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아주 팍팍 밀어주자고!
서재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 새끼는 내가 파워볼에 당첨된 돈을 종잣돈으로 삼아 오늘의 천문학적인 부를 일군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말하는 꼬라지로 봐서는 내가 그 일이 밝혀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도 아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같은 음흉한 쌍판으로 나를 미스터 파워볼이라 부른 것일 터이고.
“아시고 계셨군요.”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나는 미국 대통령이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비밀을 알고 있고, 알아낼 힘을 가지고 있지. 그냥 한마디만 하면 돼. 알고 싶다고 말이야.”
“...”
“자네가 파워볼에 당첨된 돈으로 여까지 온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야. 파워볼이야 엄청난 행운이 따라준 것이지만, 고작 10억 달러를 가지고 5년 만에 100배 이상으로 재산을 불리다니?”
“...”
“아니 100배가 뭐야? 하여간 내가 사업을 해봐서 아는데, 정말 기적 같은 수익률이었네! 이건 온전히 자네의 실력이고! 내가 자네 보고서를 받고서 얼마나 탄복하였는지 모른다고?”
내가 해봐서 아는데?
이거 어디서 많이 들었던 멘트인데?
어디서 들었더라?
“흐음,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자네는 정말 아메리카 드림의 표본 같은 사람이야. 오로지 미국에서만 가능한 일이지! 그렇다면 좀 더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렇군요.”
“그렇지. 이제 자네가 미국에서 받은 은혜를 보답해야 할 기회가 온 것이네. 그리하면 나는 매우 기쁠 것이야. 아니라면 무척이나 섭섭하겠지?”
망할 영감탱이가 대놓고 협박질이네.
무척이나 섭섭하겠단다.
자그마치 미국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말이다.
하긴, 내가 봐도 엄청나게 섭섭해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섭섭함은 치졸하게 내가 파워볼로 종잣돈을 만들었던 일을 언론에 흘리거나, 세무당국이나 이민국이 우리 집이나 사무실로 난입하는 것으로 확실하게 표시할 것 같았다.
아니, 그럴 것이 틀림없었고, 그렇게 되면 나는 무척이나 곤경에 빠질 것이다.
아니꼽지만 그는 미국 대통령이니까.
솔직히 내가 파워볼에 당첨되었던 일이 언론에 흘러나가는 것이 반갑지는 않지만, 내가 무슨 데미지를 입을 일은 아니다.
좀 쪽팔리면 그만이니까.
아니 쪽팔린다는 생각도 지극히 한국적인 사고방식이고 미국에서는 그리 쪽팔릴 일도 아니다.
그저 내 성향이 그런 식으로 까발켜지는 것이 싫을 뿐이지.
다만, 트럼프가 다른 방식으로 대통령의 힘을 이용하여 나를 괴롭히면 정말 괴롭게 될 것이다.
잘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삑사리 나면 여러 사람이 피곤해질 것 같았으니까.
“제가 어떻게 성의 표시를 하면 섭섭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도널드?”
“오오! 으하하하! 역시! 자네는 사업을 아는구먼! 내가 사람을 잘 봤어!”
“원하시는 것을 말씀해 주시면 최대한 맞추어 보지요.”
“우선 한국은 아직 거의 코로나바이러스 청정지대라 할 만큼 방역에 성공하고 있으니, 우리 미국에 방역 물자를 좀 더 지원해주게. 한계라고는 하지만, 쥐어짜면 여지는 있을 걸세”
“알겠습니다.”
처음에 죽는소리를 하였지만, 이 정도는 이미 트럼프가 날 보자고 할 때부터 예상하였다.
그래서 오기 전에 한국에 연락하여 쥐어짜 보라고 해놓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백신, 백신이 필요해. 우리 전문가들이 평가하기에 자네의 백신은 우리 제약사들의 백신보다 최소한 8개월에서 1년 정도 앞서 있다고 하더군. 나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백신을 받고 싶네. 그리고 우리 미국에서 직접 생산할 수 있는 권리도”
“...”
이건 뭐 칼만 안 들었지 날강도나 다름없잖아?
그래 주자.
어차피 백신은 우리만 생산해서는 세계 케파에 대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적어도 반년 정도 후에는 지역별로 거점을 잡아서 풀려고 하였으니까, 이참에 생색이라도 내면서 주지 뭐.
설마 꽁으로 달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까.
“첫 양산분부터 한국과 동시에 미국에서도 접종할 수 있도록 해드리지요. 그 정도면 되었습니까?”
“으하하! 그럼! 그 정도면 훌륭하지!”
“그리고 미국의 제약사와 협의하여서 가능한 한 이른 시일 안에 미국 내에서 백신을 생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거 공짜는 아닙니다? 정당한 대가는 받아야 한다고요?”
“그야 이를 말인가? 이 친구가 나를 무슨 날강도 취급을 하네?”
“...”
당신 강도 맞거든?
“지나치게 비싸게 부르지만 않으면 적당한 가격을 치를 것이네”
“애초에 백신 가지고 돈 벌 생각은 없었으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나 같으면 이참에 한몫 단단히 챙길 것인데? 자네, 생각보다 무르구먼?”
“뭐, 사람마다 장사하는 법은 다 다르니까요. 저는 굳이 이런 것으로 돈을 벌지 않아도 됩니다. 괜히 욕이나 먹겠지요. 몇 푼을 더 벌려다가 말입니다.”
“푸하하! 맞아, 자네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 굳이 욕먹으면서 무리할 필요는 없지. 그래도 몇 푼이라니? 그래도 전 세계적으로 몇백억 달러는 벌 텐데, 몇 푼?”
그래, 내게는 몇 푼이다.
당신이 악착같이 부동산으로 번 돈도 마찬가지로 푼돈이고.
“네, 몇 푼입니다. 지금으로서도 몇 푼이고, 앞으로는 더 할 겁니다. 그냥 없는 돈으로 쳐도 될 만큼 말이지요.”
“호오? 자네가 투자한 종목들이 요즘 들어서 더 오른다고 하더니만, 정말 대단하군?”
“그저 ‘엄청난 행운’의 일부입니다.”
“크하하하!”
내가 아까 트럼프가 했던 말을 인용해서 대답하자, 트럼프는 뭐가 즐거운지 배꼽이 빠지도록 웃어 대었다.
“대단해! 정만 대단한 친구야! 이보게 친구, 혹시 내 재산도 신경을 써줄 수 있을까?”
이 영감이 이젠 사적인 욕심까지 부리네?
“미안하지만, 그건 뭐라고 말씀하셔도 안 됩니다.”
“아니 왜? 그저 자네가 투자할 때 슬쩍 끼워 넣으면 되지 않나?”
“다들 그렇게 말하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돈은 부담스러워요. 그러다 보면 온전히 내 돈을 투자할 때처럼 냉철하게 하지 못하고요. 차라리 돈을 내놓으라면 내놓겠지만, 투자는 절대로 받지 않습니다. 심지어 부모 형제 같은 사람들의 돈도 그래서 받은 적이 없습니다.”
“이거 섭섭한데?”
“하아, ‘섭섭’하시지 않게 도널드의 캠프에 선거 자금을 좀 내겠습니다.”
“하하하! 이거 내가 참 나쁜 사람이 되지 않나? 하지만 준다고 하니 고맙게 받겠네”
“...”
딱 열 배 이상이다.
민주당 대선 캠프에는 트럼프 캠프에 뜯기는 자금의 열 배 이상을 기부해야겠다.
하여간 이제 줄 것은 다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봐, 알렉스! 고마워. 이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고맙다고 하는 것이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거야”
“그렇게 고마우시면 제게도 뭐라도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음? 으하하! 그렇지! 뭐든지 말해 보게. 자넨 이젠 미국의 친구이자 내 친구니까”
친구 되는 거 더럽게 비싸네.
어쨌든 본의 아니게 내가 방역 물자를 추가 지원하고 백신을 우선하여 지원하기로 함에 따라, 트럼프 재선에 엄청난 도움을 주는 셈이다.
뭐라도 받아 내야 한다.
“일단 제 뒷조사를 어디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깔끔하게 지워주시지요? 이건 부탁이 아니라 당연히 해주셔야 하는 겁니다.”
“하하! 알았네. 자네에 대한 보고서는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존재하지 않을 것이야.”
“그럼 되었습니다.”
“응? 부탁은?”
“솔직히 나는 부탁할 것이 없어요. 내가 뭐가 있겠습니까?”
진짜로 나 개인적으로는 트럼프에게 아쉬워할 것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럼?”
“나는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이 있겠죠. 알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흐음, 너무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았으면 싶은데?”
“도널드”
“왜?”
“저 나가면 바로 발표할 생각이지요? 도널드 덕분에 한국에서 추가 방역 물자를 지원하고, 세계 최초로 미국민이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을 접종받게 될 것이라고요?”
“당연하지 않나? 또 내가 그렇게 한 것도 사실이잖아?”
“...”
하긴, 이 트가 놈이 난리를 친 덕분에 미국민이 더 많은 방역 물자를 지원받고, 최소한 서너 달은 먼저 백신 접종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민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것이지.
그러고 보면, 영업 판에서도 진상 손님이 항상 뭐 하나라도 더 가져가면 더 가져갔다.
오히려 단골 고객은 단골이니까 이해하리라고 생각하여 본의 아니게 홀대받는 경우가 많았고.
참 아이러니한 일이 구만···.
“하여간 도널드가 발표하면 지지율도 많이 올라가겠지요?”
“그야 당연하지. 내가 너를 붙잡고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특히 백신 이야기는 파급효과가 엄청날걸?”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까? 이거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자꾸 그러시면 저도 생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만?”
“어흠···.”
“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미국의 이익과 배치되는 요구나 도널드가 할 수 없는 말씀은 안 드릴 테니까요.”
“그렇다면야, 뭐”
“며칠 내로 다시 찾아뵈겠습니다.”
“그래, 연락해”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
백악관을 완전히 빠져나오기 전에는 혹시나 하여 침묵을 지키다가 해리가 보안 상태를 다시 확인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트럼프가 뭐라고 하냐?”
“뭐 예상한 대로죠. 아니 그 이상이지”
“뭐라 했는데?”
“그 미친놈이 말이죠···.”
나는 백악관에서 트럼프와 있었던 일을 제프리 형에게 자세히 설명하였다.
“아니 미친놈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진짜 미친놈이잖아? 일반 기업인을 협박해? 허어! 기가 막혀서!”
“그러니까 말이요.”
제프리 형도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연신 뻑큐를 외치면서 트럼프 욕을 해대었다.
“그래서 어쩌려고?”
“뭘 어떻게 해요? 상대는 미국 대통령인데? 일단은 해달라는 대로 해주어야지”
“빌어먹을! 휴우, 그래 어쩔 수가 없네. 그럼 트럼프에게도 선거 자금을 줄 거냐?”
“준다고 했으니까 줘야죠. 대신 민주당 후보에게는 그거에 열 배는 주려고요.”
“그러자. 아주 팍팍 밀어주자고! 트럼프 자식, 정말 재선하게 내버려 두었다가는 큰일 나겠다.”
“아! 잠시만요. 해리!”
“네, 보스!”
“우리 보안은 확실하죠?”
“헨리가 직접 신경 쓰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우리 집하고 회사 전체 보안 점검 좀 부탁해요. 즉시 말이에요.”
“알겠습니다.”
“돌아가는 즉시 한국과 화상회의를 할 겁니다. 그것도 점검해 달라고 하고요.”
“네, 보스”
트럼프 놈이 도청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워터게이트처럼 정적을 도청하는 것도 아니고 외국인이 소유한 기업과 외국인이다.
안보 같은 명목을 가져다 붙여서 도청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한국하고 회의하려고?”
“그래야죠. 백신 건도 말해야 하고, 무엇보다 트럼프에게 요구할 것도 상의해야 하고요.”
“그런데 진짜 뭘 요구하냐? 너나 미국의 카르마 인베스트먼트는 요구할 것이 없을 텐데?”
“그래서 한국에 있는 분들하고 회의하는 거예요. 나는 아니라도 우리나라라도 뭔가 있겠죠.”
“트럼프는 이번 임기로 끝난다고 생각하고 요구하는 것이 좋을 거야. 여론도 점점 안 좋아지고 있는 상황인데, 네가 선거 자금을 투입하면 웬만해서 이기기 힘들 것이니까”
“그럴 생각이에요.”
곧바로 LA로 돌아간 나는 바로 한국과 화상회의를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