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솔직히 경영은 잘 몰라요.
쫘악!
“아악! 누구야!”
토요일 아침, 어제 정훈이와 밤새 술을 퍼마셨지만, 주말이라 느긋하게 엎어져 자는 내 궁둥이에 강렬한 충격이 느껴지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누군 누구야? 네 엄마지!”
“아이 엄마! 자는 사람을 왜 때려!”
“이놈의 새끼가? 어디 엄마에게 소릴 질러?”
“아니 그게 아니라, 그렇잖아! 자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시끄러워! 이놈이 돈 좀 번다고 엄마에게 소리나 지르고 말이지!”
“…….”
돈 좀 버는 수준이 아니라, 겁나 많이 번다.
그건 그렇고 대체 자는 사람은 왜 때리냐고?
그래도 참자.
도저히 개길 상대가 아니다.
엄마니까.
우리 집안 서열은 오래전부터 부동이다.
망한 집안에서 어떻게든지 중심을 잡고 우리 가족이 해체되지 않게 노력한 우리 엄마가 부동의 넘버원이다.
심지어 아버지는 지금도 엄마가 한소리 하면 입도 뻥긋 못 하신다.
미안하니까.
망할 때 외가에까지 손 벌리게 했고, 급기야는 최저 시급을 받으며 마트에서 하루 종일 서서 발이 퉁퉁 불어터지도록 일하셨다.
할 말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다음 서열이 나다.
어떻게 보면 가장 큰 피해를 보았지만, 결국 집안을 일으켜 세운 것은 나였으니까.
이건 내가 미국 로또에 당첨되기 전에도 그랬었다.
세 번째는 우리 귀염둥이 소미다.
소미는 특별히 뭘 했다기보다는 그냥 존재 자체로 우리 가족을 밝게 만들고 기쁨을 주는 존재였다.
마지막은 당연히 우리 아빠다.
성실하고 사업 수완도 좋고 집에서도 좋은 아빠였지만, 결정적으로 보증을 서주어서 우리 가족을 한동안 힘들게 했으니까.
아빠가 보증을 서줬던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친구 보증 서주는 문화가 거의 없어질 때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 해준 거다.
정말로 최악의 판단이었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하여간 왜요? 오래간만에 느긋하게 잠 좀 자는데?”
“잠이 와? 잠이 오냐고?”
“그럼 안 와?”
“너 이놈 자식, 엄마하고 약속했어, 안 했어?”
“아, 뭘?”
“뭘? 올해 안에 결혼할 여자 만들어 온다고 했어? 안 했어?”
“지금은 6월 말인데? 아직 반년씩이나 남았거든?”
“반년씩? 반년 밖이겠지! 결혼이 애들 장난이야? 지금부터 사귀어서 언제 결혼하려고?”
“…….”
“시끄럽고, 엄마가 정말 참한 여자 알아봐 두었으니까, 선 봐.”
“아이 진짜!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요!”
“너 정말 엄마 말 안 들을래?”
엄마 눈이 은근히 가늘어졌다.
진짜로 폭발하기 직전이라는 신호다.
이럴 때는 경험상 정말 조심해야 한다.
“소미에게 먼저 보여줘요. 소미가 오케이 하면 나갈게.”
소미야!
이 오라방은 너만 믿는다!
“흥! 소미는 어제부터 일본 출장이거든? 다음 일요일에 들어와.”
“어, 어? 그런 게 어딨어?”
“어딨긴 뭐가 어딨어! 하여간 날 잡고 알려줄 테니까, 그리 알고 있어!”
“어, 엄마!”
쾅!
엄마는 내 애절한 외침에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 방을 나갔다.
“하아, 분가를 해야 하나?”
아무래도 분가를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
저녁이 되어 슬슬 나갈 채비를 했다.
“어제 그렇게 술을 퍼마셨으면서 또 어딜 나가려고?”
“약속이 있어요.”
“또 술 약속?”
“응, 현도 자동차 그룹 회장 하고 화나 2세하고, 은성 그룹 회장 하고 저녁 먹기로 했어.”
“그, 그래….”
엄마가 또 잔소릴 하려고 했지만, 어마무시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이거 가끔 이름 좀 팔아먹어야겠는데?
요즘은 토요일이 평일보다 더 막히는 것을 감안하여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오늘 저녁은 화나 김종건 대표가 괜찮으면 2세들 몇 명과 같이 저녁이나 하자고 해서 만들어졌는데, 지난번에 대동 광고를 끊어준 신세도 있고 하여서 내가 그러자고 한 것이다.
약속 장소인 꽤 깔끔한 한식집으로 들어가니, 지배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와서 나를 방으로 안내했다.
약속 시각에서 10분이나 일찍 왔는데 이미 세 사람은 먼저 와 있었다.
“어서 오세요, 회장님.”
“아, 김 대표님. 제가 좀 늦었나 봅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우리가 좀 일찍 온 것이지요. 자, 인사들 하시지요. 여긴 아시다시피 현도 자동차 그룹의 장우성 회장입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그렇게 뵈려고 해도 못 뵈었는데, 종건이 덕분에 만나게 되네요? 하하하!”
“하하하! 제가 미국에 살다 보니 결례를 했나 봅니다. 강철식입니다. 미국에서는 알렉스 강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은성 그룹을 맡고 있습니다. 구정모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구 회장님.”
인사가 끝나자 비워 놓은 상석에 나를 앉히려 하여 내가 사양하자, 제일 연장자인 장우성 회장이 입을 열었다.
“우리 상석 문화가 좀 우습기는 하지만, 우리 재계는 기본적으로 돈이 얼마나 많으냐로 철저하게 서열을 따지는 세계입니다. 강 회장님께서 상석을 거절하시면 저희가 불편합니다.”
“아, 네….”
마지못한 척하면서 상석에 앉았다.
여기 세 사람은 장우성이 50대 초반으로 제일 나이가 많고, 그다음이 은성의 구정모 회장, 막내가 김종건 대표다.
셋이 있었으면 재계서열과 나이 서열도 맞아 불편함이 없었을 텐데 내가 끼자 좀 이상해진 거다.
어쨌든 자리를 잡자 음식과 술이 나와 몇 순배씩 돌자 조금씩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지난번에 도와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에이, 그게 무슨 도움입니까? 솔직히 대동은 우리도 굉장히 껄끄러웠던 곳인데, 이참에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호오? 현도에서도요?”
“하아! 말도 마세요. 대동뿐만이 아니라 기레기들 비위 맞추느라 얼마나 신경을 써야 하는데요? 오죽하면 모든 대기업 홍보부 직원들이 기자 놈들 비위 맞추다가 받은 스트레스로 온갖 병이 다 걸린다고 하겠습니까?”
“허어! 그 정도예요?”
“공식적으로 나가 홍보비 외에 매번 봉투 찔러줘야 하고 술도 고급 술집으로 데려가서 접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별의별 음해를 다 하지요. 없는 애도 만들어내는 놈이 그놈들입니다. 그런 놈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있는 언론사 중의 하나가 대동이었고요.”
“정말 기가 막히네요.”
그 정도면 칼 안 들었지 강도나 다름없잖아?
“게다가 자기들끼리 죄다 연결이 되어있어서, 자기들 조금만 무시한다 싶으면 단결해서 달려드는데, 당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회장님이 이번에 박살을 내버렸으니, 얼마나 통쾌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그놈들이 왜 광고를 끊냐고 항의할 때 그저 카르마에 물어보라고 하면 그만이었거든요?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
장우성 회장의 말에 화나 김종건이나 은성의 구정모 회장도 정말 맞는다는 듯이 폭소를 터트렸다.
어지간히 맺힌 것이 많았나 보다.
뭐, 좋다니까는 할 말이 없지만.
그렇게 분위기는 더욱 좋아졌고, 테이블 위에는 술이 쌓여만 갔다.
“그런데 강 회장님, 언제까지 그렇게 은둔 경영을 하실 생각입니까?”
“일부러 거창하게 은둔까지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시끄러운 것이 싫어서요. 가능하면 조용히 살려고 합니다.”
“흐음, 카르마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어서 그게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모르겠군요.”
“가능하게 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고요.”
“하하하! 정말 부럽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주목을 받아야 해서 그런 것은 꿈도 꾸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
어떻게 보면 배부른 소리라고 하겠지만, 이해가 가는 말이다.
남들이 보면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다이아몬드 수저라 하겠지만, 어릴 때부터 무슨 재벌 집 자식이라는 딱지가 붙어서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해야 한다.
거기다 형제라도 많아서 경쟁이라도 해야 한다면 더 조심해야 하고.
피곤한 인생일 거다.
그래서 내가 악착같이 전면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
“저, 회장님.”
“말씀하세요, 구 회장님.”
“이렇게 모인 것도 인연인데, 괜찮으시면 세계 경제 전망에 대해서 말씀 좀 해주시겠습니까? 회장님께서는 혜안이 워낙 뛰어나시잖습니까?”
“하하하! 정모 너, 스마트폰 포기하면서 속이 많이 쓰렸나 보다? 초면인 회장님께 그런 부탁도 다 하고?”
“에이, 우성이 형님도 참. 왜 아픈 곳을 쑤시고 그러세요? 진짜 올해 상반기는 죽을 맛이었습니다.”
장우성이 너스레를 떨었지만, 아마 자기들끼리 경제 전망에 대하여 물어보자고 사전에 짰을 거다.
그만큼 나는 투자의 신으로 알려졌으니까.
그런데, 말하는 구 회장의 표정이 정말 좋지 않았다.
은성전자.
9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전자 쪽으로는 사성이 명함을 못 내밀었다고 들었다.
특히 가전 쪽으로는 만년 2등인 사성과는 비교조차 안 되었고.
그런데, 어느새 자신들이 만년 전자 2등으로 전락했다.
반도체는 뺏기고, 스마트폰은 세상의 흐름을 잘못 파악하여 기술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음에도 삽질을 연발하다가 결국 MC 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4월에 결정했다.
아마 구 회장의 속이 속이 아닐 것이었다.
이 자리에 이정룡 부회장이 없으니 그나마 이런 대화도 오고 갈 수 있는 것일 터이고.
“많이 힘드셨나 봅니다?”
“휴우! 말도 마세요. 결정할 당시는 거의 두어 달 잠을 제대로 못 잤습니다. 어쩌다가 우리 은성이 이렇게 되었는지….”
“야, 정모야. 그래도 네가 그룹을 맡은 이후로 그룹 전체 실적이 눈에 띄게 좋아졌잖아? 지난 것은 잊어버려.”
“형님도 참, 그게 쉽습니까? 불과 십여 년 사이에 그룹의 큰 기둥이었거나 기둥이 될 만한 것을 그 망할 인간이 날려버렸는데요?”
“…….”
은성의 패착은 잘못된 전문 경영인을 선임했고, 그를 너무 믿었다는 거다.
첫 번째는 그저 피처폰의 영광에 맛이 가서 스마트폰으로 시장이 옮겨 가는 것을 놓쳤다는 것하고, 두 번째로는 자신들이 뺏겼던 반도체를 2011년에 도로 찾을 수 있었는데 방관하고 TK 그룹에 넘겨줬다는 거지.
그래서 TK는 현재 재계 순위 2등인 현도를 위협할 정도로 커졌고 말이다.
이 두 가지를 모두 ‘그 망할 인간’이 주도했다.
심지어 반도체 인수 기회는 ‘우리 은성은 그동안 반도체 없이 사는 법을 배웠다!’라는 개소리까지 했다니.
물론 반도체는 그전에도 도로 찾을 기회가 있었는데, 뺏긴 것을 거액을 주고 도로 찾아야 하느냐는 오너 일가의 반감도 상당히 작용했다고는 하지만.
“너무 속상해하지 마시지요. 지난 것이 너무 연연하면 미래도 잘 보이지 않더군요.”
“그게 알면서도 잘 안 되는군요.”
“하하하! 한국 재계를 잘 모르는 제게도 은성은 잘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다 좋아질 겁니다.”
“그렇습니까?”
“솔직히 저는 직감에 의존하여 투자하는 사람입니다. 솔직히 경영은 잘 몰라요. 하지만, 투자할 때 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회사 최고위직에 기술자가 있냐, 아니면 숫자쟁이나 광고쟁이가 있냐는 것을 보지요.”
“아….”
“기술자를 대우하고 기술자들의 의견이 경영에 반영되는 회사는 일시적으로 힘들지는 몰라도 저력이 있다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숫자쟁이나 말만 번드르르한 광고쟁이가 득세하는 회사? 전 쳐다도 보지도 않습니다.”
“하아….”
구정모 회장이 한숨을 쉬었다.
‘그 망할 놈’이 문돌이 마케팅 신봉자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