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그 이야기였어?
머리가 멍하였다,
살다 살다 가 이런 병에 걸리다니?
그것도 그렇게나 사랑스러운 유진이가?
한동안 유진이의 마력에 빠져서 씌여졌던 콩깍지가 완전히 벗겨지자, 이제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애초에 그 비범한 사랑 솜씨가 말이 안 되는 거였다.
요즘 세상에 20대 후반의 여자애가 남자관계가 없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확실히 유진이는 평범함을 한참 뛰어넘었다.
웬만한 경험으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제기랄!
주사를 맞고 병원을 나와서 회사로 돌아간 다음에 조용히 비서를 불렀다.
남자 비서를.
“저기, 장 비서….”
“네, 회장님”
“그게 말이지….”
아이 씨, 쪽팔리게….
“내가 요즘 만나는 이유진 씨 있잖아요.”
“네, 회장님”
“뒷조사를 했으면 싶거든?”
“네? 아….”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는데….”
“하하하! 알겠습니다. 어느 정도로 할까요?”
“탈탈….”
“탈탈?”
“탈탈 털라고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특히 남자관계를 중심으로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해요. 남정원 부회장이나 이재하 사장도 모르게”
그 양반들이 알게 되면 두고두고 안주로 씹힐 거였다.
“알겠습니다.”
유진이에게서 계속 깨톡이 왔지만, 적당히 응대하면서 이틀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장 비서가 조사 결과를 보고하러 내 방으로 들어왔는데, 어째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회장님….”
“편하게 보고해요.”
“그게 좀 민망해서요.”
“대체 어떻길래?”
“송구합니다만, 아무래도 이유진 씨는 좀 그렇습니다. 사생활이 많이 문란하더군요.”
“문란?”
“네….”
“파일 이리 내봐요.”
얼마나 열심히 조사를 했는지 파일이 장난 아니게 두꺼웠다.
그리고, 잠시 후.
“아흑….”
“소, 송구합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였지만, 조사 결과는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색정광(色情狂)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이걸 뭐라 표현해야 하나?
문란? 난잡?
아니 무슨 여자가 성인이 된 이후로 항상 분대 병력을 만나고 다니냐고?
심지어 나와 거의 매일 관계를 가지는 와중에도 세 명의 다른 놈팡이와 하고 다녔단다.
그리고 뭐가 이렇게 국제적이야?
이란인에다가 일본인, 게다가 주한 미군까지?
다국적군인가?
하여간 이게 무슨 개쪽이지?
“젠장….”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요? 조사 자료 전부 폐기시키세요!”
“네, 회장님”
“그리고 알죠?”
“네, 회장님. 무덤까지 비밀로 하겠습니다.”
“믿어도 되지요?”
“믿으십시오!”
“하아! 스위트룸도 끊어 버려요.”
“네, 회장님”
“그리고, 이거 수고하였으니까 가져가고….”
“아니 이런 것은 필요 없습니다.”
“쓰읍! 내가 불편해서 그래요.”
어디서 불기만 해봐라.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요, 나가 보세요.”
장 비서가 나가고 어쩌다가 내가 이런 요물에 빠졌었는지 자책을 하는 와중에 유진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한참을 울리게 내버려 두다가 전화를 받았다.
“아이, 오빠도 참?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
“...”
“오빵, 우리 오늘 거기서 만나는 거지? 나 오늘 마법 끝났거든? 헤헤헤!”
마법이 끝났든 저주가 끝났던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
“오빠? 여보세요?”
“유진아”
“웅, 오빠”
“조지 타이손, 무함마드 다스탄, 아베 야스히로….”
최근에도 유진이가 만난 놈팡이들 이름이다.
“오, 오빠….”
“오빠라고 부르지도 말고, 다시는 연락하지 마”
“...”
“아, 그리고…. 나, 병원에서 임질이란다. 너도 치료받고, 양심이 있으면 그 놈팡이들에게도 알려줘. 더러운 병을 옮기고 다니지 말고….”
“...”
“그리고, 그 버킨인지 던킨인지 빽은 너 가져라. 끊는다.”
“오, 오빠….”
전화를 끊어버렸다.
“크….”
“천천히 마셔, 임마!”
이틀 후에 정훈이를 불러내서 소주를 마셨다.
병원에서는 가능하면 당분간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였는데, 치료가 며칠 늦어지더라도 오늘은 술을 마셔야겠다.
정훈이에게는 병에 걸린 것만 빼고서 대충 이야기해줬다.
“햐! 그렇게 이쁜 애가 참….”
“임마, 얼굴값 한다는 말도 있잖아? 그리고 어째 심미라 걔 반응이 영 이상하더니만….”
“응? 걔가 뭐라고 했는데?”
“그때 특별하게 말한 것은 없는데, 나중에 전화로 나보고 너하고 친한 사이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그래서는? 제일 친하다고 했는데, 걔가 좀 머뭇거리더니 유진이 걔 자기 친구지만 남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
“근데 임마 입을 닫고 있었어? 말을 해줘야 했잖아? 네가 친구냐? 친구야? 이 나쁜 자식아!”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정훈이 자식이 일찍 이야기 해줬어도 이렇게는 안 되었잖아?
“야 이 미친놈아! 내가 전화했더니 바쁘다고 끊으라고 한 놈이 누군데? 그리고 내가 네놈이 걔랑 사귀는 줄 어떻게 아냐? 네가 말도 하지 않고서는?”
“그, 그랬냐?”
“게다가 심미라 걔가 그렇게 말하니까, 친구 사이에 질투하는 것 같아서 계속 너에게 알려주려고 하기도 뭐 했다고”
“젠장! 제기랄! 빌어먹을!”
“고만 발광하고 술이나 마시지?”
“아흐….”
“너희 진도가 꽤 나갔나 보네?”
“시끄럽다!”
“흐흐흐! 병신!”
“됐고, 너는 심미라 걔 안 만났냐?”
“그날 보고 잊어버렸지”
“왜 걔도 미인이던데? 너와 같이 회사 다닐 때부터 널 마음에 둔 것도 같고?”
“그냥, 같은 팀에 있을 때도 친하게는 지냈는데, 왠지 끌리지가 않더라고”
“제기랄! 대체 우린 언제 장가가냐?”
“왜? 집에서 뭐라고 하냐?”
“엄마가 난리도 아니지”
“참 너도, 어지간하다. 그 허우대에, 그 많은 재산에….”
“닥치고 술이나 마시지?”
“흐흐흐! 그러자”
뭐, 언젠가는 생기겠지.
그리고 다음부터는 조사부터 들어가야겠다고 다짐하였다.
한국에는 일주일을 더 있으면서 치료를 하고 미국으로 출발하였다.
내상이 심각해서 당분간은 한국 생각이 안 날듯하다.
****
“아니 이번에는 왜 그렇게 한국에 오래 있으셨어요? 특별한 일도 없으셨던 것으로 아는데요?”
“...”
미국으로 가니 벌써 5월 중순.
역시나 존이 난리를 쳐댔다.
“게다가 연락을 드리면 바쁘다고 끊어 버리기 일쑤였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 좀! 그럴 사정이 있었다니까는 그러시네?”
“섭섭합니다. 제가 아직은 보스에게 그 정도밖에 안 되었군요.”
“하아….”
이 양반이 정말, 우리가 사귀는 사이냐?
그래도 존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대충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크하하하하!”
“...”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건데?
“푸하하하!”
“그만 좀 웃지요?”
“크하하하…. 쿨록! 쿨록!”
“...”
아주 그냥 눈물을 흘리고 기침까지 하는 존이다.
존이 자지러지는 것을 보는 것도 처음이네.
“아! 죄송합니다, 보스”
“전혀 죄송한 표정이 아닌데요?”
“험험, 이렇게 웃어본 적은 정말 오랜만입니다.”
“어째 은근히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계속 여자들에게 물이나 먹고 다녔으면 좋겠어요?”
“네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보스께서도 사람이구나 싶어서요.”
“내가 사람이 아니면?”
“솔직히 가끔 보스의 예측 능력을 보면, 사람이 아니다 싶을 때가 많거든요. 그런데 유독 여자관계만 약하니 말입니다. 그 허우대에 보스의 지위를 가지고 말입니다? 푸흐흐흐!”
“그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한 번만 더 꺼내 봐라”
“알겠습니다, 보스!”
“그건 그렇고 업무 이야기나 하자고요.”
“네, 보스”
존은 그렇게나 처웃다가도 업무 이야기를 하자고 하니 바로 정색을 하면서 표정을 바꾸었다.
“우리 빅3 종목은요?”
“테슬라, AMD, 엔비디아 모두 횡보 중입니다.”
“흐음, 그것들 모두 가을쯤에는 다시 상승할 거예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이번 가을에는 빅3도 어느 정도는 정리할 생각이니 그렇게 아시고 준비해 주세요.”
“흐음, AMD도 말입니까?”
“뭐 AMD가 애착이 가는 회사임은 맞지만, 우린 투자가인데 영원히 들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렇기는 하지요.”
“그리고 지분 60%는 너무 많아요. 올해 안에 반 이상은 정리합시다. 에너지 쪽으로 돈도 많이 들고 있고요.”
“알겠습니다. 슬슬 시장에 떡밥을 던지도록 하겠습니다.”
“가능하면 누가 블록딜로 가져갔으면 좋겠는데…. 시장에 그 많은 주식을 풀면 난리가 날 것이고요.”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매수자를 물색하겠습니다.”
“하하! 존만 믿겠습니다.”
역시 디테일한 처리는 내가 어떻게 해도 존을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거의 타고났다고 봐야 하니까.
“에너지 쪽 투자는요?”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리엄이 며칠 이내로 진행 상황을 보고드릴 겁니다.”
“바쁘겠지만, 존이 신경을 많이 좀 써줘요. 리엄은 어쨌든 우리 회사에서는 처음 진행하는 프로젝트잖아요?”
“하하하!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신경을 꽤 쓰고 있습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믿습니다, 하하! 그리고 또….”
그렇게 보고를 받고 집에서 한 일주일을 쉬었다,
혹시 몰라서 항생제를 계속 복용하고 있었기에 술도 마시지 않았고.
당분간은 여자 생각도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5월을 거의 다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내 핸드폰이 울렸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음?
“여보세요?”
아, 알렉스?
“어? 조? 아니 웬일입니까? 전화를 다 주시고?”
으하하하! 내가 전화하면 안 되나?
“뭐 그건 아니지만요. 그래 무슨 일이십니까?”
아, 내가 조만간 LA에 방문할 예정인데, 그때 얼굴이나 보자고 연락한 걸세.
“그래요? 알겠습니다.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시면 시간을 비워 놓도록 하지요.”
으허허허! 그래, 그럼 그때 보세나.
“네, 조. 들어가세요.”
무슨 일이지?
바이든 대통령과는 많이 친해졌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저 얼굴이나 보고 싶다고 볼만한 사이는 아니다.
나야 그럴 수 있겠지만, 미국 대통령은 그야말로 시간이 금인 사람이니까.
하여간 만나보면 알겠지만.
며칠 후, 나는 바이든 대통령이 있는 곳으로 갔다.
저녁이 꽤 늦은 시각인데, 항상 그런 심야에 만나는 것이 버릇이 되다 보니 조도 그렇고 나도 그게 편하였다.
“어서 오게! 알렉스!”
“하하하! 조!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조 바이든 대통령은 나를 상당히 격하게 맞이해 주었다.
어째 느낌이 내게 바라는 것이 있나?
그럴 것 같은데?
그리고 그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오랜만이라 한참을 한담을 나누고 나서 본론이 나왔다.
“알렉스”
“말씀하세요,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티가 났나?”
“네, 확실히요.”
“하하하! 그럼 편하게 말하지!”
이거 살짝 긴장이 되는데?
“요즘 에너지 쪽으로 투자한다면?”
“네?”
에이, 그 이야기였어?
난 또 뭐라고.
근데 에너지 투자 이야기는 왜 꺼내지?
괜히 불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