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가전은 은성.
“고생하셨습니다. 두부는 먹었어요?”
“쿨록! 두부는 아직….”
“에이, 그게 미신 같지만 그게 아니더라고요. 일종의 다짐이라고나 할까? 다시는 빵에 가지 않겠다는?”
“어흠….”
이 부회장이 뭐라고 하든 간에 종업원을 불러서 두부 한 모를 내오게 했다.
“드세요. 제 성의입니다.”
“고, 고맙습니다.”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이정룡 부회장과 식사 약속이 잡혔는데, 깜빵에서 나오면서 두부를 안 먹었다니?
이건 아니지.
서둘러 두부를 먹이자, 그래도 사양하지 않고 반 모는 그 자리에서 해치웠다.
“잘 먹었습니다.”
“이젠 정말 그런 곳에 가지 마세요. 얼마 전에 VIP를 만나서 잠시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사면과 관련하여 정말 엄청나게 부담이 컸던 모양이더라고요. 그쪽 지지기반에서도 반발이 심했고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반성도 많이 했고요. 정말 다시는 들어갈 일 근처도 안 갈 생각입니다. 이젠 제 나이도 있는데 아이들 보기도 민망합니다.”
“그렇지요.”
“특혜를 받은 것이니만큼, 열심히 회사나 챙기겠습니다.”
“하여간 출소를 축하드립니다.”
“네, 고맙습니다.”
뭐 두고 봐야겠지만, 적어도 현재로서는 다시 깜빵에 들어갈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상속도 정리가 다 된 모양이니 그럴 일도 없을 것이고.
“그런데 회장님.”
“네, 말씀하세요.”
“회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러시아가 심상치 않더군요. 푸틴이 정말 무슨 일을 저지르기는 저지를 모양입니다.”
“별도로 알아보셨나 보네요.”
“그럼요, 누구 말씀인데 허투루 듣겠습니까? 이전에 면회 오셨을 때 말씀을 듣자마자 모든 정보력을 기울여 러시아를 주시하라고 했습니다.”
“그랬군요.”
“이게 회장님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그냥 설마 하고 넘어갈 일이지만 그게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우성이하고 정모, 종건이에게도 말씀하셨더군요.”
“네, 어쨌든 우리 기업들이고, 신세 진 것도 있어서 언질을 주었습니다. 어떻게 판단할지는 본인들이 알아서 하겠지요.”
밥상까지 차려주었는데, 내가 입에다가 떠먹여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들 난리인가 봅니다. 특히 현도는 알아도 방법이 없으니 전전긍긍하는 것 같고요.”
“하긴, 현도는 그렇지요. 현지 공장을 차려 놓은 지 얼마 되지도 않으니….”
“그러니까 말입니다. 휴우! 이거 사업하기가 점점 복잡해집니다. 이젠 국제 정세까지 따져가면서 장사를 해야 하니 말이지요. 우리 반도체도 중국 때문에 머리가 아파 죽을 것 같습니다.”
“중국 공장 때문에요?”
“네, 공장을 세울 때만 하여도 미국하고 중국이 이렇게까지 대립할 줄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젠장, 삽을 뜨고 나니까 점점 분위기가 막장으로 가버리니, 뜨던 삽을 중지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요.”
“그때만 해도 습근평이가 저리 막무가내로 나갈 줄은 몰랐지요. 그래도 대비를 하셔야 할 겁니다.”
“회장님 생각으로는 어떻습니까? 앞으로 중국과 계속 이럴 것 같습니까?”
“사성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 암담하지요. 이구동성으로 중국과는 점점 더 관계가 악화할 것이라 합니다. 제 생각도 마찬가지고요.”
“저도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깔끔하게 중국은 포기하세요. 이젠 중국 없이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겁니다.”
“미치겠네요….”
이정룡 부회장이 그답지 않게 머릴 박박 긁어대면서 한숨을 쉬었다.
“바이든 대통령의 의지는 확고합니다. 어떻게든지 중국을 꺾어 놓을 생각이에요. 이건 민주당이고 공화당이 대동단결이고요. 중국이 여기서 더 크면 나중에는 미국조차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팽배해 있어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겁니다.”
“미국이 그런 식으로 나오면 중국의 반도체 산업은 붕괴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네덜란드의 노광 장비 기업인 ASML 정도만 생각합니다만 그게 아닙니다. 반도체 거의 모든 전 공정에 미국의 원천 기술이 들어가 있어요. ASML의 노광기에도 미국이 기술이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미국이 금수 조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중국의 반도체 산업은 일어나기도 전에 끝입니다. 습근평이 너무 서둘렀어요.”
“미국의 생각은 단호합니다. 단번에 끊어버리면 자국 업체들이 피해를 보니까 서서히 반도체 생태계에서 중국을 제외하면서 숨통을 조이는 겁니다. 몇 년 이내로는 그렇게 될 겁니다.”
“아니 조이려면 진작 좀 조이든가요? 이제 투자 다 해서 양산 좀 되려 하니까 이게 뭡니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적어도 오바마 정부 때부터는 중국을 견제했어야 한다.
제대로는 조지 부시 정부부터는 시작했어야 했고.
실컷 첨단 산업의 생태계에서 중국이 발을 담그는 것을 내버려 두다가 이제야 난리를 쳐대니까, 중간에 낀 우리나라 같은 새우들만 피해를 보는 것이다.
“신냉전이 시작될 겁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서 사업 계획을 세우세요.”
“항상 조언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아! 듣자니 결혼하신다고요?”
“응?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하하하! 인제 우리 사성이 카르마에는 비빌 엄두도 나지 않지만, 적어도 대한민국 내에서는 아직 방귀 좀 뀝니다. 특히나 회장님에 관련된 소식이라면 특급으로 제 귀에 들어오지요.”
“아, 네….”
“하여간 축하드립니다. 늦으셔서 어르신들이 걱정이 많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게다가 굉장한 미인이라고요?”
“하하하! 거의 엘프급이지요.”
“하하하!”
마누라 자랑은 참을 수 없지.
팔불출 소리 들어도 어쩔 수 없다.
“그런 신혼집은 어디로?”
“아, 미국 우리 집에서 살 거예요. 한국은 그냥 지금 부모님하고 같이 사는 집 내 방을 꾸미기로 했고요. 집이 제법 커서 불편할 일도 없어서요.”
“하하하! 그렇군요. 이거 제가 축하 선물로 뭐라도 드리고 싶은데, 워낙 다 가지고 계신 분이라 드릴 것이 없네요.”
“에이, 됐어요. 무슨….”
“별건 아닙니다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한국 집의 가전은 전부 최신형으로 바꿔드리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겁니다.”
“예? 가전을요?”
“네, 우리 사성 라인 중 최상위 라인으로 해드리지요.”
“아니 괜찮습니다. 그런 폐를….”
“아닙니다. 제발 제 성의를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아니 괜찮다니까요?”
“…….”
갑자기 분위기가 경색되었다.
이 부회장은 나름대로 생각해서 성의를 보이는 것인데, 내가 극구 싫다고 하는 것이니까.
이걸 참 어떻게 말해야 하나.
“부회장님.”
“네, 회장님.”
“사실 제가 부회장님 호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좀 사연이 있어서 그래요.”
“네? 그게 대체 뭡니까?”
“우리 부모님이….”
“갑자기 부모님이 왜요?”
“가전은 은성이라는 믿음이 있어서요….”
“뭐, 뭐요? 은성?”
“특히 백색 가전은 역시 은성이라고….”
“아, 아니 대체 그게 언제 이야긴데….”
이 부회장은 하도 황당하여 어이가 없나 보다.
그런데, 이게 어이없을 것이 아닌 것이, 우리 부모님 시절에는 누가 뭐래도 가전은 은성이었다고 한다.
이 부회장의 말처럼 요즘은 그렇게까지는 아닌 모양인데, 그래도 노인네들은 무조건 가전은 은성이라고 외치는데 그걸 내가 왜 거역할까?
하여간 우리 부모님이 그렇다고 하니까는 이 부회장도 더는 할 말이 없어졌다.
“하아,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요.”
“미안해요. 대신에 우리 집 스마트폰은 전부 은하수예요. 저를 포함해서 말이지요.”
“괜찮습니다….”
전혀 안 괜찮은 얼굴로 괜찮다고 하니 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저기, TV는 명백히 백색 가전이 아니니까, TV는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최고 좋은 것으로 엄선하여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고마워요.”
“하하하! 아니 우리 사이에 뭐….”
“…….”
우리 사이?
뭐, 한국 기업인 중에서는 그나마 제일 가깝기는 하네.
***
9월이 시작되면 제인이 학교에 나가야 한다.
슬슬 미국으로 출국할 때가 다가왔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여보세요?”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저 장봉호입니다.
“아, 장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미얀마 네트워크 장봉호 대표는 내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지만 내게 직접 전화를 하는 경우는 없었다.
전부 아버지와 남정원 부회장을 통하여 일을 했으니까.
아니 사실 아버지나 남 부회장도 워낙 거물이 되어서 사실 그 밑의 실무 직원들과 대부분 통화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직접 전화를 드려서 송구합니다만,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한국에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흠, 오늘 오후라면 괜찮습니다만, 무슨 일이시지요?”
중요한 일입니다. 만나 뵙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어디 보자, 오후 4시에 시간이 비네요. 그때 괜찮습니까?”
네, 마곡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오후 4시가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장봉호 대표가 내 집무실로 들어왔다.
민주주의 민족동맹(NLD) 한국 지부장 얀 나잉 툰과 함께.
그런데 표정들이 영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어서들 오세요. 수고가 많으십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죄송합니다만 좋지 않은 소식이 있습니다.”
“네? 무슨 소식인데요?”
“미얀마 군부에 회장님 신분이 노출된 것 같습니다.”
“뭐요? 내 신분이? 아니 어떻게요?”
이게 무슨 소리지?
내 신분이 노출되다니?
미얀마 지원은 철저하게 비밀로 하고 있었다.
한국의 정화재단이나 카르마 홀딩스, 그리고 미국의 카르마 인베스트먼트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게 지원하도록 지시했고, 미얀마의 국민 통합정부나 한국의 미얀마 지원기구나 NLD에서도 최상위 간부 몇 명만 아는 비밀로 한 것이다.
개떡 같은 나라여도 미얀마는 50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런 나라에서 정부 차원에서 해코지를 하려고 작심하면 나는 물론이고 내 가족, 그리고 나아가서는 미얀마에 여전히 살고 있는 우리 교민이나 기업들이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중국이 배후에 있음이 확실한 마당에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미얀마 민주 세력에 대한 지원은 철저하게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한 것인데, 내 신분이 노출되다니?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국민 통합정부 측의 최고 간부 중의 하나인 얀 윈이 열흘 전에 실종되었는데, 어제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요?”
“얀 윈은 회장님의 존재를 아는 몇 되지 않는 간부인데, 시신에 심한 고문 흔적이….”
“아니 그런 간부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합니까?”
“어머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위험을 무릅쓰고 양곤으로 잠입했다가 그만….”
“허어….”
아무래도 덫에 빠져서 잡힌 모양이고, 심하게 고문을 당한 흔적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미얀마 군부 놈들에게 가장 눈엣가시인 연방군의 배후를 집중적으로 캐물었을 것은 보지 않아도 비디오다.
결국, 내가 지원한다는 것을 놈들이 알아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겠지.
미얀마 군부 놈들이 알았다면 중국도 안다고 봐야 할 것이고.
젠장, 제일 우려하던 일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