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부담 가지시라고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다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험험, 그렇군요. 어쨌든 미스터 스미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서 맹세하였으니, 꼭 맹세를 지키리라 믿습니다.”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그래야 할 것입니다. 나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특히나, 내 뒤통수를 치면 반드시 그 이상의 대가를 치를 겁니다. 반드시 말이지요!”
반드시를 강조하면서 존 스미스를 노려보았다.
염주가 찍어 주어서 채용하는 것이다.
맹세를 어기면 나는 물론이고 염주도 배신하는 셈이다.
그냥 재수 없게 똥차에 치였다고 생각하고 넘어갈 생각은 없다.
아주, 처절하고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노려보아도 존 스미스는 내 눈길을 흔들림 없이 받아 내었다.
나름대로 각오가 선 듯하니, 이쯤에서 면접을 끝내자.
어차피 염주가 점지한 사람, 내가 끌고 자시고 할 것은 아니지.
“오케이! 좋습니다. 미스터 스미스, 내가 당신을 고용하겠습니다.”
“진, 진심이십니까?”
“이런 것으로 장난치는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 앞으로 잘해 봅시다.”
내가 손을 내밀자, 존이 내 손을 잡았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휴우, 그렇게 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만세라도 부를 것 같은 존은 얼마나 기쁜지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하긴, 왕년에 아무리 잘나갔어도, 약쟁이를 고용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다.
나조차도 염주가 찍지 않았으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니까.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도록 내버려 둔 다음에 다시 물었다.
“원하시는 조건이 있습니까? 연봉이라든가, 아니면 그 외의 다른 조건이라든가? 아, 말씀 들었겠지만, 뉴욕을 떠나서 LA로 이사하셔야 합니다. 그건 알고 계시지요?”
“네, 그것도 스티브에게서 말을 들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지금은 혼자여서, 서부로 가는 것에 어떤 장애도 없습니다. 저도 지긋지긋한 뉴욕을 떠나고 싶고요. 오히려 좋습니다.”
“잘 되었네요. 그러면, 조건은?”
“원하시는 대로 주시면 됩니다. 제 처지에서 뭘 바라겠습니까? 대형 마트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판국에? 다시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합니다.”
“흐음···.”
존이 말이야 이렇게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대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최측근이 될 사람이며, 막대한 재산을 컨트롤 해야 한다.
푼돈을 쥐여주면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는 불만이 생길 것이고, 금융 사고로 이어질 소지가 발생할 거다.
“일단 연봉 50만 달러로 시작하지요. 잘하시면 인센티브는 상응하여 별도로 지급할 것이고. 의료 보험은 최상으로 해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면 괜찮으시겠습니까? 적다고 생각하면 지금 말씀하세요.”
“아닙니다! 과분한 대우고 제게는 넘칩니다. 감사합니다, 보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아! 집은 우리 집으로 들어오지요?”
“보스 집으로 말입니까?”
“네, 팔로스 버디스에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제법 괜찮은 집을 가지고 있어요. 나도 혼자고, 남는 방도 많아요. 괜히 집을 구하는데 돈 나가고 신경 쓰고 하지 말고, 같이 지내지요. 나중에 자리 잡으면 그때 따로 나가든가 하고요.”
“하하! 보스께서 괜찮으시다면 저야 좋습니다. 팔로스 버디스라면 상당히 좋은 지역으로 알 고 있구요.”
“오케이! 그럼 그렇게 합시다.”
존에게 우리 집으로 들어오자고 한 것은, 실제로 집이 여유가 있고 쓸데없이 집을 구하는 것에 신경 쓰지 말라는 배려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해서이다.
같이 살면서 한동안은 지켜보면서 유혹에 노출되는 것 자체를 차단할 생각이었다.
“일주일만 시간을 주시면, 여기 생활을 정리하고 LA로 넘어가겠습니다, 보스”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이거 받아요.”
양복 안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하였던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10만 달러에요. 한동안 형편이 대단히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이건 연봉과는 별도니까, 이걸로 정리할 것은 깔끔하게 정리하시고, 필요한 것도 사세요. 우선 몸에 맞는 정장이 필요하겠네요.”
존이 입고 있는 정장은 잘나가던 시절에 산 것인지 대단한 고급으로 보이지만 몸에 맞지 않아서 영 어색하였다.
아무래도 과거의 건강한 체형을 회복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듯하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챙겨주시고···.”
“다 열심히 일하라고 주는 겁니다. 부담은 가지세요.”
“네?”
“부담가지시라고요. 부담가지라고 주는 거니까”
“푸하하하!”
보통은 이런 거 주면서 부담 느끼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부담 가지라고 주는 거다.
잘해 주는 대신에 개처럼 부려 먹을 것이니까.
결국, 그 말에 영식이가 폭소를 터뜨렸고, 존도 활짝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네! 확실하게 부담을 가지겠습니다! 하하하!”
응? 나는 진짜 부담가지라고 한 건데?
어째 분위기가 부담 갖지 말라고 일부러 농담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분위긴데?
“그리고, 시간이 되면 같이 LA로 와서 일할 팀원도 구해보세요. 당장 손발을 맞추려면 아무래도 존이 아는 사람이 좋을 것 아니에요?”
“전부는 아니더라도, 시작은 일단 아는 사람이 있으면 편할 겁니다.”
“고용조건은 존이 알아서 해요. 적절한 연봉이 얼마인지는 나보다 존이 더 잘 알 테니까. 그리고, 이주 비용은 별도로 지급한다고 하고, 집도 최소한 1년간 월세는 우리가 부담한다고 하세요.”
“그런 조건이면 고용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실력보다 인성과 신용이 있어야 합니다. 어차피 투자 결정은 내가 할 것이니까, 실력은 있어도 인성이 좋지 않은 사람은 필요 없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번호 저장하세요. 내 변호사인 제프리 장의 전화번호에요. 회사 설립에 필요한 일은 제프리와 상의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 정말 잘해 봅시다!”
“네, 보스!”
다음날, 뉴욕에서의 사람 쇼핑을 마치고 LA로 돌아왔다.
“얼마에요?”
“옵션 하나도 적용하지 않으면 10만 5천 달러인데요, 아시다시피 포르쉐는 깡통으로 탈 수 있는 차가 아닙니다. 이 포르쉐 911 카레라 4S는 옵션 포함하면 16만 2천 달러입니다.”
“생각보다 싼데요? 한국에서는 더 비싸다고 들었는데?”
“하하하! 지구상의 모든 차는 미국에서 가장 저렴합니다. 가장 큰 시장이고, 가장 경쟁이 치열한 시장이니까요. 이 차를 만든 독일에서도 기본 가격이 14만 달러 이상을 줘야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한국은 의외로 싼 편이네요.”
“아하, 그렇군요.”
내 앞에 놓인 쭉 빠진 포르쉐 911 카레라 4S.
포르쉐 특유의 풍만한 엉덩이가 나를 유혹하였다.
게다가, 카레라 4S가 한국 돈으로 기본이 1억 1,000만 원 정도밖에 안 한다고 한다.
검색해보니 한국에서는 1억 4천이 넘는데?
자동차 천국 미국의 위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이거 하나 주세요.”
“하하하!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고객님!”
이제 나를 위하여도 돈을 쓰자.
제프리의 말처럼 나 같은 슈퍼리치가 휸다이 그랜저를 타고 다니는 것도 웃기는 일이고 궁상이니까.
현실적인(?) 드림카 포르쉐 911 카레라 4S를 데일리카 용도로 구입하고, 페라리 매장에도 들렀다.
“현재 페라리의 기함입니다. F12 베를리네타! 멋지지 않습니까?”
딜러가 말하지 않아도 멋지다 못해 황홀할 지경이다.
“죽이는군요!”
“으하하! 자연 흡기 직분사 방식의 6.3L V12 엔진은 최고 740마력까지 낼 수 있지요!”
“오오오! 훌륭합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마에요?”
“단돈 65만 달러! 옵션 적용가입니다!”
“싸구나!”
“그렇지요?”
“이거 하나 주세요!”
“얍!”
즐거운 쇼핑을 마치자, 같이 다니던 조지에게 좀 미안하였다.
“조지야”
“응, 알렉스”
“네 차 낡았던데, 너도 한 대 사. 내가 사줄게”
“진짜?”
“그럼 가짜냐? 내 비서실장이자 최후의 경호원에게 차 한 대 못 사줄까?”
“오오! 음? 비서실장은 알겠는데, 최후의 경호원은 뭐야?”
“신경 쓰지 마. 그냥 한 말이니까”
“그런 것 같지가 않은데?”
“싫으면 말고?”
“아냐, 아냐! 흐흐흐!”
그렇게 해서 간 곳은.
“뭐, 뭐냐? 이 거대한 짐차는?”
“짐차라니? 우리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차인데?”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크잖아?”
“미국 남자라면 이 정도는 타야지?”
“...”
내 눈앞의 거대한 픽업트럭.
포드 F-150 랩터 4도어 크루캡이다.
그런데, 커도 너무 컸다.
한국에서는 일반 주차 자리에는 들어가지도 않을 정도로.
이런 차가 미국 국민차라고?
하여간 미국놈들 큰 거 좋아하는 거 알아주어야 했다.
가격은 5만 8천 달러인데, 그 자리에서 사주니 조지가 좋아서 죽으려고 했다.
나 참, 이런 짐차가 대체 뭐가 좋다고?
즐거운 쇼핑을 마치고, 저녁에는 제프리를 만나러 다운타운으로 나갔다.
“호오? 페라리 샀어? 그것도 기함 같은데?”
“흐흐흐! 나를 위해서도 좀 썼지요.”
“잘했다. 나는 솔직히 워런 버핏이 궁상떨면서 사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검소한 것도 좋지만, 그 정도 역대급 부자라면 어느 정도는 써야지 말이야?”
“하하하! 맞는 말이에요.”
제프리와는 통화만 자주 하였지, 만난 것은 오랜만이다.
즐겁게 저녁을 먹으면서 술도 제법 하였다.
“아, 참! 제프리, 나 물어볼 것이 있는데, 한국의 김진호라는 양반은 뭐하던 사람이에요? 누가 부장이라고 하던데? 설마 회사 부장은 아닐 터이고?”
“누구? 김 변호사? 푸하하! 당연히 회사 부장은 아니지”
“그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부장 출신이야. 흔히 대검 중수부장이라고 하지”
“아! 그래서, 부장이라고 하였구나? 그 자리가 그렇게 힘이 센 자리에요?”
“그럼? 말이라고 하냐? 지금은 2년 전에 한국 정권이 바뀌면서 부서 자체가 폐지되었지만, 한국에서는 그야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곳이 대검 중수부였어. 거기 대빵인 중수부장은 검찰 내에서도 빅4라 불리던 요직이었고.”
“후아? 어마어마한 양반이었네요?”
생각보다 더 엄청난 사람이었네?
“김진호 변호사는 그중에서도 굉장히 오래 있었고, 검찰 내에서의 영향력도 엄청난 양반이지”
“그랬군요. 어쩐지···. 그런데, 그런 사람하고도 인연이 있어요?”
“그 양반이 내게 몇 번 신세를 졌어. 그러면서 친해지기도 하였었고. 하여간, 그 양반이 내가 하는 부탁 3개를 무조건 들어준다고 했는데, 네가 그중에서 하나를 쓴 거야”
“아!”
어쩐지 열심히 도와주더라니.
이거 제프리에게 미안한데?
그런 양반이 들어준다는 부탁 3개 중의 하나를 내가 써버린 것이다.
김 변호사 입장에서는 아주 쉽게 신세 하나를 갚은 셈이고.
“이거 미안해서 어쩌죠? 그런 줄 알았으면 차라리 다른 방법을 찾은 것인데···.”
“됐어, 인마. 말이 2개 남은 것이지, 김 변호사가 은퇴하기 전에는 앞으로도 내 신세를 질 수밖에 없으니까”
“흐흐, 그럼 다행이구요.”
“그것보다 너, 존 스미스란 친구 괜찮겠어?”
“왜요?”
“왜요는 무슨 왜요야? 그 친구 약쟁이였던데?”
“음?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기는? 내가 누구냐? 전화 한 통이면 그 집 숟가락 몇 개인지도 알 수 있는데?”
“헐···.”
“헐이고 할이고 간에 정말 괜찮겠어? 그 친구 나도 확인해 보니까, 지금은 확실히 약을 끊었는데, 약쟁이가 약을 끊는 것은 도박꾼이 도박을 끊는 것보다 더 어려운 법이다. 언제 다시 마약에 손을 댈지는 모른다고?”
“나도 고민을 많이 했는데, 믿는 구석이 있어서 선택한 거예요.”
오직 염주만 믿을 뿐이다.
“그렇다면 모르겠는데, 하여간 조심해. 늘 살펴보고”
“그래서, 아예 우리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그건 잘했다.”
약쟁이에 대한 인식이 이렇다.
하지만, 그걸 뭐라 할 수 없는 것이, 그만큼 끊기 힘든 것이 마약이니까.
왼 손목에 채워진 염주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내가 LA로 돌아온 지 8일이 지났을 때, 존이 두 사람과 함께 LA 우리 집으로 왔다.
제니퍼 존스라는 30대 초반의 아가씨와 로이 클라크라는 30대 중반의 남자와 함께.
“모두 환영합니다!”
이제 시작이다.
돈을 긁어모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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