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저쪽에서는 잊지 않은 것 같습니다.
똑똑!
“네, 어떻게 오셨어요?”
교수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자, 이쁘장하게 생긴 조교가 맞아 주었다.
교수실은 대법관 출신이라 석좌교수여서 그런지, 제법 작지는 않아 보였다.
“강철식이라고 하는데요, 교수님과 약속이 되어서 왔습니다.”
“아! 오후 2시에 알렉스 강이라고 하시는 분 맞으세요?”
“네, 제가 알렉스 강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시겠어요? 교수님 통화 중이시거든요?”
“네, 그러지요.”
“차는 어떤 것으로 드시겠어요?”
“시원한!”
“시원한?”
“냉수면 됩니다.”
“호호호! 아이, 참! 마침 주스도 떨어졌는데, 깜짝 놀랐잖아요?”
“흐흐흐!”
내가 슬슬 나이를 먹는 건가?
이제 서른둘밖에 안되었는데, 대략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조교가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었다.
하아! 그러고 보니 연주 그 기집애와 짜지고 나서는 내리 독수공방이었구나.
제니퍼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와서 놀면서 몇 번 신호를 주었지만, 이상하게도 성적으로만 끌렸지 사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엔조이만 하자고 하기는 좀 부끄러웠고, 제니퍼 친구들은 대충 내 재력을 알고 있었기에 혹시라도 꽃뱀에 물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있어서 그냥 친구로만 지냈다.
하여간 이게 문제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아도 모든 여자가 나라는 사람에 끌리기보다는 내 돈에 끌리는 것으로 의심부터 하게 되니까.
제기랄!
연주와는 정말 속궁합도 완벽하게 맞고 좋았는데.
뜬금없이 연주와의 뜨거웠던 밤이 생각나서 내 웅장한 소중이에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고, 복지 재단 상담하러 와서 이게 무슨 병신 같은···.
“손님, 교수님 통화 끝나셨어요.”
“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손님? 교수님 기다리시는데요?”
“...”
누가 그걸 모르냐?
지금 일어설 수 없으니까 그렇지?
급하게 스마트폰을 꺼내서 깨톡이 온 것처럼 부산을 떨다가 간신히 가라앉히고 일어날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강철식이라고 합니다, 교수님”
“오! 반가워요. 동철이가 말한 알렉스 강이시라고?”
장영동 교수는 일어나서 반갑게 맞아 주었는데, 한눈에 봐도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닌 분처럼 보였다.
대법원 판사, 그러니까 대법관 6년의 임기를 마친 것이 재작년이라고 들었는데, 꼿꼿함이라고나 할까?
하여간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거 같지 않을 분위기가 배여 있었다.
그나마, 눈매는 웃고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그런데, 동철이는 누구?
“내, 제가 알렉스 강입니다. 그냥 여기는 한국이니까 편하시게 강철식으로 불러주세요.”
“하하! 그러면 미국에서 사업을 크게 하신다고 들었으니, 강 대표라고 하겠습니다.”
“네, 편하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동철이가 누구신지?”
“아! 동철이가 자기 한국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구나. 제 오촌 조카 제프리 장의 한국 이름이 장동철이에요.”
“푸웁!”
장동철?
이름이 좀 그런데?
아니 그나마 성이 장 씨라 다행인가?
김 씨였으면 금동철도 되었겠다.
하여간 그래서 한국 이름을 알려달라고 해도 입을 꾹 다물었었구나.
“허허! 동철이가 자기 한국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모른 척하세요.”
“하하하! 알겠습니다.”
어쨌든 동철이 형 이름 때문에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래요, 동철이 말로는 무슨 좋은 일을 하고 싶으시다고요?”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실 어찌하다가 보니 이미 시작은 하였습니다.”
나는 대략 양혜원에 관련된 일을 적당한 수준에서 설명하여 주었다.
“오오! 정말 좋은 일을 하십니다! 하하하!”
“뭐, 부끄럽습니다. 그저 면피 수준이지요.”
“그러면, 제가 도울 일이 뭐가 있습니까? 특별히 내가 필요할 것 같지는 않은데?”
“일을 좀 본격적으로 해보려고 합니다.”
“본격적이라니요? 지금도 100억 이상이 들어갔으면 엄청나 보이는데?”
“이번에 새로 옮긴 보육원을 들러보니까, 제일 취약한 부분이 보였습니다.”
“어떤 부분을 말씀하는 겁니까?”
“일단, 영유아부터 만 18세 미만의 아동까지는 소위 시설에 따라서 환경이 다르겠지만, 어떻게든 최소한의 생활은 가능했습니다. 기본적으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먹고 사는 것은 해결해 주니까요. 그야말로 열악한 수준이기는 합니다만”
그야말로 최소한이다.
우리나라가 그동안 노인이나 장애인 복지는 많이 좋아졌지만, 아동은 거의 제자리걸음이라고 하였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박하게 지원이 나오는 피복비 같은 경우는 민간의 후원이 없으면 상당히 곤란해진다.
그래서, 차라리 중학교에 들어가면 교복비는 나오니까 낫다고.
어쨌거나, 시설에 있는 이상, 최소한의 생활은 가능하다는 말이다.
“흐음, 그렇군요.”
“그런데, 문제는 만 18세가 되어 ‘보호종료아동’이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고등학교 졸업하면 나가라는 말이죠. 일시금 500만 원 정도 하고 3년인가 매달 나오는 푼돈과 운이 좋으면 무슨 디딤 통장이니 뭐니 해서 잘하면 돈 1,000만 원 정도 더 받는 경우도 있다고는 합니다만”
“하아, 알고 있던 문제입니다. 법원에 오래 있다 보면 모를 수가 없으니까요. 아니, 알고 있는 문제가 아니라, 외면하였던 문제라고 하는 것이 바른 표현이겠습니다.”
“아니, 교수님?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그 돈 가지고 스무 살도 되지 않는 애들이 대체 어떻게 살라는 겁니까? 요즘 식당에서 된장찌개도 5,000원짜리는 없어요? 김밥해븐? 기본 야채 김밥에다가 라면 하나만 먹어도 거의 5,000원이 나옵니다. 이건 정말 너무하는 것 아닌가요?”
아이, 씨. 말하다 보니까 열이 받네.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매우 부끄러운 일이지요.”
“정말 저는 잘 몰랐습니다. 그래도 우리나라도 이젠 먹고살 만한 나라가 되었다고 생각하였고, 최소한 어떤 대책은 있을 거로 생각하였지요. 참 부끄럽습니다.”
솔직히 미국 로또 당첨되기 전에는 알았어도 내 코가 석 자였으니 방법은 없었겠지만.
“허허! 그래도 젊으신 분이 그런 생각을 하신다는 것이 어디입니까? 이 늙은이는 정말 부끄럽습니다. 명색이 대법관으로 장관급 대우를 받았던 사람이니까요.”
“우와! 대법관이 장관급이었어요?”
“...”
나는 정말 몰랐었던 사실이라 감탄하였던 것인데, 장영동 교수는 타박으로 들었는지, 살짝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죄송합니다. 진짜 몰라서 감탄했던 거니까, 오해는 말아 주세요.”
“험험,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당장 정부에서 보호종료아동에 대한 대책을 세워주었으면 좋겠지만, 저나 누군가가 그렇게 요청한다고 해서 당장 될 리도 없고, 된다고 하여도 오랜 시일이 걸릴 겁니다.”
“그건 저도 압니다. 그렇다고 매년 2,500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무방비로 냉정한 사회로 내동댕이 처지고 있는데, 그저 손가락이나 빨면서 바라만 볼 수는 없잖습니까?”
“그럼?”
“제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려고 합니다. 현실적으로 제가 그 많은 아이들을 전부 간수할 수는 없어요.”
“그야 그렇지요.”
“하지만 적어도 시작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당장 내가 살았던 서울 은평구나, 내가 직장을 다녔던 금천구의 아이들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한발 한발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더 많은 아이들을 보호할 수도 있을 것이고, 정부에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겠습니까?”
“훌륭합니다! 진심으로 제가 부끄러워지는군요!”
장영동 교수는 정말 내 말에 감동을 받았는지, 얼굴까지 살짝 상기가 되었다.
“과찬이십니다.”
“그래요, 그렇게 훌륭한 일에 제가 할 일이 뭐가 있을까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저도 뭐든지 하겠습니다. 하다못해 아직 몸은 건강하니, 가서 청소 자원봉사라도 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우선, 제가 인연이 있는 보육원이 박달동 군대 옆으로 이전하였는데, 거기가 의외로 환경이 좋았습니다.”
“아니, 군부대 옆인데 환경이 좋습니까?”
“거기가 국방부 소속 회사가 있거든요?”
“회사? 국방부 소속 회사라니···. 아! 그 회사? 하하하! 맞습니다. 제가 근무하던 서초동 대법원 옆에 있다가 그쪽으로 이사를 하였지요?”“네, 그래서 일반 군부대가 아니다 보니, 환경이 나쁘지 않습니다.”
“그래도 왜 하필?”
“주민들 반대가 적으니까요.”
“그, 그렇군요. 하아! 법까지 만들어서 반대를 못 하게 하는데도 그거참···.”
엉?
그런 법이 있었어?
“네? 그런 법이 있어요?”
“네, 있습니다. 사회복지사업법 제6조 1항에 누구든지 정당한 이유 없이 사회복지시설의 설치를 방해하여서는 아니 된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에이, 그러면 뭐합니까? 지자체장들이 주민 눈치 보고 방해할 텐데요?”
“그래서 2항에는 시장ㆍ군수ㆍ구청장은 정당한 이유 없이 사회복지시설의 설치를 지연시키거나 제한하는 조치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되어있지요. 하지만, 법은 멀고 주먹이 아니라 민원이 가까운 것이 현실이지요.”
“허어···.”
할 말이 없다.
“하여간 그래서요?”
“험, 우리 보육원 옆에 땅이 제법 넓습니다. 한 1,500평? 제 첫 삽을···. 아니, 두 번째 삽인가? 하여간 보호종료아동에 대한 지원 사업을 그 땅에서 시작하고 싶습니다. 거기다가 보호종료아동들이 제대로 준비하여 사회로 나갈 수 있도록 기거하는 시설을 짓고 싶습니다.”
“훌륭합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 겁니까?”
“문제는 거기가 국방부 땅이라는 거지요.”
“호오? 그래요?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네? 뭐가 좋은 겁니까?”
“하하하! 사회복지법인은 관련한 시설을 설치하기 위하여 국유. 공유 재산에 대하여 우선하여 매각이나 임차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아동복지시설은 무상 임차도 가능합니다.”
“오오오! 그런 좋은 법이 있다니?”
“좋은 법은 의외로 많습니다. 그걸 사람들이 모르거나 악용하거나 오용하니 문제이지요.”
장영동 교수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하긴, 대법관 출신으로 많이 아픈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군요.”
“자! 그러면 제가 할 일이 국방부로부터 최대한 저렴하게 그 땅을 뜯어내는 것이겠군요?”
“하하하! 맞습니다. 최대한 저렴하게 매입할수록 더 많은 아이들이 보호받을 수 있을 겁니다.”
“이거, 오랜만에 전의가 타오르는군요. 알겠습니다! 이 장영동이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이 양반을 만난 것은 큰 행운 같았다.
아니, 제프리를 만난 것이 행운인가?
“또 제가 할 일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뭔가요?”
“제가 이참에 일단은 복지법인?”
“사회복지법인이라고 합니다.”
“아, 네. 그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하여 제대로 해볼 생각입니다. 재원은 100% 제가 투척할 것이고요. 일단은 200억으로 시작해서 매년 그 이상의 자금을 댈 생각입니다.”
“오오! 그렇게나 많은 돈을요?”
“이건 어디까지나 일단입니다. 내년에는 최소한 500억 이상은 내놓을 생각이니까요.”
염주만 믿는다.
“오오오오! 훌륭합니다! 훌륭해요! 그러면 또 뭐가 문제입니까?”
“발로 뛰는 것은 우리 아버지가 할 겁니다. 자금의 실질적인 관리와 지출도 아버지가 할 것이고요. 워낙 누가 어려운 것을 못 보는 분이시라, 적성에도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대기업도 다니셨고, 사업도 오래 하셨기 때문에 일은 잘하실 테지만, 워낙 호인이시라 대표를 맡기기에는 불안합니다. 그리고, 저는 사회복지법인을 보호종료아동에게만 국한할 생각도 없습니다. 몇 년 후에는 국가가 미처 보살피지 못하는 더 많은 사람을 지원할 생각이니까요.”
“흐음, 훌륭합니다! 그래서요?”
“그러다 보면 명망이 있고 능력이 있는 분이 대표를 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
“네?”
“우리 사회복지법인의 대표를 맡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대표를요? 아니 저를 어떻게 믿고서요?”
“대법관 출신이시잖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동철이 형을 믿습니다.”
“...”
너무 의외였는지, 장영동 교수는 잠시 말을 못 하였다.
“허어···.”
“혹시 곤란하십니까? 직위와 직책에 맞는 급여는 나갈 것이니, 그런 문제라면···.”
“노노! 절대로 아닙니다. 동철이가 말하지 않은 모양인데, 선친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있어서 저도 제법 부자입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고 판사 생활을 할 수도 있었고요.”
“아! 죄송합니다.”
“제 처우라면 한 푼도 받지 않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사회복지법인의 대표는 상근직이어야 해서요. 결론은 제가 교수직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아, 이런···.”
이건 낭패다.
아빠가 워낙 호인이라 불안해서, 두 분이 끌고 가는 모양을 만들려고 하였는데.
“흐음···.”
“그럼 고문직이라도?”
“아닙니다! 교수야 제가 아니라도 할 사람이 많지만, 이거는 그렇지 않잖습니까? 기회를 주신다면 제가 꼭 해보고 싶습니다!”
“오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하!”
“제가 감사하지요? 하하하!”
이로써 이 건은 해결되었구나.
다행이다, 다행이야.
띠리리링! 띠리리링!
“응?”
“아, 전화가 온 모양입니다? 받으세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무음으로 하고 들어온다는 것이···.”
“하하하! 아닙니다. 편하게 받으세요.”
“그럼 실례”
번호를 보니 모르는 번호인데?
“네, 강철식입니다.”
- 네, 강철식 대표님입니까?
“네, 맞습니다만?”
- 안녕하십니까? 저는 코리안 항공 고객대응팀 팀장 조갑춘이라고 합니다.
“예? 그런데요?”
- 저기, 우선 지난번 비행에서 불편함을 끼쳐 드린 점에 대하여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승무원들을 도와서 협조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아, 네. 아이, 되었습니다. 그냥 잊기로 하였으니까, 더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 아니 저기! 대표님!
“아, 왜요? 지금 손님하고 있는데?”
- 저기, 그게···. 죄송합니다만, 대표님께서는 잊기로 하셨지만, 저쪽에서는 잊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엥? 무슨 소리예요? 저쪽이라니?”
- 정말 죄송합니다만, 대표님이 제압하신 승객이 우리 회사와 승무원들, 그리고 대표님을 상대로 고소하였습니다.
“뭐? 고소? 무슨 고소?”
- 대표님은 폭행 혐의로···.
“뭐! 그게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야! 아니, 코리안 항공 이거 뭐야! 기껏 도와주었더니, 고소나 당하게 만들어? 아! 난 모르니까, 나 끼우지 말고 당신들이 알아서 해!”
- 아흑, 저기 대표님! 이게 그리 간단한 사안이 아닙니다! 저쪽에서 우리나라 4대 법무법인인 세정 법무법인에다 사건을 맡겨서 변호인단을 구성하였습니다! 이거 쉽게 보시면 안 됩니다!
“뭐? 세정 법무법인? 변호인단?”
와! 이거 어처구니가 없네?
나의 그런 모습은 장영동 교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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