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좀 조용히 살자.
그날 저녁, 미국의 제프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 알렉스?
“여! 동철이 형! 푸흐흐!”
- ...
제프리의 당황함이 전화선을 타고 내게 전해져서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자신만만한 그 제프리 장이 당황하는 거였으니까.
- 알렉스
“얍!”
- 한 번만 더 그 이름을 부르면 나랑 인연 끊겠다는 거로 알 거다.
이렇게 한국 이름이 싫었던 건가?
하여간 한 번 놀렸으면 되었다.
이런 거로 제프리 같이 유능한 사람을 놓칠 수는 없지.
“에이, 농담도 못 해요?”
- 하지 마!
“예···. 그건 그런 웬일이세요?”
- 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무슨 짓이라니?”
- 몰랐어? 너 미국 방송에 뜨고 있는 거? 유튜브에도 깔리고?
무슨 소리여? 이게?
“내, 내가 방송에 나오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 너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난동 피우는 승객을 한방에 잠재웠잖아?
“그걸 어떻게? 아니 그리고 그런 소소한 일이 왜 미국 방송에 나오는데요?”
- 야! 같이 있던 인물이 리처드 막스잖아? 그 정도 되는 팝스타가 관련되었으면 미국에서도 큰 이슈라고?
“그 양반이 그렇게나 유명해요? 한물간 팝스타 아니야?”
- 이게 미쳤나? 한물이 가다니?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3번이나 하였고, 14개의 탑20 히트곡이 있으며, 7개의 싱글을 연속으로 탑5에 안에 들었던 거물을 한물이 갔다고 하다니? 미국에서는 저 정도 레벨이면 그냥 전설이야, 전설!
“...”
아, 망했다.
그냥 우리나라 흘러간 가요 스타 정도인 줄 알았는데.
“모자이크는? 모자이크는 해서 나왔겠지?”
- 미국에 그런 것이 어딨어? 네가 나쁜 놈으로 나오는 것도 아닌데?
“초상권은 어디에다가 국 끓여 먹은 겁니까?”
- 미국은 공공장소에서의 초상권은 잘 인정하지 않아. 그것도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않으면 더!
아, 미국이 싫어진다..
“내 얼굴 많이 나오나요?”
- 그나마 앵글이 흔들려서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몰라볼 거니까, 우는소리 그만하고 대체 무슨 일이야?
“아, 진짜 재수가 없으려니까”
나는 제프리에게 자초지종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였다.
- 허! 당숙이 정말 욕을 보셨네.
“그러게나 말이에요.”
- 너, 정말 운 좋은 줄 알아라. 한국에서는 함부로 주먹 쓰면 안 되는 거 몰랐어?
“에이, 아는데 열 받잖아요? 그리고 나도 나름대로 생각했다고요. 사무장 요청받아서 나선 거니까”
- 그나저나 그 여자 변호사 정말 미쳤네? 감히 고위 전관을 건드려? 한국에서?
“그게 그렇게나 죽을죄에요? 싸가지가 심하게 없기는 했지만?”
- 네가 잘 모르나 본데, 한국 법조계는 그냥 다 한통속이야. 어차피 태반이 서울대 아니냐? 위로 올라갈수록 더 심하고?
“글쵸”
- 요즘이야 로스쿨 생기고, 사법시험 세대도 막판에 1,000명씩 뽑아대고 하였으니까 그나마 덜하겠지만, 그래도 고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검찰이든 법원이든 다 서울대야, 서울대. 그런데 그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뭔 줄 아냐?
“뭔데요?”
- 공직 퇴임 변호사, 즉 전관이 모욕받는 것! 특히나 당숙 같은 대법관이나 박홍렬 변호사같이 고등법원 부장판사까지 올라간 사람들이 모욕을 받았다? 이건 자기가 모욕받은 것으로 생각할 거야. 언젠가는 자기들도 옷을 벗고 나가서 개업해야 하는 처지라 자기와 동일시 해버린다는 말이라고.
“아···.”
생각해 보니 그러네?
- 어쨌든 이번 사건의 제일 큰 피해자는 그 여자 변호사일 거다. 그 좁은 바닥에서 소문이야 금방 퍼질 것인데, 누가 좋아하겠냐? 여전히 중간 이상은 죄다 사법고시 출신들이 꽉 잡고 있는 한국 법조계에서, 로스쿨 출신 새끼 변호사 주제에 하늘 같은 대선배를 모욕하였으니, 쯧쯧!
“헐···.”
제프리의 말을 들으니 살짝 그 여자 변호사가 안타까웠지만, 어차피 자업자득이다.
장 교수님의 말처럼 그 여자는 내가 보기에도 기본적인 생각 자체가 글러 먹었으니까.
- 하여간 좀 조용히 살자. 너는 어떻게 된 것이 한국만 들어가면 무슨 일이 생기냐?
“...”
할 말이 없다.
다음날부터는 결국 우리나라 방송국들도 동영상과 함께 뉴스를 태우기 시작하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나라는 내 얼굴을 가려서 안심이었는데, 문제는 가족들이 알아버린 거지.
“응? 저, 저거 철식이 아니야?”
“어머! 그러네?”
모자이크 떡칠을 해도 누구 자식인데 못 알아볼까?
“너 저거 무슨 일야?”
“아유! 별일 아니에요. 미국에서 오는데 뒤에서 미친놈이 술 퍼마시고 난리를 쳐서 좀 도와주었어.”
“혹시 너에게 피해가 오는 것은 아니지?”
“걱정들 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조심해 이놈아! 네가 나이가 몇인데 주먹을 휘두르고 다녀?”
“아이! 사무장이 요청해서 그런 거라니까?”
피곤하다.
장 교수님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낮에 세정 대표 변호사가 사과하고 갔다고 한다.
그 여자 변호사는 바로 짤렸다고 하고.
시원하기는 하였지만, 대한민국 법조계의 폐쇄성을 들여다본 것 같아서 뒤끝이 좋지만은 않았다.
한번 대법관은 영원한 대법관이라는 소리였으니까.
무슨 해병대도 아니고.
“아빠!”
“왜?”
“나가서 소주나 한잔하시죠?”
“우리 둘만?”
“얍!”
“흐흐흐! 그거 좋지?”
이제 일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아빠보고 소주 한잔하자고 하였더니 엄청나게 좋아하신다.
이렇게 좋아하시는 줄 알았으면 진작 자주 마시자고 할걸.
“캬!”
“크으! 좋구나! 너랑 마시니까 더 좋은데? 으허허!”
시장 쪽으로 내려와서 오래된 노포 돼지갈빗집에서 양념 돼지갈비를 시켜서 먹는데, 어째 맛이 예전 같지는 않았지만, 아빠와 먹는다는 상징성으로 그럭저럭 커버하였다.
“아빠”
“말해봐. 너 할 말 있어서 먹자고 한 거 다 아니까”
“에이, 내가 아빠하고 꼭 할 말 있어야 먹나? 앞으로 내가 한국에 있을 때는 가끔 모실게요.”
“그럼 할 말이 없는 거냐?”
“아니, 그건 아니고”
“푸흐흐!”
“흐흐흐! 다른 것이 아니고, 내가 아빠가 할 일 알아본다고 했잖아?”
“어떻게 알아봤냐?”
벌써 눈빛부터 달라지는 아빠다.
어지간히 답답하셨나 보다.
“응, 알아봤다기보다는 만들어 놓았어.”
“만들다니? 내 자리를 만들어?”
“만들었지 뭐. 원래는 없던 자리니까?”
“야야! 어디다 부탁해서 없는 자리 만든 모양인데, 나 그럼 사양하련다. 이 나이에 눈칫밥 먹는 것은 아니지. 차라리, 내가 어디 경비 자리라도 알아볼게”
“아이, 아들 말 좀 끝까지 들어요. 내가 말이야, 이번에 사회복지법인을 만들려고 해요.”
“사회복지법인? 그 어려운 사람들 돕고 하는 거?”
“응”
“아니 사회복지법인이 막 그렇게 만들어도 되는 거냐? 돈은? 한 두 푼이 들어가는 것이 아닐 텐데?”
“내가 이번에 200억을 박을 거예요.”
“컥컥!”
아빠는 사레가 들린 듯이 갑자기 컥컥대었다.
“여기 물요.”
“응”
물을 마시고 정신을 차리려는 듯이 머릴 몇 번 흔들더니 황당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뭐? 너 지금 200억이라고 했냐?”
“응, 200억이라고 했어요. 1억이 200개인 200억!”
“그런 돈이 정말 있는 거야?”
“있으니까 한다고 하지?”
“네가 얼마나 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많은 돈을 사회복지법인에 박아도 되는 거야? 너 맨날 나보고 남들 퍼주다가 가족들 고생시킨다고 하더니만, 네가 그러는 거 아니냐고?”
“에이,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셔. 그래봤자 내 재산의 10분의 1도 안 돼”
정확히는 100분의 1도 안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필요는 없겠지.
아니, 그렇게 말했다가는 기절하실 것 같았다.
“처, 철식아! 시, 십 분의 일? 그런 네 재산이 지금 2,000억도 넘게 있다는 거야?”
“하아···. 그게 말이지”
어차피 장 교수를 만나면 내년에 500억을 추가로 낼 것이며, 앞으로도 매년 그 이상의 자금을 댈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좀 충격이 가더라도 아빠에게는 지금 어느 정도까지는 오픈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사실 그거보다 훨씬 많아요. 지난 1년간 미국에서의 투자가 잘 되었거든.”
“훠, 훨씬? 대체 얼마나 많길래 훨씬 씩이냐?”
“1조가 좀 넘어요.”
“끄어어억! 1조! 1조라니? 1,000억의 열 배 그 1조?”
“응, 그 1조가 맞아”
“...”
아빠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한 것 같았다.
그저 입을 떡 벌리고 나만 바라볼 뿐.
이럴 때는 술이 약이다.
“아빠! 술!”
“그렇지! 술! 술 먹고 정신 차려야!”
그렇다고 술 드시고 정신 차릴 것은 또 뭐냐?
정말 아무 말이나 막 하시는 것 같았다.
“일단 한잔!”
“어! 그래!”
“한잔 더 드셔요!”
“어! 그래!”
짝! 짝!
그렇게 넉 잔을 연거푸 드신 다음에야 잔을 내려놓고 양손으로 얼굴을 치셨다.
마치 제정신을 차리려고 하는 듯.
“허어!”
“이제 좀 정신이 들어요?”
“어, 이제 좀 살 거 같다. 대체 너, 내 자식이지만 엄청나구나? 아니, 어떻게 하면 그리 큰돈을 벌 수 있지?”
“미국이란 나라가 원래 그래요, 투자만 잘하면 몇 달 사이에도 몇십 배는 벌더라고? 그리고, 내가 의외로 투자에 소질이 있었고. 그게 전부야”
“허! 진짜, 이걸 어디 가서 말하면 미친놈 소릴 들을 거다.”
“큰일 날 말씀! 주변에 절대로 말씀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친척이고 뭐고 절대로 안 돼요?”
“알았다, 이 녀석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닐까 봐 그러냐? 그런데, 네 엄마에게도?”
“응, 그냥 엄마에게도 당분간은 말하지 않으려고. 지금도 충분히 행복한데, 굳이 내가 엄청난 재산이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아요. 말씀드린다고 엄마가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그래, 우린 지금 이 정도가 딱 좋다. 네가 번 돈이기도 하고 말이야.”
정말 우리 가족은 지금이 딱 좋았다.
큰 아파트에 차도 두 대나 있고, 먹고 싶은 것 먹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말이다.
괜히 내가 조 단위의 재산이 있다고 하여, 지금의 평온이 깨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나고, 가족은 가족이다.
물론, 내 전 재산보다도 더 소중하지만.
“하여간 그래서?”
“어쩌다가 인연이 되어서 내가 후원하는 보육원이 있어요.”
“그랬어? 참 잘했다, 잘했어. 그런데?”
“이게 후원하다 보니까, 정말 가엾은 아이들이 너무 많았어요. 처음부터 아예 그런 현실을 모르고 살았으면 모르겠는데, 눈에 보이는데 그냥은 못 지나가겠더라고?”
“흐흐흐!”
“아! 왜 웃어요?”
“천생 너는 내 새끼라는 생각이 들어서 웃었다. 어쩜 이 아빠하고 그리 닮았냐?”
“아오! 진짜! 난 그게 그렇게 싫었는데, 이상하게 나이를 먹을수록 더 아빠를 닮아가더라고?”
“그래서 임마, 씨도독질은 못하다고 하는 거다. 푸하하!”
“흐흐흐!”
정말 아빠의 퍼주기 신공이 그렇게 싫었는데, 나이 먹고 나서 어느 날 문득 내가 닮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 이제는 그러려니 하자.
정화 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아빠, 아니 어쩌면 할아버지 때부터의 공덕으로 인하여 염주가 내게 온 것이라고 하였으니까.
“하여간 그래서?”
“그래서 말이지···.”
나는 보육원을 후원하게 된 일, 그리고 보호 종료 아동을 위하여 일을 제대로 벌이기로 하였고 장영동 교수가 복지법인 대표를 맡기로 한 일까지 설명해 드렸다.
그리고, 아빠가 실질적으로는 발로 뛰면서 실무를 담당하셔야 할 거 같다는 말까지.
“철식아!”
“응?”
“나 그거 무조건 한다! 아니, 하고 싶다!
“딱 아빠 체질이지?”
“그럼! 하하하!”
“하하하!”
적당히 마시고 일어나서 집으로 걸어가는 길.
“철식아”
“왜요?”
“장하다, 내 새끼! 난 네가 너무 자랑스럽다. 네가 거부가 되어서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주변을 살펴보고 베풀 줄 아는 부자가 된 것이 너무 자랑스러워”
“에이, 쪽팔리게 대놓고 그런 말씀을 하시냐?”
“으하하!”
“하하하!”
참 좋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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