없고요. 하지만, 신뢰는 다른 영역이지요. 미스터 스미스, 내가 당신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하아···. 제 과거 이야기는 들으셨지요?”
“네, 약쟁이였다고 들었습니다.”
“네, 약쟁이였습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말씀드리면 저를 믿으시겠습니까?”
자신이 뭐라고 말해도 믿지 못할 것이 아니냐는 소리다.
하긴, 약쟁이 말을 믿는 놈이 미친놈이지.
솔직히 나도 염주를 믿는 것이지, 약쟁이였던 존 스미스는 못 믿겠다.
“그럼 다른 것을 물어보겠습니다. 약은 어떻게 끊었습니까? 상당히 중독이 심했다고 들었는데?”
“제게 딸이 하나 있습니다. 삶이 무너지고 마약 중독자가 되면서 와이프로부터는 이혼당했는데, 딸아이 얼굴도 못 보는 신세가 되었지요. 접근금지 명령이 떨어졌으니까요. 뭐, 그때는 제정신으로 있을 때가 거의 없었으니, 와이프를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흐음···.”
“그렇게 제가 막장에서 구르고 있을 때, 딸아이가 가출하여 난리가 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아빠가 보고 싶다고 무작정 집을 나온 거지요.”
“저런···.”
“그때도 저는 약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것도 돈이 없다 보니 싸구려 합성 마약을요. 그렇게 약에 절여서 뒷골목에 쓰러져 있었는데, 우리 딸아이가 어떻게 찾았는지 쓰러져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제 얼굴에 물을 뿌리고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애를 썼다고 하더라구요.”
“딸하고 무척 친했었나 봅니다?”
“망가지기 전에는 둘도 없는 친구였지요. 딸은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니까요.”
회한이 차오르는지 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하여간 그 노력이 통했는지, 제가 정신이 들었습니다. 눈을 뜨니까 세상에 우리 딸이 내 더러운 품에 엎드려서 펑펑 울고 있지 뭡니까?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내 딸이 말입니다.”
“...”
“같이 부둥켜안고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제가 얼마나 나쁜 아빠인지를 새삼 깨달았고요. 그리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이미 포기한 인생이지만, 제가 이래서는 딸에게 정말 커다란 상처가 될 것 같았으니까요.”
“그럴 겁니다. 아마도 존이 그렇게 약에 절어서 죽었으면, 딸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겠지요.”
“맞습니다. 그때 경찰이 애 엄마와 데리러 왔는데, 제가 경찰과 애 엄마에게 사정했습니다. 재활원이 아니면 교도소라도 좋으니까, 약을 끊을 수 있게 가둬 달라고요. 그리고, 그렇게 약을 끊게 되었습니다.”
자업자득이지만, 이 양반도 참 롤로코스트 같은 인생은 살았구나.
“그래서, 이제는 약을 완전히 끊었습니까?”
“네, 그때 이후로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스티브에게 검사도 받았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제게 앞으로도 절대로 마약을 하지 않을 것을 맹세할 수 있겠습니까?”
“맹세합니다! 채용만 해주신다면, 남은 인생을 보스에게 바치겠습니다.”
“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네?”
“그토록 사랑하는 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란 말입니다. 왜 싫어요?”
“아, 아니 싫은 것이 아니라···.”
“예?”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저 존 스미스는 내가 사랑하는 딸, 제인의 이름을 걸고, 마약을 하지 않을 것과 보스께 충성할 것을 엄숙히 맹세합니다!”
“엉? 따, 딸 이름이 제인이에요?”
“네···.”
“...”
제인 스미스.
남자에게 존 스미스가 있다면, 여자는 제인 스미스가 있다.
가장 흔하고 익명이나 가명으로 쓰이는 이름.
한마디로 여자 홍길동.
어째, 딸 이름을 걸고 맹세하라니까, 주저하더라.
제발 자식들 이름으로 장난치지 말자.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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