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귀찮기만 한 회사들이지요.
“여기 음식이 괜찮습니다. 주인장은 창원 출신이고, 부인은 여수 출신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남쪽 음식들의 정수만 모아 놓았더군요.”
“아, 그래요? 여기는 자주 내려오나 봅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내려옵니다. 방산은 우리 집안의 뿌리나 다름없으니까요.”
“호오? 지금은 다른 계열사 대표로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하하하! 대주주의 특권이라고 해두지요.”
김종건 사장은 굳이 맛집이 있다고 하면서 창원 쪽으로 나를 데리고 왔는데, 1시간이나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이 집 음식이 제대로였다.
내가 좋아하는 제대로 만든 간장 게장에 깔끔한 밑반찬들.
김 사장 말로는 지역을 배려해서인지, 전라도와 경상도 반반이라고 했지만, 내가 먹어본 바로는 확실히 전라남도식 음식이었다.
딱 내 스타일이다.
덕분에 분위기는 나쁘지 않게 시작할 수 있었다.
“사실은 제가 내년부터 그룹의 방산 부문을 총괄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요즘 부쩍 자주 내려오고 있습니다. 원래부터 관심도 많았고요.”
“이야기는 들었어요. 사성의 방산 부문을 인수한 것도 김 사장님 역할이 컸다고 하더라고요.”
“하하! 정룡이 형님에게 그냥 달라고 사정했지요. 어차피 부담스럽지 않냐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군요.”
사실 사성이 방산 계열사들을 정리한 것은 그룹의 이미지 때문이었다.
세계적으로 초일류 기업인 사성으로서는 방산도 규모가 작지는 않았지만, 그룹 전체로 보면 비중이 미미한 방산 부문으로 인하여 죽음의 무기 상인이라는 일부의 시선이 달갑지 않았던 거다.
게다가 상속 문제로 이런저런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고.
반면에 화나는 그룹의 근간 자체가 방산부터 시작했으니 그런 시선 따위는 의식할 필요가 없었고.
그런 부분을 김 사장이 파악하고 이정룡 부회장에게 매달린 모양이었다.
뭐, 서로 주고받을 것은 다 주고받았겠지만 말이다.
“일단 드시면서 말씀을 하시지요.”
“그럽시다.”
한참을 한담이나 나누면서 술을 주고받았고, 좀 얼근해지자 김 사장이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식사 요청이었는데 흔쾌히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사실 거절당할 줄 알았거든요. 강 회장님께서는 국내 재계 인사들하고는 교류를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요.”
“일부러 피한 것은 아니고, 그저 만날 필요가 없을 뿐이었습니다. 오늘은 배가 고팠고요.”
“시장하셨군요.”
“네, 무척이나 배가 고팠습니다. 그런데 1시간이나 차를 타고 창원으로 데리고 올 때는 하마터면 차 돌리라고 할 뻔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잘 왔다고 생각하고요.”
“하하하!”
진짜라고.
난 정말 오늘따라 유난히 배가 고팠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이거 아버지가 들으면 절 질투할 것 같습니다. 여러 번 뵙자고 요청했는데, 아직까지도 못 뵌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앞에도 말했지만, 만날 필요가 없었을 뿐입니다. 내가 거의 미국에만 있다 보니 국내에 어쩌다가 들어오면 시간도 없었고요. 게다가….”
“게다가?”
“그냥 솔직히 말할게요.”
“하하! 그러시면 좋지요.”
“난 서민 출신이에요. 뭐 아버지가 조그만 사업을 하다가 대차게 말아 드셔서 내 연배에서는 흔하지 않게 이집 저집을 전전하는 고생도 해봤고요. 그러다 보니 체질적으로 재벌분들하고는 잘 맞지 않습니다. 이미 내가 재벌들을 뛰어넘었지만, 그건 고쳐지지 않고, 굳이 고쳐야 할 필요성도 못 느끼고 있습니다.”
“아….”
“그래서 우리나라 재벌기업 오너 분들이 만나자고 하여도 만나지 않는 겁니다. 불편하거든요. 게다가 2세라도 지금은 대부분 70대 이상이잖습니까? 나이 차까지 그렇게 나니 더 불편하지요. 그것뿐입니다.”
“그렇군요. 자수성가하신 것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고생이 심하셨던 것은 몰랐습니다. 저도 솔직히 말하면 전 솔직히 서민들의 그런 아픔을 잘 모릅니다. 알 리가 없잖습니까?”
알 리가 없지.
태어나면서부터 다이아몬드 수저를 입에 물고 나왔으니까.
손만 뻗으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고, 입만 열면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을 거다.
살아온 과정이 완전히 틀린 데, 김 사장이 마치 서민의 아픔을 이해한다고 했으면 내가 화를 냈을 거다.
하여간 나는 개천에서 용이 된 사람이다.
어떻게 해도 기존 재벌들과 만나면 불편하다.
자라온 환경이 완전히 다르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재벌들은 재벌들끼리나 적어도 고관들의 자식들하고 끼리끼리 만나고 결혼하고 하는 거겠지.
그래야 잘 사는 것 같고 말이다.
“그렇지요. 잘못된 것도 아니고요. 그렇게 태어났을 뿐이지요.”
“맞습니다. 학창시절에는 그런 주변의 시선이 참 싫었는데, 이젠 그러려니 합니다. 제가 서민 코스프레를 한다고 해서 그들의 아픔을 알 리도 없고요. 다만, 저 나름대로는 불필요하게 위화감을 조성하거나 상처를 주지 않게 하려고 노력은 하는 편입니다. 그래봤자 재벌 3세 딱지가 어디로 가지는 않겠지만요.”
“그 정도만 해도 괜찮다고 봅니다. 너무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는 마세요.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습니다.”
“하하! 맞습니다.”
“그래요,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오늘 절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뭡니까?”
“솔직히 여쭈어봐도 될까요?”
뭘 여쭙기 씩이나 하냐.
그냥 물어보면 되지.
김 사장은 나보다 몇 살이 많은 사람인데, 아무래도 내 위치가 위치이다 보니 자세를 바짝 낮추는 것 같았다.
“네, 저는 솔직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도 아주 말이지요.”
“그럼 솔직히 여쭙겠습니다. 사실 그룹 내에서 회장님께서 계속하여 방산업계에 진출하시는 것을 두고서 말이 많습니다. 아니 우려가 크다고 해야 하나요?”
“…….”
“잘 아시겠지만, 우리 집안은 화약으로 일어난 집안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방산에 관한 생각이 다른 재벌사들하고는 다릅니다. 집안의 뿌리이니까요.”
“이해합니다.”
“그 와중에 최근에는 우리 그룹을 비롯한 다른 그룹의 방산 부문 계열사들의 주식까지도 매집하니, 그 위기감이 절정에 달했습니다. 아버지가 계속 뵙자고 한 것도 그래서였을 거고요.”
“그래서 묻고 싶은 것이?”
“실례인 줄은 알지만, 어디까지 방산 분야로 진출하실 것인지에 관하여 물어 봐도 되겠습니까? 우리 집안의 그룹에 대한 지배구조는 다른 그룹에 비하여 단단한 편이지만, 솔직히 회장님의 재력으로 공세를 하시면 당해 낼 수는 없습니다.”
“이미 물어본 것 같습니다만?”
“하하하! 그렇군요.”
역시 짐작은 했지만, 최근의 우리 카르마의 행보가 불안한 모양이었다.
“솔직하게 물어보셨으니, 나도 솔직하게 대답해 드리지요.”
“네.”
“나는 한국의 방산업계를 지배한다거나 같은 생각을 한 적은 없습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나라 방산 회사들을 다 합쳐도 내게는 새 발의 피입니다. 그거 다 팔아도 현재 내 재산의 5%도 안 될 겁니다.”
“예? 국내 방산 회사를 다 합쳐도 말입니까?”
“네. 협력회사들까지 다 합쳐도 안 됩니다.”
“기가 막히는군요….”
김 사장은 정말 기가 막히는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다 말고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게다가 돈도 안 돼요. 국내 방산계열 회사들 1년 순이익을 다 합쳐도 미국의 카르마 인베스트먼트의 자금 운용팀이 벌어들이는 1주일 수익에도 미치지 못할 겁니다.”
“…….”
“한마디로 돈도 안 되면서 귀찮기만 한 회사들이지요.”
“그렇다면 왜?”
“시작은 정부의 권유로부터입니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에서 가지고 있던 대기업 몇 개를 털고 싶어 했는데, 우연히 그중에 방산 업체가 끼어 있었을 뿐입니다.”
“아….”
“거기다가 그 기업들을 인수하면서, 내 취미가 발동했고요.”
“취, 취미요?”
“내 취미입니다. 내 취미가 밀덕이거든요?”
“밀덕이라고 하심은…. 군사 마니아?”
“네, 그런 쪽입니다. 하여간 그게 발동하여서 관심이 더 갔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인수하고 투자했던 겁니다.”
“세상에…. 취미로 방산 업체를 사 모으시다니….”
“뭐, 어때요? 성덕이라고 하죠? 성공한 덕후?”
“…….”
김종건 사장은 완전히 얼이 빠져서 나를 쳐다보았다.
자기네 화나 그룹이 그래도 한국에서는 방귀 좀 뀐다는 회사다.
김 사장의 아버지인 김 회장이 여러 가지로 물의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사업에는 확실히 수완이 있어서 그룹의 사세가 커져서 재계서열 6위까지 올라간 상태니까.
그런데, 그런 자신들이 내가 방산업에 진출하는 것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건만, 알고 보니 취미생활의 일환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황당할까?
“정 이해하기가 힘들면 조금은 애국심도 들어가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제 되었습니까?”
“그럼 오늘 막 지르신 것도?”
“아! 그건 다른 문제입니다. 말씀드리기 곤란한데, 내가 쓸 데가 있어서요.”
“투자하시는 분이 최신 전차 200대에, 자주포 200대, 다연장 로켓 100대, 그리고 전투기 50대를 어디에 사용합니까?”
“다 이유가 있다니까요? 이건 비즈니스 판단으로 발주한 겁니다. 더는 묻지 마세요.”
꿈에서 전쟁이 났다고 어떻게 말하냐?
“하여간 김 사장님의 아버지, 그러니까 김 회장님에게 잘 말하세요. 나는 화나 그룹의 경영권 따위 같은 것은 추호도 욕심이 없다고요.”
“네….”
“야구도 맨날 꼴찌나 하는데….”
“회장님! 그 말씀은 좀 심하십니다.”
“아, 그건 좀 미안하네요.”
“…….”
어떻게 보면 이 사람들은 참 좋은 사람들 같다.
화나 호크스가 그렇게나 꼴찌만 하는데 그래도 끌고 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보살이 따로 없네, 보살이 따로 없어.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일어설 때다.
“저기 회장님….”
“네?”
“한국에 오시면 가끔 찾아뵙고 인사드려도 되겠습니까?”
“뭐 안 될 것이 있겠어요? 배고프면 오세요. 내가 살 테니까.”
“감사합니다.”
“같이 야구장을 가는 것도 괜찮겠네요.”
“…….”
난 은성 쌍둥이 팬이다.
***
“형네 쪽은 좀 어때요?”
“계속 대기업 계열사로 있던 의류 부문을 인수하는 중이야. 요즘은 기업들마다 비주류 계열사들을 정리하느라 매물이 잘 나오거든.”
“그래요? 뭐 부족한 것은 없고?”
“있을 리가 있냐? 네가 자금을 그렇게 빵빵하게 지원하는데? 그러고도 못하면 사업 접어야지.”
“흐흐흐! 하여간 형님하고 싶은 데까지 얼마든지 해봐요. 돈은 걱정하지 말고.”
“알았다, 그리고 고맙고.”
“고맙기는 뭘.”
재하 형이 총괄하는 의류 부문은 이제 제법 커져서, 적어도 국내 의류 시장에서는 복종 불문하고 절대강자가 되었다.
하지만, 자라나 H&M, 그리고 유니클로 정도가 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할까?”
“어떻게 하지? 오늘은 선약이 있는데.”
“그럼 다음에 하지 뭐.”
“그래오, 괜찮으면 내일 먹읍시다.”
“알았다.”
4시가 좀 넘어서 일찍 퇴근하여 기사보고 서초동 사성 타운으로 가라고 했다.
오늘 선약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내 귀여운 여동생 소미다.
오랜만에 같이 저녁을 먹기로 한 것이다.
소미는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사성 전자에 공채로 입사했다.
내가 우리 카르마 소유 기업에 들어가든지 하라고 했는데, 그냥 내 동생이라는 것을 모르는 회사에서 2~3년이라도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하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한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소유한 기업에 들어가면 공주 대접을 받을 테니, 내가 생각하여도 제대로 사회 생활을 배우려면 그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1월에 이정룡 부회장이 영어의 몸이 되기 전에 내게 연락을 했었다.
여동생이 입사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드리면 좋겠냐고 하면서.
하여간 사성은 참 빠르단 말이야?
나는 아무도 모르게 해달라고 했고, 어떤 특혜도 주지 말라고 했다.
그러는 것이 소미에게 좋으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신입 사원 생활을 하는 우리 소미.
오늘은 만나서 격려 좀 해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