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순자의 가을.
며칠 후, 결국 난 엄마의 강권을 이기지 못하고 선 보는 자리에 나갔다.
이번에 선을 보면 적어도 올해는 괴롭히지 않기로 거래를 하고.
상대는 올해 28살로 양서대 음대에서 플루트를 전공하고 유학까지 다녀와서 현재는 서울 시립교향악단에서 일하는 미모의 재원이란다.
집안은 아버지가 무슨 부동산 사업을 한다고 하는데, 대충 들어보니 빌딩 몇 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여간 그놈의 미모의 재원은 하도 개나 소나 가져다 써서 믿지도 않았지만, 사진을 보니 확실히 미모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상당한 튜닝의 흔적이 보였지만, 요즘 튜닝하지 않은 여자 찾기가 어디 흔한가?
게다가 비싼 공장에서 만든 듯, 성괴 느낌은 나지 않았다.
상당히 자연스럽게 잘 만들었다.
맞선 장소는 더 플라자 서울 호텔인데, 아무래도 여자 직장이 그 근처라고 잡은 모양이었다.
뚜벅뚜벅!
“안녕하세요, 김다현 씨?”
“아, 네. 강철식 씨 되시지요?”
“네, 제가 강철식입니다. 반갑습니다.”
“네, 반가워요.”
상대는 내 사이즈를 보더니 적잖이 안심하는 눈치였다.
하긴 내가 어디 가서 밀리는 사이즈는 아니지.
키 183cm에 로또 당첨 이후로는 부단히 운동하여 거의 내 전성기 시절의 몸매를 되찾은 상태다.
세숫대야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얼굴이고.
소미가 우리 집안 우성 유전자는 전부 가져간 완결판이지만, 나도 그 정도는 아니어도 원래 존잘 소리 듣던 사람이다.
여기다 거부가 되어 자연스럽게 명품류를 착용하다 보니 길을 지나가면 나를 쳐다보지 않은 처자가 없을 정도다.
아니, 이렇게 생각하니까 더 어이가 없네.
대체 내가 왜 여친이 없는 거지?
하여간 맞선 여자는 일단 내 외모에 대단히 흡족해하는 것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여자는?
서 있을 때 급히 훑어보니 키는 163cm 정도?
몸매도 나쁘지는 않았다.
상당히 신경을 써서 관리한 흔적이 보였다.
그런데 인사까지는 했는데, 다음에는 무슨 말을 하지?
“…….”
“…….”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는데, 이래서 내가 맞선 따위는 안 보려고 한 거다.
대체 이게 뭐냐고?
결국,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하시는 일이….”
“네,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업인데요?”
“그냥 이거저거 투자도 하고 그렇습니다.”
“어쩜! 자수성가하셨다고 들었는데 대단하시네요?”
“뭐 어쩌다 보니….”
“…….”
내 반응이 시큰둥하자 여자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내가 좀 그랬나?
엄마 친구분 아는 집안이라 너무 냉대해도 문제가 될 것 같아서, 나도 좀 적극적으로 나가야 할 것 같다.
괜히 나중에 엄마에게 원망이라도 들을 수가 있다.
“운이 좋았습니다. 현재는 미국에서 거의 있고요.”
“어머? 그럼 사업을 미국에서 하시는 건가요?”
“미국에서도 하고 한국에서도 합니다. 그래서 미국과 한국을 왔다 갔다 하지요.”
“호호호! 정말 대단하시다?”
“대단한 정도는 아니고, 진짜 운이 좋았습니다.”
이건 진짜지.
나보다 운이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
“다현 씨는 음악을 하신다고요?”
“네, 서울 시향에서 플루티스트로 있어요.”
“플로리스트?”
“아니요! 플로리스트는 꽃을 만드는 사람들이고요, 저는 플루티스트! 플루트를 연주하는 사람이에요.”
“아….”
이름은 비슷한데 많이 다른 모양이구나.
근데 발끈까지 할 일인가?
“철식 씨는 음악, 좋아하세요?”
“네, 좋아합니다. 음악 싫어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럼 클래식?”
“클래식이요? 미안하지만 클래식은 예전에 자동차 후진할 때 나오는 음악밖에 모르네요.”
“네? 자동차 후진할 때 나오는 음악이라니요?”
“그거 있잖아요. 저 어릴 때만 하여도 자동차가 후진하면 사람 피하라고 띠리띠리띠리 띠리리, 하는 음악이 나왔거든요.”
그게 아마 에리제? 엘리제? 하여간 뭐를 위하여서였는데?
근데 요즘은 자동차 후진할 때 왜 안 나오지?
“아, 네…….”
“근데 그게 제목이 뭐죠? 띠리띠리띠리 띠리리?”
“아, 아무래도 엘리제를 위하여 같네요. 베토벤이요.”
“오오! 맞다! 엘리제를 위하여! 하하하! 감사합니다. 어릴 때는 알았는데 바쁘게 살다 보니 까먹었네요.”
“아, 네. 그럼 클래식이 아니라도 좋아하신다는 음악이? 재즈? 팝?”
“뭐 가요를 많이 듣지요.”
“가요요? 어떤 가요?”
“제가 저보다 연배가 많은 사람들하고 어울리다 보니 제 나이에 비해 듣거나 부르는 노래가 좀 올드합니다.”
“어떤 가요인데요?”
“흐음, 제가 주변 사람들하고 노래방 가면 부르는 노래가…. 순자의 가을?”
“순, 순자의 가을이요? 그런 노래도 있어요?”
“크으으! 명곡이지요! 이게 말입니다, 심수봉 씨가 부른 노랜데, 이 노래가 나오자마자 당시 영부인 이름이 순자라고 금지곡이 되었어요. 이게 말이나 됩니까?”
“그, 그렇군요.”
“아마 다현 씨도 들어보셨을 텐데요?”
“아뇨, 저는 전혀….”
“아닙니다, 들어보셨을 겁니다. 묻지 말아요~ 내 나이는 묻지 말아요~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
“네? 들어본 것 같은데, 그게 심수봉 씨 노래예요?”
“이게 금지곡이 되면서 몇 년 후에 개그맨 출신 가수 봉미가 제목을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로 바꿔서 불러 히트를 쳤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잘 모르는데, 어디 봉미가 심수봉에 비빌 수나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
이건 재하 형의 애창곡인데, 나도 좋아서 곧잘 부르는 노래다.
“또 김원중의 직녀에게라는 노래도 자주 부릅니다.”
“직녀에게요?”
“혹시 바위섬은 아세요? 파도가~ 부서지는~”
“아! 그건 알아요.”
“그 가수가 부른 명곡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전 모르겠는데요….”
“이게 말입니다, 통일을 노래한다고 해서 또 금지곡이 되었거든요? 캬아아! 이런 명곡을 금지하다니? 우리의 소원은 통일인데, 통일을 연상시킨다고 금지곡이라니?”
“…….”
아무래도 노래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삔또가 전혀 맞지 않는 것 같다.
슬쩍 눈치를 보니, 플루티스트는 내 문화적 소양을 의심하는 분위기였다.
젠장, 순자의 가을이 어때서?
“험험….”
“저기, 철식 씨는 전공이 뭐였어요? 경영학? 경제학?”
“전공이라니요?”
“아이참? 대학교 다닐 때 전공 말이에요.”
이게 무슨 소리여?
내가 무슨 대학을 다녀?
엄마에게 물었을 때는 내 조건에 대하여 다 말했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엄마 친구분의 농간이 있는 것 같았다.
“저 고졸인데요?”
“고, 고졸이요? 아니 투자사를 운영하신다고….”
“고졸은 투자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답니까?”
“그, 그야 그렇지만….”
“흐음, 이거 아무래도 제 정보가 제대로 전달이 안 된 것 같은데, 전 고졸이 맞습니다.”
“아니 요즘 세상에 고졸이 어디 있다고….”
“허어….”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는 고등학교 졸업하면 당연히 대학교에 가는 것으로 아는 모양이다.
하기야, 뭐라고 하기도 그런 것이 내가 졸업하던 연도 대학 진학률이 80%가 넘었었다.
물론 2년제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묻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겠지.
“부모님과 여동생은 대졸자가 맞는데, 전 고졸이에요.”
“…….”
“당시 아버지가 보증 문제로 가세가 극도로 기울어 제가 대학교에 갈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바로 부사관으로 입대하여 돈을 벌어야 했고요.”
“아….”
“뭐 지금이야 아쉬울 것은 없는데, 어쨌든 저에 관한 이야기가 잘못 들어간 것 같습니다.”
“아, 아닙니다. 그저 제법 큰 회사를 운영하신다는 말만 듣고서 저희는 당연히 대학을 나오신 것으로 알았어요.”
“…….”
이후로는 대화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서로 관심사도 명확하게 다른 것 같았고, 지금은 성공했다고 하지만 어쨌든 고졸이란다.
우리가 무슨 정략적으로 맞선을 보는 것도 아닌데, 이 아가씨 입장에서는 자기 집도 부자인 상황에서 굳이 나를 만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대화라도 잘 되었다면 내 외모빨로 혹했을 테지만, 보아하니 처음의 외모빨도 많이 가신 것 같았다.
“저기….”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제가 다시 연습에 들어갈 시간이라….”
“아니 식사라도 하고 가시지요? 조금 있으면 식사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에이, 뭐가 죄송해요? 하여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어디로 가세요? 차 가지고 오셨나?”
“차는 안 가져왔고, 세종문화회관으로….”
“오, 그럼 제가 태워다 드리지요.”
어차피 끝난 판, 숨길 것도 없다.
“네?”
“하하! 다현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알아요. 솔직히 우리는 인연이 아니라는 말씀이잖아요? 하지만 중간에 소개해 주신 분의 체면도 있으니까, 제가 모셔다드리겠다는 말입니다.”
“아, 고맙습니다.”
이 정도는 해줘야 엄마에게 혼나지 않지.
“자! 그럼 일어서지요.”
“네….”
어차피 보기 싫었던 맞선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전화로 차 대기시키라고 하고 계산을 치르고 호텔 로비로 나왔다.
그런데.
“어? 강 회장님?”
갑자기 뒤에서 나를 부르는 듯한 소리에 돌아보니 어디서 많이 본 남자가 있었다.
십여 명의 중년 남자들과 함께.
“김 대표님?”
뜻밖에 화나 그룹의 김종건 대표가 나를 부른 것이다.
“아니 강 회장님께 여기는 어쩐 일로?”
“어…. 그게 말이지요.”
아이 씨, 하필 여기서 만나냐?
게다가 김종건이는 쓸데없이 눈치까지 빨랐다.
“어? 같이 계신 분은? 설마?”
“…….”
“푸하하하! 맞군요? 아니 세상에 회장님도 맞선을 보십니까?”
“그만하시지요….”
“아니 말씀만 하시면 우리나라 재벌들이 없는 딸이라도 만들어서 전부 달려들 텐데요?”
“쓰읍!”
“푸하하하! 아! 죄송합니다.”
“…….”
어쩌다가 이 인간을 여기서 만나서 이게 무슨 개쪽이냐.
“김 대표님은 무슨 일이세요?”
“네? 저야 우리 호텔에 볼일이 있어서 온 것이지요?”
“우리 호텔이라니요?”
“모르셨어요? 여기 플라자는 우리 그룹 소유입니다. 그래서 모임이 있으면 주로 여길 애용합니다. 본사와도 가깝고요.”
“아….”
몰랐다.
“그럼 이만….”
“흐흐흐!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고만 좀 하시지요?”
“넵! 그럼 살펴 가시지요.”
“말 퍼트리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김종건이 말을 마치면서 큰 소리로 인사하자, 그룹이 중역들로 보이는 십여 명의 무리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서 같이 인사했다.
“가시지요, 다현 씨.”
“저, 저분 혹시 화나 그룹의?”
“…….”
김종건이는 제법 얼굴이 알려진 것 같았다.
“네, 맞습니다. 화나 그룹의 후계자예요.”
“그런데 저런 분이 철식 씨 보고….”
“사정이 있습니다. 나가시지요.”
다 끝난 판인데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싫어서 바로 정문으로 나왔다.
“회장님 나오셨습니까?”
“정 비서, 세종문화회관에 이분을 모셔다드려야 해요.”
“네, 알겠습니다.”
경호원들이 차 문을 열어주었다.
사고 난 차는 수리에 들어갔고, 이건 예비용 차인데 같은 차다.
벤츠 마이바흐 S650 풀만 리무진.
“타세요.”
“네, 네….”
맞선녀가 얼이 빠진 상태로 탑승했다.
뭔가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표정인데, 어차피 맞지 않는 사람이다.
이윽고 내 차 앞뒤로 경호팀의 차들이 에스코트를 하고 가까운 세종문화회관으로 향하니, 신호가 걸렸음에도 금세 도착했다.
“반가웠습니다. 살펴 가세요.”
“저, 저기….”
“아! 걱정하지 마세요. 주선하시는 분에게는 적당히 좋게 말씀드리라고 하겠습니다.”
“…….”
그렇게 맞선녀를 내리게 하고 차는 다시 출발했다.
혹시나 했던 내 인생 최초의 맞선은 역시나 이렇게 끝이 났다.
나는 좌석에 몸을 깊이 파묻으면서 흥얼거렸다.
“~나 홀로 가는 길은 너무 쓸쓸해~ 너어무 쓸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