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왜 개인 돈을 쓰는데?
박진호 이사와 함께 소사랑으로 들어가니, 이미 전 직원이 상석을 비워둔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기나 먼저 먹고 있지 않고요?”
슬쩍 재하 형을 타박했더니 바로 반론을 제기했다.
“소고기라서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구우면 바로 먹어야 하니까요.”
하긴, 소고기는 오래 구우면 질겨서 못 먹지.
“직원들이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한마디 하시지요.”
“어흠, 그럴까요?”
자리에서 일어나니 삼십여 쌍의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대성 본사의 직원은 모두 37명이다.
천안 물류센터에 있는 직원이 13명으로 모두 다 해서 총 50명인데, 그들은 출고 작업 때문에 올라오지 못했다. 며칠 후에 내가 내려가서 다독이고 올라올 생각이다.
“안녕하십니까? 저 알지요?”
“알아요!”
“압니다!”
“처음 뵙습니다!”
따져보니 17명은 내가 모르는 퇴사 후에 입사한 직원들이다.
진짜 이직률 한 번 무시무시하네.
“하하하! 모르는 분들도 있을 터이니, 새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나는 2년 반 전까지 대성 어패럴 영업부에 무려 6년씩이나 있다가 팀장으로 퇴사한 강철식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짝짝짝짝!
“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년 반 전에 퇴사하고 개인적으로 제게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만, 자세한 것을 말하기는 그렇고, 간단히 말씀드리면 제법 돈을 벌었어요. 그래서, 대성을 다니면서 속으로 소박하게 꾸던 꿈을 실행하기로 했습니다. 꿈이 뭐냐고요? 거기 디자인실 황소영 주임! 내 꿈이 뭐였지?”
황소영 주임은 회사 다닐 때 가끔 여럿이 어울려서 맥주 한 잔씩 하던 디자인실 주임이다.
언젠가는 자기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고 했었지?
“저요? 팀장님?”
“나 이젠 팀장이 아닌데?”
“아이, 씨···.”
“푸하하하!”
순진한 황 주임의 반응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농담이고 말해 봐요. 내가 말한 적이 있던 것 같은데?”
“언젠가는 브랜드 회사를 창업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빙고! 기억하고 있었네?”
“네, 그럼요.”
“그래요, 그런 꿈이 있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이젠 본업이 투자로 바뀌어서 그 꿈에서 한발 물러서게 되었지만, 그 꿈이 꼭 내가 직접 처음부터 창업해서 시작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은 없어졌지만, 대신 돈이 생겼으니까요.”
“······.”
“자! 그래서 대성을 인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간부들에게만큼은 아니지만, 적당한 선에서 동기를 부여할 만큼 내 포부를 밝히었다.
지금 당장은 반신반의하겠지만, 일이 진행되기 시작하면 그래도 열정을 가지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니까.
물론 이런 것도 동기 부여가 되겠지만, 진짜는 따로 있지.
거지 같은 회사에서 소유주만 바뀌고 처우는 그대로라면 꿈이 어쩌고저쩌고 해봤자 그저 공염불이다.
“그럼 뭐하냐? 하시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주인만 바뀌고 다른 것은 그대로면 말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벌써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까?”
“??”
“어허! 이 사람들 보게? 어이! 인터넷팀 박승희 팀장!”
“예? 저요?”
“박 팀장도 무려 4년이나 다닌 고인 물이니까 대답해 봐요. 4년 동안 회사 회식에서 소고기 먹은 적이 있어요, 없어요?”
“어? 그러네? 무조건 삼겹살이었는데?”
“푸하하하!”
웃기는 이야기지만, 분위기가 좋아졌으면 그만이다.
“보라고? 이거 투뿔 소고기야, 투뿔! 이래도 변화가 없어요?”
“우와아아아! 엄청난 변화입니다!”
“푸하하!”
웃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려서 다시 입을 열었다.
좀 진지한 표정으로.
“나는 절대로 여러분에게 일방적으로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지 않을 겁니다. 디자인실!”
“네에!”
“사람이 부족해도 품평회에 대비하느라 허구헌 날 밤 11시 12시 퇴근이지요?”
“네에!”
“김 실장님!”
“네, 대표님!”
“필요한 인원 올리세요. 추가로 채용합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와아아아!”
“그래도 품평회가 가까우면 야근이 불가피할 때가 있을 거예요. 근데 왜 저녁밥 값은 5,500원이냐? 그거 가지고 뭘 사 먹으라고요?”
“네에에! 맞아요!”
진짜 이건 홍 사장님이 많이 심한 거였다.
아니, 야근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놓고서 저녁 식대는 꼴랑 5,500원만 인정하면 대체 어쩌라는 말이냐고?
야근하는 것도 서러운데?
“정 과장님!”
“네, 대표님!”
“앞으로 야근자들이나 혹시 모를 주말 근무자 식대는 1만 원으로 상향합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우와아아아!”
아직 본론은 안 꺼냈는데, 왜 이리 시끄럽냐.
“조용! 조용! 그만할까요?”
“아니요!”
“아, 야근하면 당연히 야근 수당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니야!”
“꺄아아아악!”
아주 자지러지네, 자지러져.
하여간 그 망할 놈의 포괄임금제가 문제였지.
줄 것은 준다.
그리고 일을 시킨다.
이게 내 경영 철학이라면 철학이다.
“그리고 영업부와 생산부! 걸핏하면 지방 출장을 가는데, 세상에 일비가 없는 회사가 어디 있습니까?”
“맞습니다!”
그동안 대성에는 출장을 가도 일비가 없었다.
오직 하루 세끼 식대와 모텔 비용만 지급했다.
그것도 제대로냐?
역시나 5,500원짜리를 찾아서 헤매야 하고, 모텔도 4만 원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진짜 피곤해 죽겠는데 일일이 모텔을 방문하여 얼마예요? 물어보는 비참함이란.
그나마 요즘은 어플로 검색해서 가격에 맞는 곳은 찾는 모양이지만.
“아니, 고속도로 휴게소 들르면 물도 사 먹어야 하고, 운전하다가 졸리면 커피도 사 먹어야 하잖아요? 그걸 왜 개인 돈을 쓰는데?”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일비! 사규를 재정비해서 직위와 직책에 맞추어 지급합니다! 출장 식대와 숙박비! 역시 현실을 고려하여 조정할 겁니다!”
“우워어어!!”
그 외에도 몇 가지 소소한 것들을 추가로 발표했다.
디자인실 동대문에서 샘플을 들고 오는 등의 업무상 과도한 짐을 들게 되었을 때는 택시를 타게 했고, 노후 컴퓨터 등의 교체도 약속했다.
컴퓨터 교체는 전산 담당인 이정환 차장이 제일 좋아했다.
고장 난 직원들 컴퓨터를 쉽게 사주지 않으니, 고장 난 회사 컴퓨터에서 쓸 만한 부품을 뜯어내다가 그래도 돌아가는 컴퓨터를 만드는 일을 했으니까.
진짜, 나열하다 보니 대성 어패럴 끝내주는구나!
잊었던 악몽들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자! 이제 마지막입니다. 마지막은 발표하기 전에 모두 잔을 채워주세요. 술 안 드시는 분들은 물이나 콜라라도 채우시고.”
잠시 부산스럽게 서로의 잔을 채워주었다.
“분명히 약속드립니다! 나는 여러분이 회사에 열정을 쏟아주시면, 그만큼! 아니 그 이상의 대우를 해드릴 겁니다! 하지만, 그저 시간이나 때우려 하고, 말도 안 듣고 하는 분들은 저와 그리고 우리 새로운 대성과는 인연이 없는 것으로 알고서 과감하게 정리할 겁니다. 나는 국가 정책 자금도 받을 생각이 없으니, 그런 분들은 당당하게 줄 것은 주고 정리할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네에···.”
정리 이야기가 나오니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럼 다시 띄워 볼까?
“그럼 진짜 마지막을 발표합니다. 제가 2년 반 전에 퇴직할 때, 6년이나 다닌 팀장 연봉이 3,000만 원이었습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마, 말도 안 돼!”
“진짜야?”
다들 그건 좀 심했다는 표정들이다.
하긴, 내가 고졸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성격상 적극적으로 연봉 올려달라고 징징대지 못하는 것을 알고서 유난히 다른 부서 팀장급에 비교하더라도 적은 편이었으니까.
진짜 나는 머슴이었다.
“연봉! 직장인의 자존심! 생계의 수단! 이거 조사해 보니, 동종업계 우리 회사만 한 곳과 비교해서 작게는 10%에서 많게는 20%까지도 적었습니다! 엄격하게 심사하여 연봉도 다시 재조정합니다!”
“우와아아아!!”
“꺄아아아악!”
난리가 났다.
건배하려고 채우라고 한 술이 내게 쏟아졌다.
“야! 야! 뿌리지 마!”
그렇게 환호의 도가니로 시작된 회식은 자정이 넘어 노래방에서 끝이 났고, 미리 준비한 택시비를 지급하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절반 가까이는 모르는 직원들이지만, 정말 징글징글하게 같이 고생했던 멤버들이 더 많았다.
모두 즐거워하는 것을 보니, 내 마음도 기꺼워졌다.
사는 거 뭐 있냐?
***
똑똑!
“네, 들어오세요.”
월요일에 오후에 출근하니 재하 형이 사장실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아, 이거 사장실 비워주어야 하는데?
“어, 형. 들어와요.”
“나오셨습니까?”
“에이, 우리 둘만 있을 때는 적당히 하지?”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 있을 때도 실수합니다만?”
“됐거든? 나 여기 있어 봐야 2주 정도밖에 못 있어요. 그러니, 되지도 않는 소리는 하지 마셔.”
“흐흐, 그럴까?”
“형 이름으로 법인 대표이사 등기 마쳤으니까, 이제 모든 것은 형이 사인해야 해. 그러니, 짐 옮겨서 사장실로 들어와요.”
“너는?”
“나야 여기 소파나 회의실에서 잠시 이야기하면 그만이라니까? 진짜 형이 대표라는 것 명심해.”
“알았다.”
내가 계속 사장실을 차지하고 있으면, 형의 위신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형 차는 홍 사장님이 놔두고 간 법인 차량 써.”
“뭐? 제네시스 EQ900을? 야! 그건 좀 과하지 않냐?”
“과하기는 뭐가 과해? 우리 회사가 얼마나 커질 건데? 구형 카니발 타면서 회사 망신이나 시키지 말고 그냥 타요.”
“알았다. 그럼 박 이사는? 계속 아반떼 타고 다니게 하려고?”
“어이구! 형에게 별로 잘하지도 않았는데, 뭐 그렇게 챙겨?”
“에이, 챙기는 것이 아니라, 네 말처럼 여기저기 손님 많이 만나고 다니는 영업 본부장 차가 아반떼가 뭐냐? 아반떼가? 그것도 구형이잖아?”
“그래서, 소나타 새로 뽑아주기로 했으니까, 그런 줄 아셔.”
“소나타?”
“왜? 소나타가 어때서?”
“야! 이왕 계속 같이 가기로 한 거, 제대로 해주자. 이제 50 되는 영업 본부장이 소나타는 좀 그렇잖아? 소나타가 예전의 소나타 위상도 아니고?”
“그런가?”
“그래, 그건 좀 그래.”
“아, 형이 사장이니까, 그럼 올려 주면 되잖아?”
“어? 그래도 되냐?”
“아유!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알아서 해요. 그랜저로 사주든가. 다만 제네 80은 좀 아니다?”
“뭐 상관 안 한다면서?”
“그래도 그렇지.”
나중에 열심히 하는 것을 보고서면 몰라도.
“그리고 정 과장은 부장으로 승진시켜요.”
“부장으로?”
“응, 이건 내가 마지막으로 인사에 관여하는 거로 생각하면 될 거야. 오해 없게 미리 말하는데, 정 과장이 자금 관련해선 내게 보고할 거니까 그리 아셔요. 정말 오해하지 말아요? 나중이라도 형과 내가 서로 오해가 생기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고, 정기적으로 보고만 받을 뿐이지 자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대한 권한은 전적으로 형에게 있는 거니까?”
아무리 재하 형이라도 돈이라는 것이 그렇다.
미국에 있는 나는 자금이 투명하게 집행된다고 안심할 필요가 있는데, 괜히 형더러 이러고 저러고 하면 서로 오해만 생긴다.
아예 깔끔하게 사전에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 낫지.
“무슨 말인지 알겠다.”
“편하게 해요, 편하게. 그리고 인력은 계속 제대로 된 인원들로 충원하시고. 우리 회산 너무 맨파워가 부족해. 맨날 멀티플레이어만 강조하다 보니, 잘하는 것도 없고, 못 하는 것도 없는 나 같은 인간들이나 만들어지고 말이야.”
“뭐 본인 평가는 잘하네?”
“흐흐흐! 그럼?”
똑똑!
“아! 박 이사님, 들어오세요.”
“네, 부르셨습니까?”
“저기 앞으로는 저에게 그리 깍듯하게 인사하지 마시고, 여기 이 대표님께나 하세요.”
“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사님 차 소나타로 바꾸기로 한 것 말이지요···.”
“아! 괜찮습니다! 차가 지금도 잘 나가는데요? 하하하!”
하여간, 처세는 알아주어야 한다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헛짚었네요, 이 양반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고, 여기 이 대표님이 그래도 영업 본부장인데 소나타가 뭐냐고 해서요?”
“예?”
“그래서, 이 대표님이 그랜저로 뽑아준다고 하니까, 그런 줄 아세요.”
“아!”
박진호 이사의 표정에 감동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대표님!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
“······.”
역시나, 대단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