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내가 선택한 길.
“차가 너무 막히는데? 제인, 안 되겠다. 우리 조금만 걸어가자.”
“웅, 오빠.”
“정 비서, 여기서 세워 줘요. 늦어서 걸어야겠어요.”
“네, 회장님.”
신촌에서 정훈이, 그리고 그나마 연락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길이 너무 막혀서 이미 약속 시각에 늦었다.
결국 차에서 내려 제인과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정훈이를 비롯한 친구들에게 내 피앙세를 보여주는 날이다.
경호원들도 일부 몇 명이 내려서 표 안 나게 우리를 따랐는데, 금요일 저녁의 신촌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로 걸어가는 것도 몹시 힘이 들었다.
“와와! 오빠! 사람 정말 많다!”
“응, 여기가 서울에서도 젊은 애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거든.”
“그래? 왜?”
“이 근처에 유명한 대학교들이 몰려 있어서 그래.”
“정말 신기하다. 우리 학교 근처에는 이런 곳이 없거든?”
“…….”
스탠퍼드 대학교는 면적이 무려 33 k ㎡로, 평으로 따지면 거의 1,000만 평이다.
송파구 정도의 넓이에 학교 안에 18홀짜리 골프장도 있는데, 당연히 학생이 이렇게 모일 리가 없는 거지.
아니 스탠퍼드 대학교뿐만이 아니라 뉴욕 정도가 아니라면 신촌처럼 젊은 애들이 모이는 곳이 있을 리가 없는 나라가 미국이다.
땅이 좀 넓어야 말이지.
그렇게 열심히 걸어가는데, 사람들의 이목이 우리에게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우리라기보다는 제인에게 말이다.
그야말로 인간계의 여신이 돌아다니는 모습이었으니까.
제인도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꼈는지, 얼른 내 팔짱을 끼면서 붙었다.
그런데 그게 더 시선을 집중시킬 줄이야.
“우와아! 저 남자 여자친군가보다!”
“부럽다! 부러워! 돈이 겁나 많은가 보지?”
그래, 나 돈 많다 자식들아.
열심히 부러워해라.
“어머! 저 남자도 존잘인데?”
“그지? 그지? 수트빨도 죽이잖아? 키도 엄청나게 크고!”
“그런데 이쁜 한국 여자 놔두고서 왜 백인이랑 다니니?”
“얘는? 한남들 로망이잖아? 아이, 재수 없어!”
“칫! 그래도 저 기집애 이쁘긴 이쁘다. 무슨 여자애가 저렇게 이쁘니?”
“러시아 여자 아니야? 요즘 우리나라에 러샤 애들 많이 들어와 있잖아?”
에이, 씨. 빨리 걸어야겠다.
요즘엔 홍대나 신촌에 가면 백인들이 드물지 않다.
그만큼 우리나라도 발전하여 글로벌화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우리 제인은 그중에서도 가히 군계일학이라고 할 정도로 이뻤다.
앞으로도 이런 관심은 어쩔 수 없이 달고 살아야 할 것 같은데, 내 팔자려니 해야지.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약속 장소는 우리가 젊은 시절부터 신촌에서 만나면 항상 가던 고깃집이다.
군대에 있을 때도 정말 어쩌다 휴가 나가면 정훈이가 과외해서 번 돈으로 삼겹살이나 돼지갈비를 사주던 집인데, 맛도 괜찮고 무엇보다 양이 푸짐하면서도 저렴했다.
당시 주인아주머니는 어느새 할머니가 되어서 나를 맞아 주었다.
“안녕하세요, 이모?”
“응? 누구셔?”
“저 기억 안 나세요? 정훈이랑 항상 같이 오던?”
“어, 어? 이게 누구야? 그 군인?”
“하하하! 맞습니다. 건강하시지요?”
“에구머니나! 세상에! 강 중사, 강 중사 맞지?”
“네, 맞습니다.”
“이게 웬일이야? 어떻게 이리 훤칠해졌어?”
“에이, 제가 원래 인물은 좀 괜찮았잖아요?”
“맞아, 그랬지? 맨날 시커멓게 타서 인물이 가렸었지만. 그런데 이 이쁜 색시는 또 누구야?”
“하하! 제 색시예요. 내년에 결혼하고요.”
“세상에! 천사네! 천사!”
주인아주머니는 바뀐 내 모습과 제인을 보면서 연신 감탄했다.
그런데.
“오빠.”
“응, 제인.”
“나 섹시하다고 그러는 거야?”
“푸하하하!”
그래, 우리 색시는 참 섹시했다.
제인의 본의 아닌 아재 개그 때문에 한바탕 웃고 나서 우리 애들 어디 있냐고 물으니 역시나 늘 앉던 뒤편의 골방 비슷한 곳에 자리를 잡았단다.
뒤쪽으로 돌아서 가니, 우리가 늦어서 그러지 오늘 온다는 놈들이 모두 모여서 먼저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정훈이를 비롯하여 김창훈이, 그리고 이종대, 고석호, 조진만까지.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 집이 박살이 나기 전까지는 참 친했던 친구들인데, 우리 집이 그 모양이 되고 나서부터는 가는 길이 달라지다 보니 이상하게 소원해진 친구들이다.
친구들이 나를 멀리한 것은 아니었는데, 대체 왜 그랬을까?
아마도 내가 자격지심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못났었네.
“이놈들, 어른이 안 왔는데 먼저 숟가락을 들어?”
“어, 왔냐?”
“이야! 이 자식 오랜만이다!”
“히야! 넌 어떻게 더 멋있어진 것 같다?”
“어서 와라! 반갑다!”
정훈이를 제외하고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이 저마다 나를 보면서 반가움에 한마디씩 했다.
그래 나도 반갑다 자식들아.
그리고 난 원래도 멋있었다.
“자리가 왜 하나밖에 없냐? 하나 더 만들어.”
“응? 누구 또 오냐?”
“내 피앙세지. 제인, 이리 와서 인사해. 오빠 친구들이야.”
“피, 피앙세? 피앙세라니?”
그때 제인이 안쪽으로 들어왔고, 일순간 골방 안이 조용해졌다.
그나마 정훈이가 제일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누, 누구?”
“방금 말했잖아? 내 피앙세라고?”
“뭐 임마? 게임에서나 나올 것 같은 저런 백인 금발 미녀가 네 여자친구라고?”
“응.”
“왜 갑자기 욕을 박고 싶어지지?”
“마, 말도 안 돼!”
“제기랄! 확 전쟁이나 나라!”
“역시 세상은 공정하지 않은 것이야.”
“…….”
이 미친놈들이?
전쟁이나 나라니?
“안뇽하세여? 오빠들?”
“우와아아! 목소리도 이뻐!”
지랄들 한다.
하여간 오랜만에 본 친구들은 우리를, 아니 정확히는 제인을 여신으로 받들면서 격렬하게 환영해 주었다.
그러면서 나와 15살 차이라는 것을 알고서 나를 두들겨 댔고, 스탠퍼드 대학 4학년으로 올라가는 재원이라는 말에 또 등짝을 갈겨댔다.
이 망할 놈들, 오늘만 내가 참는다.
그렇게 분위기가 살면서 테이블 위에는 소주병이 쌓여만 갔고, 옛날 고등학교 때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푸하하! 그거 기억나냐? 우리 가는데 양아치들하고 시비 붙었던 거?”
“크흐흐! 기억나지. 그때 종대 저 새끼는 혼자 도망갔지? 그 와중에 철식이가 병을 깨고 다 덤비라고 했었고?”
“맞다! 맞아! 철식이가 병을 깨서 소리 지르니까 그 새끼들 다 도망쳤지?”
“하하하!”
그런 일이 있었다.
참 질풍노도 같은 시절이었는데.
“그때 철식이 너, 진짜 멋있어 보였어.”
“새끼들, 철없을 때 이야기는….”
“아니, 진짜야. 그때 넌 우리 중에서 공부도 제일 잘했고, 싸움도 잘했잖아? 집도 부자였고.”
“…….”
석호 이 자식은 왜 쓸데없는 소리를.
“인제 와서 하는 이야긴데, 너희 집 그렇게 되고서 너 고생하고 우리들 사이가 점점 멀어지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어. 우리끼리 모이면 맨날 네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그렇더라. 우리는 변함이 없는데, 네가 자꾸 우릴 멀리하는 것 같다고 말이야.”
“…….”
뭐, 자격지심이었지.
나름 잘나가던 내가 궁핍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싫었고.
지금 생각하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어렸던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우리가 모두 대학에 가고, 넌 가끔 정훈이하고 군복을 입고 나왔었잖아? 항상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을 하고 말이야. 네가 그런 고생을 할 놈이 아니었는데….”
“미친놈! 고생할 놈이 어디 따로 있냐?”
“그래도 철식이 넌 아니지. 그러다 졸업하고 다들 직장 생활하면서부터는 제대로 만나지도 못하고 우리도 바쁘고 하다 보니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흘렀네.”
“그래, 10년이 넘었구나.”
몇 년 전부터는 볼 수도 있었으련만,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얼마 전에 정훈이가 그러더라. 너 미국으로 건너가서 크게 성공했다고. 우리가 그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
내가 너무 무심했나 보다.
트럼프와 바이든을 만나고, 아베를 만났다.
우리 대통령은 내가 전화 한 통이면 만날 수 있는 상황이고.
그런데 친구들을 잊고 있었구나.
미안하다, 친구들아.
“미안하다. 바쁘기도 했지만 그건 핑계고, 솔직히 말하면 약간 상처?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아. 마지막에 만났을 때 너희들 졸업 후 진로 이야기하고 그런 것이 은근히 상처가 되었거든. 나는 쳐다도 못 보는 대기업들이었으니까.”
“…….”
“그래서 이후로는 자격지심에 너희 만나는 것을 피했던 것 같아. 미안하다, 내가 못났던 거였어. 앞으로는 종종 보자.”
“새끼, 웃기고 있네! 이젠 성공도 했고, 제인 같은 미녀 와이프도 생겼단 거지? 에라! 네가 최종 승자다! 위너야!”
“푸하하하!”
“하하하!”
마음속의 앙금이 사라지고 있었다.
진작에 만나서 이렇게 풀 것을.
모두 거나하게 취한 상태에서 결국 노래방까지 가게 되었다.
광란이 벌어지는 와중에 우리 제인이 얼마나 신나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제인은 참 노래도 잘해요.
넌 대체 못 하는 것이 뭐니?
“우와아아! 제인! 제인!”
“형수님이라 불러라 자식들아!”
“크하하!”
결국, 나도 마이크를 잡게 되었고, 내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처음 보는 제인이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3969!”
“미친! 네 자리면 옛날 노래 아니야? 저 시끼 또 이상한 노래 부르려는 것 아니야?”
“또 금지곡 아니야?”
“시끄럽다! 이번엔 아니다.”
이윽고 내가 선택한 곡이 화면에 떴다.
제목은 내가 선택한 길.
“내 이럴 줄 알았다. 뭐여? 저 정체불명의 노래는?”
“탁만훈? 탁만훈이 부른 노래가 있었어?”
“임마! 가수였잖아? 옛날에 무슨 간추린 고고던가?”
얘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비가 내릴까? 저 하늘 끝에서~아쉬움이 기억을 부르네~”
“응? 노래 좋은데?”
“~ 나는 두렵지 않아 더 많은 시련도 어차피 내가 선택한 길인데 ~혹시 미련이라도 내게 보일 수 있다면 너의 곁으로 난 달려 갈 텐데 오~”
이윽고 내 노래가 끝났다.
점수는 88점.
이거 기계가 왜 이래?
하여간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짝짝짝짝!
“오빠 최고!”
“아잉.”
“이상하네? 노래 좋은데 이런 노래가 왜 못 떴지? 들어본 적이 없는데? 너희들 들어본 적 있냐?”
“없는데? 탁만훈이 이렇게 좋은 노랠 불렀다고?”
“뭔가 수상한데?”
“수상하긴 자식들아! 너희들이 문화적인 소양이 없었던 거지?”
내 일갈에도 불구하고 한 놈이 열심히 스마트폰을 뒤지기 시작했다.
요즘은 참 무슨 말을 못 하겠다.
그리고,
“에이! 그럼 그렇지?”
“뭔데?”
“이거 표절이잖아? 원곡이 나가부찌 쯔요시란 일본 가수 곡을 무단으로 카피했다는데?”
“그럼 그렇지….”
“…….”
쓸데없이 빠른 새끼들.
즐거운 시간이 끝이 났다.
“내년 6월쯤에 결혼한다고?”
“응, 그쯤 날짜를 잡으려고.”
“청첩장 잊지 마라. 직접 주는 거 알지?”
“새끼들, 걱정하지 마라. 거하게 사마.”
어차피 결혼식에 부를 놈들인데, 오면 내 신분에 대하여 알게 될 거다.
그 전에 청첩장을 줄 겸 자리를 가져서 말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이놈들에게 깜짝쇼를 할 것도 아니고.
하여간 오랜만에 후련하고 즐거운 밤을 보냈다.
진작에 만나서 앙금 같지도 않은 앙금을 털어낼 것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아! 자주 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