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아직 절박하지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박 이사님, 내가 말했듯이 일단은 유아동복 업계를 평정할 생각입니다. 요즘 업계 현황이 어때요? 내가 듣기로는 많이들 어려운 것으로 아는데요?”
내가 한국에 더 있을 수 있는 시간은 2주에서 길게 잡아도 3주다.
그 안에는 추가로 업체 인수 방향이라도 결정을 짓고서 넘어갈 생각이다.
대성과는 다르게 실제로 인수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방향이라도 먼저 정해 두면 나중에 내가 미국에서라도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으니까.
인수 절차야 재하 형과 박진호 이사가 내가 고용한 전문가들을 데리고 진행하면 되는 것이고.
“맞습니다, 대표님. 백화점 브랜드든 마트 브랜드든 간에 모두 어려운 시절을 겪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출산율 저하로 국내 시장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너도나도 진출했던 중국 시장마저 사드 사태 이후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으니까요.”
“중국으로 간 업체들이 많이 힘든가 보지요?”
“거의 예외가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특히나, 현지 법인을 차려서 진출한 업체들은 죽을 지경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계속 돈을 꼬라박고 있으니까요. 그나마, 우리같이 보수적으로 현지 파트너사에 홀세일로 접근한 업체들은 매출이 줄기는 하지만, 큰 타격이 없습니다.”
“해피 파라다이스는 어때요?”
역시 이 바닥의 최강자인 해파의 근황이 궁금했다.
“해파의 경우는 보유 브랜드가 대부분 해외 브랜드 라이선스잖습니까? 그래서 남들이 ‘가자! 중국으로!’를 외치면서 중국 러쉬가 일어났을 때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라이선스 계약상 중국으로 직접 진출이 불가능했으니까요. 그래서 그때는 전전긍긍했는데, 지금 상황으로 보면 그야말로 전화위복이 된 것이지요.”
“히야? 해파 양 회장은 정말 운도 참 좋네?”
“그러게나 말입니다.”
대부분의 유·아동 업체가 그러듯이 해파도 업계 사람들에게 그리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
그나마 요즘은 나아졌다는데, 박 이사가 재직할 당시만 해도 회의하다가 재떨이가 날아왔고, 건물 밖으로 흡연하러 나가면 경비실에서 이름도 적었다고.
대체 애들 옷 만드는 사람들이 왜 그런지 몰라?
“전체적으로 이 바닥 분위기 좀 알려주세요. 관심을 꺼버린 지 2년 반이나 되었더니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면에서 이 바닥 소식은 박진호 이사가 최고다.
커리어 시작부터 유·아동 업계에서 출발하여 지금까지 벗어난 적이 없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간단하게 보고하자면, 해파는 궁극적으로 유·아동에서 손을 뗄 것 같습니다. 주력 브랜드인 엠베서더를 제외한 모든 브랜드를 정리하여 성인으로 갈아탈 예정이고, 이미 골프 등의 스포츠로 많이 투자 중입니다.”
역시 유·아동의 장래를 어둡게 본 것인가?
“그리고 동양은···.”
말을 꺼내다가 내 눈치를 보는 박 이사다.
“왜요?”
“괜찮으신가 싶어서 말입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이 바닥에 제가 모르는 일이 있겠습니까?”
“······.”
하기는, 내가 귀신을 속이지.
“상관없으니까, 말씀하세요.”
“동양은 그래도 선방 중입니다. 아시다시피 홍콩 자본이 들어왔잖습니까? 자금력도 좋고, 워낙 디자인력도 정평이 나 있어서 앞으로도 무난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리고 이거 말씀드려도 될는지 모르겠는데···.”
“뭔데요? 말씀하시라니까? 편하게?”
“그분, 작년 말에 결혼했는데, 혹시 아시나 싶어서요.”
“······.”
전혀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그런데, 기분이 썩 좋지는 않네.
“어흠! 사적인 이야기는 삼가셨으면 좋겠네요.”
“송구합니다. 심기를 어지럽혔네요.”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다음으로 JD 스타일은···.”
한참을 박 이사의 보고를 받았는데, 참, 이 바닥도 갈 데까지 갔구먼.
메이저 상당수가 중국계 자본을 받았는데, 동양을 제외하고는 개판인 모양이었다.
어디 조선족 계열로 넘어간 회사는 온종일 책상 들고 이사하다가 날이 샜다고 한다.
일주일에도 조직 개편을 몇 차례씩이나 한다니.
거기다 내셔널 브랜드들은 그들대로 중국 진출하다가 망가지고, 불필요하게 사옥과 물류창고를 거대하게 짓다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단다.
이거, 갑자기 홍 사장이 정말 경영 하나는 끝내주게 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하여간 우리가 인수할 대상은 현재로서는 JD 스타일과 마트계의 강자인 진정 어패럴이 제일 낫습니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서 직원들 급여는 물론이고 매니저들 중간관리 수수료까지 밀리는 상황이니까요. 게다가 시장도 넓힐 수 있는 데다가 우리가 열세인 아동 쪽도 보완할 수 있습니다.”
매니저들 수수료가 밀린다면 정말 갈 데까지 갔다는 소리다.
“그렇단 말이지요? 흐음, 이사님. JD의 고 전무와 여전히 연락하시지요?”
“그럼요? 영업맨의 기본입니다. 하하하!”
“그러면 말이지요, 이사님이 술 한잔하면서 물어보세요. 그렇게 분위기 조성하다가 무르익으면 이 대표님이 나서시고 인수 전문가들을 투입하세요.”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른 브랜드 인수는 상당히 길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대성이야 빚이 한 푼도 없는 상태인 데다가, 무엇보다 내가 모든 것을 꿰고 있었으니 아주 간단하게 인수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인수 대상으로 오른 다른 업체는 완전히 다르지.
대성보다 큰 데다가 빚도 많아서 권리관계도 엄청나게 복잡할 것이다.
게다가 재고 자체도 믿을 수 없으니, 물류창고는 물론이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매장의 재고도 실사 전문업체를 동원하여 제대로 실사를 해야 할 것이다.
뭐 내가 서두를 일은 전혀 없지만 말이다.
“자, 그건 그렇고, 우리 매니저들 수수료도 조정하세요. 제대로 수익을 가져가는 곳이라면 몰라도, 아르바이트만도 못한 곳들 있잖습니까? 몇 개 점이나 됩니까?”
“대체로 20개 정도가 이거저거 떼고 나면 200만 원도 못 가져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대표님.”
“네, 대표님.”
“매니저들 수수료 조정 부탁드립니다. 최저 생계 밑으로 떨어지는 매니저들도 방금 박 이사가 말한 것처럼 꽤 있는데, 그러다가 정말 사고 납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정리하든가, 수수료를 올려 주든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말한 ‘사고’는 정말 큰 사고를 말하는 거다.
대성에서는 아직까지 없었지만, 정말 악독하게 매니저를 관리하는 업체 중에서는 가끔 매니저가 갈 데까지 몰려서 세상을 버리는 사고가 나곤 했다.
다 집어치우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소유한 업체에서 그런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박진호 이사에게 JD와 접촉해보라고 한 지 3일이 지났을 때, 예상보다 빨리 보고가 올라왔다.
“저, 대표님, 지난번에 지시한 JD건 있잖습니까?”
“응? 그런데요?”
“그날 당일 JD의 고 전무에게 의사 타진을 했는데, 좀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벌써요? 뭐라고요?”
이렇게나 빨리?
생각보다 더 어려운가?
“거기 김철환 대표가 이 대표님과 대표님을 만나 뵙게 해달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날? 나는 왜요? 이 대표님만 보면 되지?”
“그게, 대표님에 대한 소문이 거기까지 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2년 반 전에 퇴사한 영업부 직원이 자기가 다니던 회사를 인수해 버린 사건이라면 사건이다.
한 다리 거치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 좁은 바닥에서 내 소문이 퍼지지 않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라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뭐라 하셨는데요?”
“일단은 여쭤보겠는데, 기대는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잘하셨어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흐음···.”
사실 나는 인수과정에 직접 관여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렇게 빨리 피드백이 올지도 몰랐고, 게다가 내가 상대할 사이즈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성이야 내가 다녔던 회사라 특별한 케이스니 내가 직접 나선 것이지,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고작 매출 300억짜리 회사는 내가 직접 나설 사이즈가 전혀 아니지.
JD가 대성보다 크다고 해봤자, 매출 600억짜리다.
그런데 AMD의 실제 소유주이자, 엔비디아를 비롯한 여러 다국적 기업의 대주주인 나를 직접 만나겠다고?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내가 너무 건방져진 것인가?
그런데 듣고만 있던 재하 형이 입을 열었다.
“저기, 대표님.”
“예, 이 대표님.”
“이번만 저와 같이 만나시지요?”
“같이요?”
“네, 격이 한참 맞지 않는 것은 저도 아는데, 이번만 부탁드립니다. 아무리 망조가 들은 회사라도 인수하려면 거금이 들어갈 텐데, 아직은 제가 직접 100억, 200억 같은 돈을 마음 편하게 지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
하기야, 얼마 전까지 나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박봉에 월급쟁이 하던 사람인데, 회사를 인수하는 협상 자리에 혼자 나가라고 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이 대표님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고맙습니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재하 형을 무시하지는 말라는 일종의 경고다.
그럴 일은 없지만, 내가 없는 사이에 전문 경영인이라고 무시하는 놈들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그럼 박 이사님. 약속을 잡으세요.”
“언제로 할까요?”
“뭐 오래 끌 필요가 있나? 음, 하루는 좀 조사해 볼 것이 있으니까, 모레 저녁에 오라고 하세요.”
“여기로 말입니까?”
“네, 급한 것은 그쪽이잖아요? 앞에 한정식집 룸에서 만나면 될 것이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참석자는 어떻게 할까요?”
“고 전무까지만 오라고 하지요. 우리야 나와 이 대표님하고 박 이사님이 나가면 되고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박 이사를 끼워주었더니, 좋아 죽으려고 하였다.
하긴 박 이사도 이런 인수 판에 언제 끼어 봤겠냐?
아마도 스스로 거물이 되어가고 있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이틀 후, 회사 앞 한정식집에서 JD의 김철환 대표와 창업 멤버이자 이인자 격인 고진남 전무를 만났다.
“허허! 이거 요즘 패션계에서 유명하신 분을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나, 김철환입니다.”
“······.”
흔히 어르신 악수라는 것이 있다.
어르신들이 한참 아랫사람을 만날 때, 한 손을 팔꿈치도 다 펴지 않고 내밀면 아랫사람은 황송한 표정으로 왼손을 자신에 가슴에 가져다 대고 허릴 굽히면서 오른손으로 악수하는 것이지.
보통은 윗사람 악수라고도 하고.
예전에 영업하면서 가끔 당하면서도 좀 웃기는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감히 나에게 이래?
이 양반이 미쳤나?
이틀간 따로 알아보니까 내일 부도가 나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더구먼?
게다가 ‘나, 김철환입니다.’라니?
어이가 없어서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으니, 본인도 실책이라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벌게지면서 다시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 이거 미안합니다. 제가 버릇이 되어서요.”
그래, 이건 이해하고 넘어가자.
연세도 나보다 한참 많고, 복마전 같은 유·아동 바닥에서 그래도 평이 괜찮은 양반이니까.
“네, 이해합니다. 강철식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고진남 전무입니다. 저와는 동대문 시장 때부터 같이 했던 사람입니다. 강 대표님을 안다고 하더군요.”
“네, 이전에 매장이나 바이어 간담회에서 몇 번 뵈었습니다. 고 전무님,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입니다. 강 대표님. 이거 이렇게 성공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네, 운이 좀 좋았습니다. 우리 이재하 대표님과도 인사하시지요? 김 대표님? 새로 대성의 대표이사로 선임되셨고, 앞으로 인수와 합병을 포함한 모든 일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진행하실 겁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데, 나는 점점 자리가 불편해지는 걸 느꼈다.
이 사람들, 아직 급하지가 않은 것 같은데?
아니, 급하기는 한데, 자신들 사업이 사실상 망했다는 현실을 아직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믿기 싫은지는 몰라도.
“으허허! 우리 JD가 말입니다···.”
“으허허···.”
입만 열면 왕년에 자기네 회사가 어쩌고저쩌고하면서 과거의 영화롭던 시절만 늘어놓았고, 내가 이틀간 파악한 것들이 있는데 되지도 않는 허풍을 쳤다.
이러면 더 앉아 있을 필요가 없지.
“우리 물류센터가 말입니다, 최첨단으로다가···.”
탁!
“?”
내가 숟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놓자 나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저, 미안합니다만, 오늘 식사는 이만 마치시지요.”
“어? 아, 아니 왜···.”
“박 이사에게 보고를 받고 나름대로 조사를 좀 했습니다. 김 사장님 지금 이러실 때가 아닐 텐데요?”
“예?”
“자본은 완전히 잠식되었고, 대출도 1금융은 물론이고 2금융마저 거절하는 상태지요? 심지어는 그만두는 매니저들 보증금도 반환 못 하여 소송도 걸려 있고요? 무엇보다! 앞으로 5일 이내로 부도가 날 상황이고 말입니다?”
“어, 어···.”
“그런데도 아직 절박하지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지금 왕년에 잘 나갈 때 이야기를 하실 때인가요?”
“저, 저기···.”
“이 대표님! 박 이사! 갑시다!”
“이보세요! 강 대표님!”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 그냥 나와버렸다.
저 회사는 5일 이내로 부도가 날 것이다.
그 전에 정신을 차리면 다시 찾아올 것이고, 아니면 말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