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회사 확 사버릴까?
뭐라고 대답하지?
환장하겠다.
재하 형은 나만 철석같이 믿고서 오매불망 내 연락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 너, 솔직히 말해 봐!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지? 그지?
“그게 말이지,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은···.”
- 너 그거 아냐?
“뭘?”
- 너 할 말 없으면 ‘그게 말이지’부터 시작하는 버릇이 있다는 거?
“...”
내가 그랬나?
하여간 재하 형은 쓸데없이 예리한 면이 있었다.
- 하아, 임마! 안 될 것 같으면 미리 말을 하던가? 그나마 베트남 괜찮은 곳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놓쳤잖아? 에이, 이젠 남은 것이 방글라인데, 거길 어떻게 가냐?
“...”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계속 면박만 계속 받고 있을 수는 없다.
일단 시간을 벌자.
“에이! 형! 잊어 먹기는 뭘 잊어 먹어? 다 생각하고 있었다고?”
- 뭐 임마? 뭔데? 생각한 것이 뭔데? 말해 봐?
“험험! 하여간 확실하지가 않아서 지금 밝히기는 곤란한데, 내가 다음 주에 한국에 들어가니까 그때 보고 이야기합시다. 나 지금 회의 중에 전화 받았거든? 내가 한국 가면서 전화할 테니까, 그리 알아요!”
- 야! 지금 미국 LA 시각이 밤 10신데 무슨 회의 같은 소릴 하고 있어!
제기랄, 그냥 좀 넘어갑시다.
“그만큼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하여간 다시 전화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요. 오케이?”
- 야! 야!
뚜뚜뚜!
뭐라고 외치는 재하 형의 전화를 끊어 버리고 맥주를 찾아서 들이켰다.
파워볼에 당첨되고 나서 이렇게 땀이 난 적은 처음이네.
생각을 하자, 생각을.
대체 재하 형을 어떻게 하지?
“아이, 씨! 괜히 입방정은 떨어 가지고···.”
어차피 재하 형은 가족 다음으로 친한 몇 안 되는 소중한 사람이라 내가 어떻게든 뭐라도 해주기는 해야 하는 양반인데, 지난번에는 너무 즉흥적으로 나불거렸던 것 같아서 후회가 되었다.
대체 나이 50이 다 되어가는 양반을 어디다 쓰냐고?
워낙 프로페셔널한 사람이라 뭐든 하기는 하겠지만, 그게 어디 그러냐고?
인제 와서 투자 공부를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그렇다고 그냥 내가 생계를 책임질 테니까 먹고 놀라고 해?
그런 소릴 했다가는 몇 대 쥐어박힐 것이다.
엄청나게 자존심이 강한 양반이니까.
조금 웃기는 이야기지만, 재하 형은 나름 명문대를 나온 사람이다.
몇 년 전까지 우리나라 대통령을 했던 양반이 나온 안암동에 소재한 고구려대 출신이니까.
그런 양반이 좋소기업에서 대체 뭐하냐고?
혹시 거기 출신이 아니라 조치원에 있는 분교 출신 아니냐고?
응, 아니다.
회사에서도 졸업증명서 받으면서 확인하였다고 하니까.
물론, 명문대 나왔다고 다 잘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일하는 모습을 보면 저 정도의 성실성에 꼼꼼함, 업무 처리 능력을 보면 도저히 이런 좋소기업에서 생산부장을 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한참 친해지고 나서 술을 먹으며 물어본 적이 있었다.
“부장님은 대체 어쩌다가 봉제 바닥에 들어온 거예요? 고구려대 출신이면 취업도 잘 되었을 텐데? 게다가 그땐 IMF 전이잖아요? 내가 듣기로는 수도권 4년제 경상계만 나와도 이름 들어본 대기업에 다 취업할 때라고 하던데요?”
“야!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냐? 살다 보니까 이리된 거지? 그리고 나 임마 대기업 공채 출신이야!”
“그런데요?”
“상사 계열로 입사하였는데,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봉제가 마지막으로 대규모로 하고 있을 때라 의류 수출이 굉장히 많았어. 그런데, 회사 방침이 제품을 알아야 한다고 해서 계열 의류 공장에 3개월간 연수를 받게 했지”
“그래서요?”
“그래서는 임마? 나는 이게 은근히 재밌더라고? 원사 단계에서부터 시작하여 원단을 만들고, 또 그 원단으로 염색 등의 가공을 하여 최종적으로 봉제하여 옷이 완성되는 과정이 말이야. 대기업에 입사하였는데 공장에나 처박는다고 도망가는 동기들도 많았는데 난 안 그랬어.”
“헐···.”
하필이면 우리나라에서는 봉제산업이 사양산업으로 분류되기 시작할 무렵에 콩깍지가 씐 것이다.
“처음에는 엄청나게 헤맸어. 너도 알다시피 봉제 용어가 좀 골때리냐? 미쓰마끼가 어쩌고 나나인찌, 가이룻바, 가다마이···.”
“크크큭! 알만합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잖아요?”
“인터넷이 뭐야? 이제 막 삐삐 차고 다니던 시절인데? 하여간 재미도 있고 해서 열심히 공부했지. 패션 관련과 교재도 보고, 없으면 원서도 구해서 보고. 그러다 보니 인정도 받아서 참 재밌게 직장 생활을 했었어. 미국 라스베가스에 열리는 세계 최대 패션 관련 쇼인 매직쇼도 매년 참가하고 말이야. 그런데···.”
“말씀 안 해도 알겠네요. 우리나라 봉제산업이 무너지기 시작할 때잖아요?”
“푸흐흐! 그랬지. 그룹에서도 비중을 점차 줄이다가 아예 날려버리더라. 그래서 버티다 나와서 우리 대신에 봉제의 메카로 떠오른 중국은 물론 베트남, 미얀마 안 돌아본 곳이 없고. 뭐 그렇게 된 거지”
“...”
그렇게 된 거다.
능력과 열정은 있지만,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 봉제쟁이로 남게 된 중년이 되어버렸다는 말.
하여간, 이런 양반이라 다른 일을 권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여전히 자신이 의류 생산으로는 최고라는 자부심으로 사는 양반이니까.
맥주 세 병째를 까면서 낑낑대었는데, 도저히 답이 안 나와서 일단 잠을 자려고 할 때다.
갑자기 내 머릿속에 오래전에 재밌게 봤던 웹툰 생각이 났다.
가우스 전자!
“맞아! 가우스다! 푸하하하!”
이렇게 간단한 것을 왜 생각을 못 했을까?
재하 형뿐만 아니라, 두루두루 에브리바디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을?
게다가 회사 다닐 때 꾸었던 내 꿈도 본격적으로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머리가 굳은 것 같다.
하여간 해결되었으니 자자.
며칠 후 9월 초.
나는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요즘 회사는 어때요?”
“똑같지 뭐. 유·아동 바닥 출산율 박살이 나서 망조가 든 것이 하루 이틀이냐?”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저녁에 시간을 내어 재하 형을 만났다.
“휴우! 그런데 요즘 출산율 떨어지는 속도가 너무 심하지 않아요? 몇 년 전까지 43만 명 대였는데, 올해는 35만 정도를 예상한다면서?”
“앞으로 더 떨어질 거야. 젊은 애들이 결혼도 하지 않고, 도통 애들도 낳지 않으려는 추세가 심해지고 있으니까”
“허어! 정말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너님이나 잘하시지요? 서른세 살, 쏠로 강철식 씨?”
“...”
하여간 할 말 없게 만드는 데는 선수다.
“여튼 문제는 문제야. 다른 업체들도 많이 흔들리는 모양이더라. 해파 놈들도 4개나 되던 브랜드 하나는 벌써 접었고, 곧 또 하나 접는다고 해. JD 스타일도 회사가 어려워서 흉흉한 소문이 돌고 말이야. 그런데, 문제는 이제 시작도 안 했다는 거지”
“그럼?”
“최근 급전직하하는 출산율 영향이 아동으로 번지기 시작하면 여러 업체 결딴날 거다. 몇 년 있으면 말이야.”
“대성은 어때요?”
“우리야 뭐, 후발 주자여서 여전히 출점 중이고, 백화점이 주력이니 아직은 영향이 덜 해. 그래도 꾸역꾸역 성장하고 있으니까”
“호오?”
“무엇보다 우린 생산에서 경쟁력이 있잖아? 원사만 수입하고 전 공정 국내 생산하면서 이런 원가가 어디 있냐? 웬만한 완사입 가격보다도 싼데? 그리고, 생산이야 내가 해서 그런다지만, 회사 전체로 봐서도 그래. 홍 사장이 좀 쥐어짜냐고? 너 여기서 인테리어도 네가 했으니 잘 알잖아?”
“흐흐흐! 그거 생각하면 내가 아주 그냥!”
원래 백화점, 마트 등의 대형 몰을 대상으로 단독 매장으로 입점하는 브랜드 업체들은 인테리어 비용을 모두 부담하는데, 그게 장난이 아니다.
벽 매장 10평 기준으로 3,000만 원에서 비싸게 하는 곳은 4,000만 원에 했다는 곳도 봤으니까.
그런데, 나는 그것을 2,000만 원 이내로 맞추는 이적을 행하였다.
VMD가 할 일을 VMD는 이쁘게 하려 해서 돈 아까운 줄 모른다고 충신이 내게 떨어진 거지.
나는 기어이 가구공장 직접 찾아내고 애걸하고 사정하고 해서 맞춘 것이고.
공사비 결제 한번 받으려면 악착같이 깎으려던 홍 사장과 씨름하느라 스트레스받아서 잠을 못 잘 정도였다.
이면지 활용 안 한다고 회사 전체를 뒤집어 버리는 횡포를 부렸던 홍 사장, 우픈 이야기지만 그것이 대성의 경쟁력이 되었다.
“그럼 형님 생각은 어때요?”
“뭐가? 무슨 생각?”
“한국에서 유·아동 브랜드가 살아남을 것 같냐는 거지. 전망 말이요.”
“없지는 않아. 수십 년 후에 나라가 없어질 정도로 출산율이 떨어지면 정부 차원에서 언젠가는 대책이 나올 거야. 제대로 된 대책 말이야. 그리고, 치킨 게임이 시작된 것인데, 업체들 정리되고 나면은, 여기서 살아남는 업체들이 다시 빛을 보는 시절이 올 거야”
“중국은 끝났지?”
“1년에 1,800만이 태어나면 뭐하냐? 사드 때문에 이젠 진출하기도 어렵고, 그놈들도 자기네 브랜드 디자인도 괜찮아지고 품질도 그럭저럭 괜찮아지면서 지들 브랜드 사는데? 아예 부자들은 완전 서양 유명 브랜드를 입히고 말이야. 대신 동남아 시장이 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한류에 편승하면 장기적으로 괜찮을 것 같아”
“흐음···.”
결론은 아주 희망이 없지는 않다는 말이다.
내 생각에도 그렇고.
물론 몸집을 좀 더 키워야 하겠지만.
“야! 그런데 그런 것은 왜 물어봐? 나 어떻게 할 건지나 말하지 않고?”
“그게 말이지, 같은 이야기거든?”
“같은 이야기라니?”
“재하 형!”
“왜?”
“회사 확 사버릴까?”
“뭐, 뭐? 회사를 사버려? 우리 회사를? 대성 어패럴을 말이야?”
“응”
“너 벌써 취했냐?”
“...”
이 양반이 진심으로 말하는데?
회사를 사 버리겠다는 생각, 며칠 전 재하 형의 전화를 받고 전전긍긍하다가 든 생각이다.
오래전에 봤던 일간지 웹툰 ‘가우스 전자’의 한 에피소드가 생각났으니까.
600억의 복권 대박을 터뜨린 만년 과장.
대박을 터트렸음에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대로 성실하게 회사를 다닌다.
그러던 어느 날, 상사가 일을 이따위로 하면서 월급 받아먹냐는 핀잔에 발끈하여 한마디 한다.
‘회사 확 사버린다?’
갑자기 왜 그 웹툰이 생각났는지 모르겠지만, 간단하잖아?
그냥 확 회사를 사버리면 모든 고민이 해결되는데?
그렇게 하면 부수적으로 재하 형 말고도 나와 친했던 다른 대성 어패럴 직원들도 숨통을 틔우며 살 수 있고?
“나 안 취했거든?”
“그럼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제법 돈을 벌어도 그렇지, 그 정도 여력이 되냐고? 그리고, 혹시라도 돈이 된다고 치더라도, 나 때문에 가진 돈을 꼬라박아서 이걸 사? 미친 거냐?”
“여력? 형, 착각하지 마. 내게 대성 어패럴 같은 하꼬방 중소기업은 수십 개를 사고도 남을 돈이 있어. 막말로 대성 같은 회사 몇백억 주고 사서 망해도, 나는 그냥 맥주 한 잔 먹고 잊으면 그만이야”
“그, 그게 무슨···.”
“형네 동네 석수에서 밑으로 조금 내려가면 요즘 새로 보육원하고 보육원 끝나는 아이들이 머무르는 센터가 생겼는데 알아?”
“양혜원? 그거 잘 알지? 우리 동네 근처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데? 그리고 사다리 센터인가? 겁나 크게 생겼던데?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잘 아네? 형, 그거 내가 지어준 거야”
“뭐? 네가 지어주었다고?”
“응, 양혜원은 100억 약간 넘게 들어갔고, 사다리 센터는 거의 300억 가까이 들어갔지. 지금 또 은평구 외곽하고 남양주 쪽에 700억을 들여서 두 개의 사다리 센터를 더 짓고 있어. 그거 다 내 돈으로 하는 거야”
“어, 어···.”
재하 형은 말문을 잇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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