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제프리 형은 항상 계획이 있다.
“오! 벌써요?”
- 사실은 네가 그럴 때가 된 것 같아서 천천히 알아보던 중이었다.
확실히 성공한 사람들은 늘 남보다 한발 앞서가는구나.
이런 것은 배우자.
“그래, 누구예요?”
- 이름은 남정원. 사성그룹 기획조정실 출신이야. 나이는 올해 49세고.
“아, 사성그룹 기획조정실 출신이라고요?”
- 응. 2년 전에 사성 기조실 후신인 미래전략실에 있다가 해체되면서 그룹사로 내려가는 것을 고사하고, 현재는 야인으로 있어. 기조실에 있을 때는 당시 이학주 실장이 수제자처럼 끼고서 애지중지하였다고 한 사람이야.
오오! 이거 대박이다.
- 자세한 것은 네 메일로 넣었으니까, 그거 보면 될 거야
“아니, 제프리 형. 그런데 이런 사람이 나에게 올까?”
- 대략은 설명해서 흥미는 있는 듯하더라. 그런데, 확정 지으려면 나랑 같이 이야기 좀 해야 할 거야
“어디서? 미국에서?”
- 당연히 한국이지. 그 사람 지금 한국에 있는데.
“그럼 형이 한국에 와야 할 것 아니야?”
- 뭐 어쩌겠냐? 한 번 들어갔다가 나와야지
“흐흐흐! 이거 미안해서···.”
- 됐고, 이틀 후에 들어가니까, 그런 줄 알고 있어. 비행기 일정도 네 메일로 넣었으니 참고하고 픽업이나 나와.
“당연히 모시러 나가야지요, 하하!”
- 그래, 한국에서 보자.
“얍!”
제프리 형과의 전화를 끊고 메일을 열어보았다.
제프리 형이 한국에 용역을 주고 조사한 듯한 서류 파일.
그런데, 별 내용은 없었다.
대학 졸업 후 사성 기조실에만 주구장창 20년을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다만, 사성 내에서 한때는 이학주 실장 후계자로 공인될 만큼 잘 나갔었다는 것과 성품이 입이 무겁고 진중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잘하는 편이라 두루두루 인심을 얻었다는 정도가 특이 사항으로 적혀 있었다.
한 가지 더 추가하면 CPA(공인회계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
하여간 경력이야 사성그룹 기획조정실, 이거 하나로 더 볼 것은 없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염주의 검증이지.
한국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기에, 반드시 염주의 검증은 받아야 한다.
조심스럽게 염주를 대어 보았다.
화악!
“오! 밝다!”
염주가 거의 최고 수준으로 발광하였다.
이젠 더 볼 것도 없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잡아야 할 사람이다.
“여어! 제프리 형!”
“하아, 장거리 비행은 정말 언제나 싫다.”
인천공항 입국장.
제프리 형 픽업을 직접 나왔는데, 제프리 형은 입국장 게이트를 나오자마자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일등석 타지 않았어?”
“일등석이고 특등석이고 나는 장거리 비행은 딱 질색이거든”
“어쨌든 오느라 고생했어요. 호텔 들렀다가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호텔에 들러서 여장을 풀고, 지난번에 동양 서창렬 사장과 만났던 일식집으로 갔다.
그날 나오면서 바로 회원으로 가입했었기에, 예약이 가능했었다.
“뭐냐? 여기 좋은데?”
“어, 지난번에 서창렬 사장을 만난 곳인데, 서 사장이 소개해서 회원이 되었지”
“참! 별스럽게도 인연이 되네? 어떻게 자식놈이 사고를 쳐서 만났는데 그리되었냐?”
“뭐, 큰일도 아니었고, 서 사장 영업 마인드가 되었더라고요.”
“하하! 어이가 없네”
오랜만이라 소주를 시켜 꽤 먹고 나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 남정원이란 사람하고는 미팅 약속이 된 거예요?”
“응, 내일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 장소는 대성 사무실로 오라고 했는데, 괜찮지?”
“상관없지. 내 방이 작지만 깔끔하게 되어있으니까, 거기서 보면 되잖아요?”
“그럼 된 거지”
“그 사람은 어떻게 알게 된 거요?”
“그 친구 사성에 있을 때부터 아는 사람이야. 업무적으로 나와 자주 만났었거든.”
“그런데?”
“그때도 사람이 참 마음에 들었었어. 업무적으로 보통 유능한 것이 아니었고, 의외로 소탈하고 정도 있는 편이라서 그 친구 미국에 오면 자주 어울렸지”
“아니 그 유명한 이학주 실장의 수제자라니 업무 능력이 말할 것도 없을 텐데, 왜 나와서 야인 생활을 한대요? 나는 그게 제일 궁금하던데?”
“그 친구 이학주 라인이잖아”
“그런데?”
“이학주 실장이 그룹 후계자 이장룡하고 사이가 별로였어”
“그래요?”
그렇다면 안 봐도 비디오다.
이장룡이 실권을 다잡았으니, 자신과 척을 졌던 아버지 가신을 밀어내는 거지.
그 가신들 라인도 마찬가지고.
“그다음부터는 뻔하지 뭐. 이학주 실장이 실권을 10년 전에 완전히 잃고서도 이정인 회장이 총애하여 계속 붙어 있었는데, 이 회장이 5년 전에 자리에 눕고 나서부터는 끝난 거지. 그래도, 몇 년 동안은 워낙 업무적으로 유능하니까 내쫓기지는 않았던 모양인데, 그조차도 기획조정실이 2년 전에 없어지면서 낙동강 오리 알이 되었다고 하더라”
“아니, 그래도 그 정도 되면은 다른 곳에 갈 곳이 많았을 텐데요?”
“야! 명색이 사성그룹 서열 열 손가락 들었던 사람인데, 그게 그렇게 쉬우냐? 워낙 사성의 비밀을 많이 알고 있어서 본인도 다른 곳에 가기가 좀 그렇고, 받는 쪽에서도 부담스러운 존재야. 자칫하다가는 사성의 미움을 살 수도 있으니까”
“그렇구나···.”
“게다가, 사성에서 나오면서 돈도 섭섭하지 않게 받은 모양이더라고. 한 마디로 챙겨줄 테니까, 다른 재벌에 기웃거리지 말라는 소린데 도의적으로 좀 그렇지”
참, 그놈의 재벌가들은 복잡하게도 사는 모양이다.
“그런데 우리는 괜찮나?”
“상관없잖아? 네가 한국에서 벌인 사업도 사성에서 보면 하꼬방 수준인데? 적어도 아직까지는 말이다.”
“에이, 그래도 그렇지. 하꼬방이 뭐요? 하꼬방이?”
“사실이잖아? 하꼬를 하꼬라 부르지 뭐라 부르냐?”
“...”
뭐, 사실이기는 하지.
“그래서 그런 양반을 추천하는 이유는요?”
“무엇보다 신뢰할 수가 있어. 이건 내가 보증하지”
“오? 진짜?”
“응”
진짜는 놀랐다.
내가 아는 제프리 형은 자기 기준에 미달하면 친형제나 자신의 자식이라도 보증한다는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 정도 괜찮아요?”
“응, 정말 괜찮아. 그리고 또 추천하는 이유는, 지금 너에게 필요한 사람으로서 딱이야”
“어째서요?”
“네가 지금 필요한 사람은 회사를 직접 경영할 사람이 아니라, 한국에서 너를 대신하여 네가 투자하거나 인수하는 회사를 관리하고 감독할 사람이야. 더불어, 금융과 부동산에 해박한 사람이어야 하고. 어때? 내 말이 맞지?”
“정확하시네”
“그런 면에서는 남 형이 적임자지”
“인정이요.”
“자! 그럼 피곤하구나. 내일 오후 5시에 너희 회사 사무실에서 보는 것으로 하자”
“그런데, 왜 오후 5시?”
오후 5시면 상당히 어정쩡한 시간이다.
보통 친구들이나 오라고 해서 잠시 노닥거리다가 술 마시러 가면 적당한 시각.
“왜라니? 미팅 끝나고 한잔해야 할 것 아니냐? 이것으로 퉁치려고?”
“...”
제프리 형은 항상 계획이 있다.
다음 날.
5시 10분 전쯤에 제프리 형이 키가 껑충한 자신의 또래를 내 사무실로 데리고 왔다.
“알렉스, 데리고 왔다.”
“아! 반갑습니다. 강철식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알렉스 강으로 움직이고 있고요.”
“반갑습니다, 회장님. 남정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나를 회장님이라고 부르네?
이상하게 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드리는 것 같고 말이다.
이리저리 벌려 놓은 것이 많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인사를 하고 직원을 시켜서 차를 내오게 하였다.
“그래요, 남정원···. 저기 직함을 뭐라 해야지요?”
“남 형 직위가 마지막에 사장급이었지? 그냥 남 사장이라고 하면 될 거다.”
“아, 남 사장님 이야기는 제프리 형님에게서 많이 들었습니다.”
“하하! 그리 좋은 말은 안 했겠군요.”
“하하하! 원래 남 좋은 말은 잘 하지 않는 형님이라서요.”
“...”
“험, 농담이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제프리 형님을 뵈온 이후로 누군가에 대하여 보증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그래요? 이거 의외인데요? 장 형, 왜 그랬어?”
“시끄러워! 하던 말들이나 계속해”
제프리 형이 쑥스러워하는 모습도 보네?
“하하! 장 형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처음 봅니다. 하여간 그리 말해 주었다니 고맙네요.”
“네, 저도 그러네요. 하여간, 사성을 그만두시고 한 2년여간 일이 없으셨던 겁으로 압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은 제프리 형에게서 들었는데요, 우리 회사의 영입 제안에는 관심을 가지시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제프리 형이 보증하고 염주가 보장한 인물이다.
그래도 물어볼 것은 물어보고 심사숙고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무턱대고 어서 옵쇼! 할 수는 없잖아?
나도 가오가 있는데.
“장 형에게 들으셨다니, 구구한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일단 회사에서 나오면서 웬만하면 다른 그룹사에는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지요?”
“네, 알만합니다.”
정중하게 말했겠지만, 사실 반쯤은 협박인 거다.
불편한 관계를 만들지 말라는.
“뭐, 그에 대하여는 불만 없습니다. 방식이 약간은 섭섭했지만, 사실 제가 사성에 대하여 아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도의적으로 그렇고, 저를 영입하려는 다른 재벌사들도 순수하게 접근했다고 볼 수도 없고요.”
“그렇겠지요.”
“게다가, 그에 대한 보상도 넉넉하게 받았습니다. 월급쟁이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돈을 받았으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몸이 제가 노는 것을 거부하더군요.”
“예? 몸이요?”
“네, 20년을 하루에 12시간 이상씩 일했습니다. 기획조정실이 그래요, 사실 휴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24시간 스탠바이 시스템이었으니까. 그나마, 세상이 바뀌면서 201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덜 하였지만요.”
“허어? 아니, 사람이 그렇게 일하고 어떻게 삽니까?”
“그냥 버티는 거지요. 그에 대한 대가는 확실하였으니까요.”
미친 거 아닌가?
“하여간 그렇습니다. 그렇게 20년을 넘게 살다가, 갑자기 백수가 된 거지요. 처음 한 달은 정말 좋았습니다. 소원하였던 와이프와 여행도 다니고, 골프도 마음 편하게 치러 다니고, 그동안 만나지 못하였던 친구들도 만나고···.”
“그게 아버지 말을 들어보니, 얼마 못 가서 환장한다고 하던데요?”
“하하하! 회장님 춘부장 어르신 말씀이 맞습니다. 게다가, 저는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던 놈이었고요. 그런데, 진짜 그 생활을 석 달쯤 지속하니까, 이건 뭐 고문이더라고요?”
“하하! 그러셨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남 사장님은 일찍 출세하셔서 그렇지, 아직 젊으시잖아요? 같은 연배분들은 대부분 부장이나, 빨라야 이제 이사를 달기 시작하였을 테니까요.”
“맞습니다. 제가 엄청나게 빠른 편이지요. 이러니 친구들은 한창 바쁜데, 제가 술이라도 먹자고 하면 처음에는 잘 나오다가, 나중에는 곤란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노니까 슬슬 아파트 이웃들 보기도 민망해지고 말입니다.”
“그렇군요.”
“하아! 정말 눈을 뜨고서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딱 삼 개월 만에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예전에 주도하여 구조조정을 하여 내보냈던 사람들이 생각나더군요. 그나마, 나는 보상이라도 과할 정도로 받아서 먹고 사는 것이라도 걱정이 없지만, 그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
괜히 실업이 사회적인 살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사람 하나 잡는 거지.
“그래서, 슬슬 여기저기 알아도 보고 했는데, 정말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룹사에 최적화된 몸인데 그룹사에는 갈 수가 없고, 중견 같은 경우는 이전에 제 위치가 너무 올라갔었다 보니 서로 부담스러웠지요.”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허송세월 보내면서 여행이나 다니고, 이거저거 배우러 다니면서 소일하는데, 몇 달 전에 미국에 장 형을 보러 가서 신세타령하니까 나보고 조금만 기다려 보라고 했습니다. 내게 안성맞춤인 일자리가 곧 나올 테니까 있어 보라고요.”
“응?”
뭐냐?
제프리 형은 몇 달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워낙 헛소리는 안 하는 친구인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믿고서 기다렸지요. 그리고, 며칠 전에 연락이 와서 하는 말이, 친동생 같은 놈이 일을 벌이고 있는데, 나보고 수습하라고 하더라고요?”
“푸하하하!”
어지간히 한국에서 내가 벌리는 일들이 불안했나 보다.
“그래서, 회장님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는데, 이야! 이거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리 뒤늦게 투자에 대한 재능을 꽃피우신 겁니까?”
“아유! 과찬이십니다.”
“아닙니다. 장 형이 다는 말하지 않고 AMD와 엔비디아 두 가지만 이야기 해주었는데, 정말 경이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한국에서의 일은 왜 그렇게 하시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였고요.”
“그래서, 사람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하여간, 장 형의 말을 듣는 순간, 아! 이 자리는 내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성과 부딪힐 이유도 없고, 게다가 복지 사업도 그렇게나 적극적으로 하시는 것도 마음에 무척 들었고요. 다만,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영리사업 쪽이 상당히 체계가 안 잡힌 것 같은데, 이 부분만 잘 컨트롤하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남정원 사장은 어지간히 내가 하는 일들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았다.
자신이 평생 배웠고, 잘할 수 있는 일자리였을 테니까.
그럼, 형식적인 인터뷰라도 이만하자.
본인이 제프리 형 말과는 다르게 적극적이고, 나야 염주와 제프리 형의 보장을 받았으니 더 끌 이유도 없었다.
“남 사장님, 저는 앞으로 한국에도 미국만큼은 아니더라도 투자를 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리저리 벌려놓은 일도 꽤 있고요. 이런 모든 한국에서의 사업을 나를 대신하여 컨트롤 해주실 분이 필요합니다. 다행히 남 사장님께서 적임자 같고요.”
“...”
“어떻습니까? 사성에서 20년을 일하셨으니, 남은 20년은 저와 함께 하시는 것이? 권한은 최대한 드릴 것이고, 대우도 최상으로 해드리겠습니다.”
순간, 남정원 사장이 벌떡 일어나며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열심히 하여, 실망하게 해드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반갑습니다!”
“하하! 반갑습니다!”
나는 남정원 사장의 손을 굳게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