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실패라는 선택지는 없습니다(Failure is not an option).
무바달라와의 주식 인수 계약은 다음 날인 9월 25일 장 마감 후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제 내가 AMD의 최대 주주가 된 것이다.
“괜찮겠냐? 여기 소문이 굉장히 좋지 않던데?”
계약을 마치고 나오면서 우리 측 변호사로 참여하였던 제프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제프리도 아는 것이다.
AMD가 관짝에 못질만 하기를 기다리는 회사인 것을.
“No Risk, No Gain!”
“야! 그 리스크가 어느 정도야 말이지? 진짜 괜찮은 거야?”
“다 생각이 있어서 한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생각은 염주가 하였지만 말이다.
“존이 그러던데 네가 밀어붙인 거라며?”
“존이 그래요?”
“이틀 전인가 내게 전화가 왔었어. 법률 자문도 구하면서 푸념도 하더라고”
“하하! 지금은 다르잖아요? 아까 표정 못 봤어요?”
“그러고 보니 그러네? 생기가 넘치기는 하더라. 이틀 만에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뭐, 처음에는 격렬하게 반대하다가, 본인이 이거저거 알아봤나 보더라구요. AMD 대표도 만나보고.”
“리사 수?”
“네, 잘 아세요?”
“캘리포니아 투자계에서 그 여자 모르면 간첩일걸? 3년 전에 AMD로 합류할 때부터 화제가 만발하였으니까”
“그래요?”
“작년에 사장에 취임하기 전까지는 일반인은 몰랐겠지만, 전형적인 천재라고나 할까? 이전에 본 적도 있어. 어느 파티더라? 하여간, 수더분한 차림에 인상이 참 좋았었지. 하여간 AMD가 지난 몇 년을 더 버틴 것도 닥터 수 덕분이라는 의견이 정설이고.”
은근히 독설가 기질이 다분한 제프리가 이 정도로 말하면 대단한 칭찬이다.
역시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것일까?
이보세요, 제프리. 당신도 만만치 않다고?
“하여간 AMD는 다시 살아날 거니까, 두고 보세요. 그렇게나 반대하던 존도 리사 수와 만나고 나서는 완전히 태도가 180도로 바뀌더라고요.”
“글쎄, 존이 능력은 확실히 있는 친구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의견을 묻는다면 이 정도에서 멈추는 것을 권장하겠다. 유상증자까지는 안 갔으면 싶어”
“흐음···.”
“네 말대로 크게 먹으려면 모험도 해야겠지만, AMD는 너무 위험해. 네 재산의 30% 이상을 때려 박기에는 지나치다는 거지. 게다가 짐 켈러도 떠나는 마당에 말이야.”
“짐 켈러가 계약 만료로 떠나는 것은 나도 존에게 들었는데, 그가 그렇게나 대단한 인물이에요?”
“좀 전에 닥터 수를 천재라고 하였지?”
“네”
“그거 몇 배쯤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멀티 코어 프로세서의 아버지라고 불린다더라. 지금 개발이 끝나가는 AMD의 차기작도 그 양반 작품이라고 하고”
“...”
무슨 놈의 천재가 이리도 많나?
나 같은 범재는 서러워서 살겠나?
“지금 AMD 주가가 여름부터 1점대 방어율을 자랑하는 것도 그 양반이 떠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야. AMD 측에서는 할 일을 다 마치고 가는 거라고 우기지만”
“일단 내일 리사 수를 만나기로 하였으니까, 그러고 나서 말씀드릴게요.”
“닥터 수를 만나기로 했어?”
“당연한 거 아니에요? 거액을 투자하는데, 투자하게 만든 사람 얼굴은 봐야지요. 내일 점심을 같이하기로 하였으니까, 끝나고 바로 전화 드릴게요.”
“그래라. 나도 같이하고는 싶지만, 난 내일 거물과 골프 약속이 있어서”
“하하! 알겠습니다.”
다음날, 주말인 토요일이지만 리사 수를 만나기 위하여 오전 10시 전에 집에서 나왔다.
AMD 본사가 있는 곳은 산타클라라로 샌프란시스코 남쪽에 있다고 한다.
아쉬운 쪽은 당연히 리사 수이니 그녀가 이쪽으로 오는 것이 맞겠지만, 나는 회사 구경도 하고 싶어서 우리가 가자고 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엄청나게 후회하였지만.
“뭐요? 몇 마일?”
“여기서 산타클라라까지는 350마일 정도입니다.”
“350마일이면 대체 몇 킬로미터에요?”
“대략 560km가 넘을 겁니다.”
“아니 뭐가 그리 뭡니까? 나는 무슨 옆 동네 말하듯이 해서 바로 옆 동네인 줄 알았는데?”
“미국에서는 옆 동네가 맞습니다, 보스”
“...”
대단한 미국이다.
560km가 옆 동네야?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400km인데?
“그, 그럼 거길 차를 몰고 가야 하는 거예요? 한 6시간은 걸릴 텐데?”
“하하하! 그럴 리가 있습니까? 보통은 차를 몰고 가지만, 보스는 슈퍼리치잖습니까? 아니 꼭 부자가 아니더라도 웬만하면 비즈니스로 이동할 때는 비행기로 이동합니다. 어떤 비행기로 가느냐에 차이가 있겠지만요.”
“휴우, 다행이군요.”
그렇게 해서 전세기를 타고 산타클라라 인근의 비행장에 도착하자 AMD 측에서 리무진을 대기 시켜 놓았다.
오늘의 유상증자건 협상 이전에 나는 어제부로 이미 AMD의 대주주이니, AMD에서도 신경을 쓴 것이다.
잠시 후, 산타클라라 어거스틴 드라이브에 소재한 AMD 본사에 도착하여 사전에 요청한 대로 본사 견학을 하였다.
주말임에도 의외로 많은 직원이 출근하였는데, 다 죽어가는 회사답지 않게 의외로 표정이 밝은 직원들의 얼굴에서 나는 희망을 보았다.
직원들은 확실히 지금은 어렵지만, 멀지 않아서 회사가 다시 살아날 것으로 확신하는 듯 보였기에 안심이 되었다.
“어서 오세요, 미스터 스미스”
대표실로 안내되자, 정말 수더분한 인상의 아시아계 아줌마가 반갑게 우리를 맞아 주었다.
의외로 키가 커서 놀랐는데, 입술을 굳게 다물고 웃는 표정이 묘하다.
“하하! 이거 며칠 사이로 자주 뵙습니다, 닥터 수. 인사하시지요. 우리 카르마 인베스트먼트의 대표이신 알렉스 강이십니다.”
“이렇게 우리 회사를 구원하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스터 강”
“반갑습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프레지던트···.”
“저기 보스. 닥터, 닥터입니다.”
프레지던트라고 부르려는데, 존이 황급히 내 귀에 닥터로 부르라고 속삭였다.
응? 닥터?
“아, 닥터 수. 반갑습니다.”
이런 것은 좀 미리 알려주던가?
미국인들은 박사 학위를 받으면 대단한 영예로 알고, 그렇게 불러주길 원한다고 하더니만, 리사 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한국에서 박사?
석사 위에 박사라는 의미 정도?
“호호호! 편하게 부르시면 됩니다. 그래도 닥터라고 불러주는 것을 좋아합니다만”
“하하! 알겠습니다, 닥터 수”
“성이 강이면, 혹시 한국계인가요?”
“네, 맞습니다. 정확히는 한국계가 아니라, 한국인입니다.”
“아! 그렇군요.”
“닥터 수는 대만계로 알고 있습니다만?”
“대만에서 태어났지만, 대만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답니다. 3살 때 미국에 이민을 왔거든요.”
“아하, 그러시군요.”
그냥 미국인으로 봐달라는 의미인가?
나야 상관없지만.
그렇게 회사에 대한 인상이라던가 같은 한담을 잠시 나누다가, 식사하러 나왔다.
“식사는 입맛에 맞으셨어요?”
“뭐, 괜찮았습니다.”
“호호! 별로이신 것 같은 표정인데요? 사실 저도 이 식당은 처음이에요.”
“네?”
“저는 평소에는 캘리포니아에 있지 않습니다. 텍사스의 오스틴 연구소에 있지요.”
“아!”
CEO가 본사에 있지 않고 연구소에 처박혀 있어?
한국이라면 이상하지만, 원래 이런 여자 같았다.
“닥터 수, 짐 켈러가 떠난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다음 세대 제품을 개발하는 것에는 지장이 없는 건가요?”
“정말 짐이 떠나는 문제로 말들이 많은데요, 짐이 할 일은 다 하고 가는 거예요. 새 제품의 출시와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말씀드립니다.”
“그래요?”
그리고 시작된 그녀의 열변.
“저는 모바일 기기가 아니라 수천 개, 혹은 수만 개를 넘어선 수억 개 이상의 디바이스 기기 개수에서 쏟아지는 데이터에서 미래를 보았습니다.”
“오오!”
“아직은 그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이용할 능력이 부족한데, 이는 곧 고성능으로 처리할 컴퓨팅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에요.”
“그렇군요!”
“결국은, 데이터를 처리할 서버가 필요할 것이고 서버의 핵심은 CPU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CPU를 개발하는데 회사의 운명을 걸고 투자하였습니다.”
“판타스틱! 훌륭합니다!”
이 여자, 사람을 빠지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기술에 대한 놀라운 재능과 열정.
어째서 존이 한번 보고서 리사 수의 팬이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닥터 수,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네, 편하게 물으세요.”
“실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겁니까?”
“제가 늘 하는 말로 답변을 대신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실패라는 선택지는 없습니다(Failure is not an option).”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유상증자, 우리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스터 강! 후회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환하게 웃는 그녀와 악수를 한 후에 다시 물었다.
“그런데, 닥터 수. 유상증자하는 것에 걸림돌은 없겠습니까? 기존 주주들의 반발이 있을 것 같기도 한데요?”
다 죽어가는 회사에 인공호흡기를 몰려주는 유상증자다.
게다가, 제삼자 배정 방식이라 안 그래도 똥주인 AMD의 주당 가치는 더 떨어지고 주가는 폭락할 것이다.
“흥! 반발하려면 하라지요. 사장이자 CEO로서 주가를 부양할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AMD 상황은 죽느냐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일일이 주가에 울고 웃을 주주들에게까지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에요. 그걸 못 버티고 떨어져 나가는 것도 그들의 선택이고, 나중에 대단히 후회할 겁니다.”
“하하하! 꼭 후회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호호호! 그렇게 될 겁니다.”
리사 수와는 원칙적으로 가능한 이른 시일 내에 증자하기로 합의하고, 실무적인 것은 따로 월요일부터 협상하는 것으로 하여 상담을 끝냈다.
그리고, 월요일부터 존이 주장으로 나서고 제프리가 지원하여 협상이 시작되었다.
당연히 관건은 주당 얼마로 할 것인가? 였는데, 우리는 망해가는 회사에 투자하는 점을 내세워서 주당 0.7달러를 요구하였고, AMD에서는 그런 후려치는 용납할 수 없다고 하여 1.4달러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원래는 보통 증자일로부터 3일 전이나 5일 전의 주가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는데, 사실상 도박이나 다름없는 투자에 이런 공식을 쓸 수는 없는 거였다.
그 와중에 월요일인 9월 28일의 종가는 더 떨어져서 1.66달러를 기록하였고.
결국은 리사 수가 나서서 1달러로 인수하는 것으로 합의가 되었다.
애초에 우리가 목표로 하던 가격이다.
1달러에 1억 5천만 주를 발행하여 우리가 인수하니, 우리 지분은 30%에 육박하게 되었다.
존의 말로는 증자하면서 주당 지분율이 야간 희석되어 그렇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AMD에 투자한 자금은 총 2억 9,200만 달러.
존과 추가로 약속한 3억 5,000만 달러에는 아직 5,800만 달러가 남았다.
“5,800만 달러는 다른 곳에 쓸까요?”
“보스, 그건 아니지요?”
“어? 그러면?”
“금요일 장 마감 후에 증자가 발표되었으니, 월요일은 지옥이 열릴 겁니다. 당분간은 계속이고요. 그때 쓰시면 됩니다.”
“오오!!”
아니나, 다를까?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투자회사에서 유상증자하였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AMD 주가는 폭락하였다.
그것을 존은 솜씨 좋게 줍줍하였고.
지옥의 주가 끝난 금요일 저녁.
“5,800만 달러 모두 소진하였습니다, 보스”
“오! 어떻게 되었어요?”
“주당 평균 0.65달러로 매입하였습니다. 그래서 추가로 확보한 지분은 8.5%! 축하합니다, 보스! 이제 보스는 AMD의 38% 대주주로 사실상 AMD의 오너가 되셨습니다!”
“하하하!”
“하하하!”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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