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미쳐도 좀 곱게 미쳐야지.
젤렌스키 대통령은 정말 감동한 것 같았다.
이제 전쟁 초기로 예상보다 우크라이나가 선전하고 러시아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고전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거의 모든 나라가 조만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강력하게 밀어붙일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프랑스나 독일 등 유럽연합 제국은 그저 미국을 따라서 규탄 성명을 내고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겠다고 말은 하지만, 여전히 간을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말 강력하게 지원하는 것은 내 말이라면 하늘의 복음으로 듣는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러시아라면 언제나 진심인 영국, 그리고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 잃으면 바로 최전선이 되어버리는 폴란드와 발트 3국, 핀란드 등의 북유럽뿐이다.
유럽연합의 쌍두마차인 독일과 프랑스가 중요한데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뜬금없이 나타난 거다.
그것도 정말 필요한 물자들만 골라 어마어마한 물량을 들고서.
그런데 여기다가 100억 달러를 얹어주겠단다.
무려 100억 달러.
우크라이나는 빈말이라도 잘 사는 나라가 아니다.
2021년 기준 1인당 명목 GDP가 4,000달러 남짓으로 필리핀이나 베트남과도 별 차이가 없는 유럽의 최빈국이 우크라이나다.
물론 그렇다고 우크라이나 생활 수준이 필리핀이나 베트남 정도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국토가 워낙 넓고 지하자원도 많은 데다가 국민들 교육 수준도 높고 사회적인 인프라나 시스템도 나름 충실한 편이라, 소수의 가문이 모든 부를 쥐고 나머지 국민은 거의 거지나 다름없는 필리핀에 비교하면 실례인 거지.
이래서 공식적인 GDP로 한 나라를 평가하면 안 된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고.
어쨌든 못 사는 나라임은 틀림없다는 말이다.
전쟁 나기 전에 외환보유고는 200억 달러 언저리에서 오르락내리락했다.
이런 상황에 100억 달러?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금 나를 거의 성자로 보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세인트 알렉스가 되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회장님!”
“100억 달러는 오늘 중으로 우크라이나 정부가 알려주는 공식 계좌로 입금될 겁니다.”
“그, 그렇게나 빨리!”
“상황이 급한데, 질질 끌 일이 아니잖아요.”
“맞습니다, 회장님! 정말 한시가 급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바로 보내드리는 것이니, 현명하게 잘 사용하세요.”
“감사합니다!”
“다만….”
“다만?”
“몇 가지는 꼭 좀 지켜주셔야겠어요.”
“말씀만 하시지요!”
젤렌스키 대통령은 말만 하면 뭐든지 다 하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긴, 돈이 100억 달러인데.
“별건 아니고, 일단 우리가 지원한다는 사실은 외부에 공표하지 말아 주세요.”
“예? 아니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하시고 왜?”
“그게 귀국에는 훌륭하지만, 푸틴 영감탱이에게는 쳐죽일 일이니까 그렇지요. 저는 푸틴에게서 홍차 따위는 받기 싫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알아서 마음껏 사용하시되 증빙을 최소한이라도 남겨 주세요. 솔직히 말해서 대통령님은 믿지만, 귀국의 시스템은 좀….”
“부, 부끄럽습니다.”
역시나 빈말로도 우크라이나가 깨끗한 나라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오죽했으면 2016년도에 IMF가 자금을 지원하면서 조건으로 부패청산과 경제 개혁을 내걸었을까.
이 와중에 내 돈을 쓱싹하는 미친 짓거리를 하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르는 거다.
난 내 돈이 누군가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꼴은 못 본다.
“혹시라도 누군가의 주머니로 내가 지원한 돈이 들어갔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나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모든 지원을 끊을 겁니다. 막말로 100억 달러는 내게 아무것도 아닌데, 그거 먹고 끝내려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단 한 푼도 헛되이 쓰이거나 누군가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관리하고 감독하겠습니다. 함부로 손을 대는 놈이 있다면, 그냥 죽여버리겠습니다!”
“아니 뭐 죽일 것까지야….”
“아닙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전시입니다! 전시에 군자금에 손을 대는 자가 있다면, 그건 곧 반역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요, 그런 마음이 중요합니다. 제가 볼 때, 우크라이나는 정말 저력이 있는 나라인데 시스템적으로 부패하고 낙후한 면이 많아서 발전을 못 했습니다. 부패를 청산하고 경제 개혁을 한다는 것, 평시라면 저항하는 세력들이 방해하겠지만 지금 같은 전시라면 오히려 가능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회장님.”
“위기는 기화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번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간다면, 오히려 우크라이나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리고 항상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뭐 명심까지….”
젤렌스키 대통령이 내게 극도로 공경하는 태도를 보이자 솔직히 좀 불편했다.
이 양반 처지에서는 당연하겠지만.
“그리고 마지막으로….”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중국과의 관계는 이제 정리하세요.”
“주, 중국이요?”
“왜요? 아직도 중국을 믿습니까? 이렇게 뒤통수를 맞고서도요?”
“그, 그게 아니라….”
중국에는 진심인 나다.
내 말투가 갑자기 매서워지자, 젤렌스키 대통령이 크게 당황했다.
사실 우크라이나는 이번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친중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2013년에 중국이 우크라이나에 핵우산을 씌워주기로 합의까지 했으며, 작년에는 신장 지역 인권 상황이 세계적으로 논쟁거리가 되었을 때도 우크라이나는 중국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임을 내세워 중국의 손을 들어 주었다.
뭐, 이해는 간다.
어쨌든 가난한 나라인 우크라이나에 중국은 경제 대국이자 군사 강국이며, 거리가 멀리 떨어져서 특별히 엮이는 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러시아가 중국의 베이징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개전을 미룰 정도로 중국과 러시아가 밀약한 것이 틀림없는 상황이다.
이런데도 중국과의 관계를 안 끊어?
우크라이나 국민 사이에서도 반중 감정이 끓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게 아니라면 뭘 망설이십니까? 과거야 어쨌든 간에 지금 중국은 귀국의 뒤통수를 치고 있잖습니까? UN 안보리의 침공 규탄 결의도 중국은 기권했잖아요? 그런데도 여전히 중국과 관계를 유지하고 싶으세요?”
“회장님, 중국은 우리 같은 가난한 나라에는 너무 큰 나라입니다. 저도 솔직히는 중국과 당장 모든 관계를 끊고 싶습니다. 하지만 국익을 생각하며….”
“쯧쯧! 왜요? 중국은 우크라이나에서 멀어 안심이세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거 실망입니다.”
“…….”
“중국이 멀다고 안심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발상입니다. 중국이 일대일로니 뭐니 해서 경제협력을 한 나라 중에 제대로 된 나라가 있어요? 파키스탄이고 스리랑카고 나라가 다 결딴이 나지 않았습니까? 그런 중국을 믿어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그나마 우리나라에 투자를 해주는….”
“에이, 정말! 제가 알아보니 우크라이나 경작지의 거의 10%를 중국이 사들였어요! 그게 투자예요? 실제로 우크라이나 경제에 도움이 되는,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세금을 내는 일자리냔 말입니다!”
“하아….”
젤렌스키 대통령도 답답한 모양인지 한숨을 쉬었다.
유럽 최빈국의 대통령.
참 고민이 많을 것이다.
투자도 투자지만, 중국은 이제 G2라 불리는 대국이다.
러시아와 전쟁을 하면서 중국까지 관계를 끊기는 어려울 거다.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지.
“대통령의 고민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세상은 이미 다시 양분화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시리아와 쿠바 등의 몇몇 거지 같은 나라들이 한편이 되고 미국과 유럽, 그리고 아시아의 일본과 우리나라와 호주가 한편을 먹는 형국입니다. 지금 가장 많이 자금을 지원하는 나라가 어디입니까?”
“미국과 유럽, 그리고 일본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입니다.”
“그럼! 무기는!”
“미국….”
대답을 들을 것도 없었다.
지금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유럽, 특히 미국의 지원이 끊어진다면 죽은 목숨이다.
그런데 여전히 중국과의 관계를 생각하다니?
핵우산?
중국이 미쳤냐?
그리고 그럴 능력은 되고?
“선택해야 합니다. 미국이 중국을 사실상 최대 적국으로 보는 세상이에요. 그 사이에서 양다리는 없습니다. 그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인데, 경제 규모로 우리나라 10분의 1밖에 안 되는 우크라이나가 그럴 수 있다고 보십니까?”
“…….”
막말로 러시아 전쟁의 최전선에 있지 않았다면 우크라이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잔인하지만, 한마디로 주제 파악을 하라는 소리였다.
다행히도 젤렌스키 대통령은 바로 알아들었다.
“휴우! 알겠습니다. 회장님 말씀대로 중국은 이미 우리의 뒤통수를 쳤습니다. 단교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존의 우호적인 모든 관계를 정리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특히나 제트엔진을 비롯한 항공산업을 중국과 협력하고 있는데, 그거 바로 단절하세요.”
“알겠습니다.”
“힘내세요! 저도 끝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끝으로 내가 립서비스로 한마디 하자, 젤렌스키 대통령은 오열했다.
“슬라바 우크라이니! 영웅들에게 영광을!”
“크흐흑! 우크라이나에 영광을!”
영상이 끊어지고, 역시 눈시울이 벌게져 있는 포노마렌코 대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대사님.”
“네, 회장님.”
“한국에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여기 남정원 부회장에게 말씀하세요. 무기만 아니라면 뭐든지 지원해 드릴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대사관 운영비도 따로 지원할 테니 그리 아세요.”
“아, 정말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나라가 저 모양인데 대사관 운영비나 제대로 나올까.
아이도 있던데 학교도 보내야 하고 말이다.
거듭 감격해 마지않는 포노마렌코 대사를 배웅하고 자리에 앉는데, 여태껏 묵묵히 배석하고 있던 남정원 회장이 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회장님.”
“네, 부회장님.”
“회장님은 정말 중국에 진심이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된 것이 모든 일이 결국은 중국으로 귀결되네요?”
“어흠….”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을 나보고 어쩌라고.
남정원 부회장에게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라고 하고, 다른 일들을 처리한 다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제 두어 달 빡세게 미국에서 일을 본 후에는 다시 한국으로 입국하여 결혼식을 하게 될 것이다.
***
한창 업무에 열중하는데, 머스크 놈이 회사로 찾아왔다.
웬만해서는 회사로는 잘 오지 않는 놈인데,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뭐? 이 자식이 정말 미쳤나?”
“나 하나도 안 미쳤다.”
“시끄러워! 트위터는 뜬금없이 무슨 트위터야! 그냥 평소대로 트위터 질이나 할 것이지!”
“야, 알렉스! 그러지 말고, 우리 같이 인수하자니까?”
“나가! 그딴 개소릴 하려면 나가라고!”
“…….”
머스크, 이 정신이 나간 놈이 나보고 트위터를 인수하잔다.
450억 달러씩이나 주고서.
진짜 미친 것 아니야?
아니, 미쳐도 좀 곱게 미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