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정말 자신이 있는 거예요?
“제인, 친구들은?”
“이번 달 말일에 한 비행기로 모두 오기로 했어.”
“몇 명이지?”
“15명이야.”
“좀 더 부르지 그랬어?”
“개인 사정으로 못 오는 친구도 있고, 그 정도면 부를 친구는 다 부르는 거야.”
“그래? 우리나란 몇십 명씩 오고 그러던데….”
“소미 언니가 그러던데, 한국에서는 그저 그런 친구들도 다 부른다면서?”
“보통은 그렇지.”
“미국에서는 그렇게 안 해. 정말 친한 친구들만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거든. 그저 그런 친구를 부르면 서로 부담스러워.”
“아….”
제인의 말을 들으니 그게 합리적인 것 같았다.
정말 우리나라는 직장 동료에 초중고는 물론이고 대학교 동창까지, 평소에는 연락도 잘 하지 않다가 결혼할 때쯤 되면 뜬금없이 카톡이 날아와서 당황스럽게 만들게 하기 일쑤인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문득 로체백화점 바이어가 결혼하던 것이 생각이 났다.
이제 막 과장으로 승진한 여자였는데, 그 바이어의 결혼식에는 좀 과장해서 우리나라 의류업체가 총출동한 것 같았다.
우리 회사에서는 내가 참석했는데, 내가 살다 살다가 축의금 내려고 20분이나 줄을 서본 건 아마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다.
나중에 듣기로는 업계에서 축의금으로 들어온 것만 억대는 우습게 넘어갔을 거라고.
어떻게 보면 씁쓸한 이야기다.
옛날 생각을 하니 우리 김현경 바이어는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정말 내게는 갑질도 하지 않고 참 친하게 지냈는데, 내가 미국으로 넘어오고 나서는 한 번도 연락하지 못했다.
내 이야기는 분명히 들었을 텐데.
이번에 들어가면 수소문 해 봐야겠다.
“친구들 숙소는 한국에서 다 알아서 하기로 했고, 비행기는?”
“아빠가 전부 비즈니스로 끊어주셨어.”
“잘했네.”
참, 장인어른인 존도 부자지.
전세기를 여러 대 동원한다고 했는데, 그나마 제인 친구들은 따로 오는 모양이었다.
“그럼 가볼까?”
“웅!”
5월 20일, 제인의 손을 잡고 전용기에 올랐다.
아, 장모님인 에이미도 같이.
존은 업무 때문에 결혼식 3일 전이나 따로 올 예정이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곧장 헬기를 타고 우리 집으로 향했는데 공중에서 본 우리 집은 벌써 주변이 공원처럼 되어있었다.
주변을 싹 밀어버린다고 하더니, 그렇게 한 모양이다.
“엄마! 우리 왔어요!”
“아이고, 내 새끼! 어서 와라.”
“엄마! 저도 왔어요.”
“어머! 제인! 넌 어쩌려고 자꾸 이뻐지니?”
좀 웃기지만, 제인도 나를 따라서 우리 엄마에게 엄마라고 부른다.
뭐, 정감이 있고 좋지.
그런데 엄마 말처럼 제인이 자꾸 이뻐지나?
새삼스럽게 제인을 쳐다보니 엄마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여자는 사랑을 받으면 더 이뻐진다고 하더니만, 내가 열과 성을 다하여 열심히 사랑했더니 확실히 성과가 있는 것이다.
더욱 가열차게 사랑해야지.
“사돈도 어서 와요.”
“호호호! 오랜만이어요.”
약간 이상하기는 하지만, 제인과 에이미도 우리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결혼 직전이라도 따로 지내는 것이 맞지 않냐는 말이 있었지만, 내가 그냥 뭉개버렸다.
나보고 2주씩이나 제인하고 떨어져 있으라고?
그건 말도 안 되지.
경호상의 문제를 들먹이며 우겨서 그렇게 하기로 한 거였다.
우리 집이 작은 것도 아니고.
여장을 풀고서 하루를 쉰 다음에, 낮에는 오후 2시나 3시까지 업무를 본 다음에 청첩장을 돌리기 시작했다.
윗분들에게는 당연히 직접 찾아뵙고 직접 드리는 것이 예의였고, 친구나 지인들도 마찬가지로 뜬금없이 카톡으로 전자 청첩장이나 날리는 짓은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1번은 당연히 장영동 이사장님이다.
“허허허! 내가 요즘 주례 연습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고 있어.”
“아니 뭘 그렇게까지 하세요? 부담 없이 해주셔도 됩니다.”
“그래도 내 첫 주례가 아니냐?”
“…….”
아무래도 주례사가 엄청나게 길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기, 이사장님….”
“응? 왜?”
“주례사가 너무 길어지면 좀 그렇지 않을까요?”
“뭐야? 내가 하는 주례가 싫어?”
“노! 노! 네버! 절대! 그럴 리가 있으려고요? 저는 정말 참 오래오래 듣고 싶은데요, 하지만 VIP들도 오고 해서 말이죠.”
“VIP라니? 누구? 혹시 재벌 회장들 말이냐?”
“에이, 그 사람들이 무슨 VIP예요?”
예전이야 쳐다도 못 보는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제대로 서열을 따지면 아득하게 아래인 사람들인데.
그나마 얼마 전부터의 안면이 있기에 불러주는 거였다.
“그럼?”
“조….”
“조?”
“조 바이든이라고….”
“응?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은데?”
“조 바이든 대통령이라고….”
“뭐, 뭐? 그 바이든이 이 바이든이라고? 미국 대통령이 온다는 거야?”
“오지 말라는데 자꾸 온다네요.”
“야, 야! 나 안 해!”
“왜 이러세요? 이사장님! 인제 와서 이러시면 제 결혼식은요?”
“말이 다르잖아!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저는 하객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요?”
“그, 그래도….”
“그리고, 또 있습니다.”
“뭐야? 교황이라도 오는 거냐?”
“우리 대통령도 오겠다고….”
“야! 너 내게 왜 이러냐?”
“그럼 다른 곳에도 들러야 해서 이만….”
“처, 철식아! 이보게! 강 회장!”
절규하는 이사장님에게서 후다닥 도망쳤다.
첫 주례인데 거물들이 참석한다고 하니까 부담은 되실 거다.
하지만, 이번 주례만 무사히 치른다면 다음부터는 어떤 주례에서도 담담할 겁니다, 이사장님.
“이야! 강철식이! 신수가 훤하구나, 훤해!”
“건강하시지요? 사장님?”
“으허허허! 나야 건강하지!”
다음 타자는 대성어패럴 홍 사장님이다.
애증이 얽힌 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첫 직장의 대표였던 분이다.
세월이 지나고 내가 사업을 하다 보니 이 양반에 대한 미움도 어느덧 가시더라.
지나치게 독하고 입이 아주 더러워서 문제였지, 경영은 기가 막히게 했고 나름대로 내게는 잘해 주신 편이었다.
이거 참, 추억은 아름답다고 하더니, 마치 군대의 미운 고참 같네.
“하하하!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닌 것이 아니라, 홍 사장님은 내게 회사를 팔고서 꽤 유유자적하게 지낸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얼굴에 은근히 서려 있던 독기가 많이 빠진 듯 보였다.
그리고 이 양반, 참 한결같다.
대략이나마 내가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 텐데, 내게 대하는 태도가 여전하시다.
그래, 원래 이런 양반이었지.
오히려 나도 편하다.
“저, 사장님.”
“말해 봐. 네놈이 내게 돈 빌려달라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고, 혹시 결혼하냐?”
“이야! 사장님 미아리에 돗자리 깔아도 되겠는데요?”
“푸하하하! 임마! 내가 누구냐? 척하면 척이지?”
“흐흐흐! 역시 대단하십니다!”
“으허허허!”
그래요, 그렇게 웃으면서 삽시다.
소리 지르지 않으니, 얼마나 좋아요?
“박 부사장님.”
“네, 회장님! 크흐흑!”
“왜, 왜 울려고 해요?”
“너무 오랜만에 불러주셔서….”
“…….”
대성어패럴에서 내 직속 상사였던 박진호 본부장을 오랜만에 불렀더니, 감격해서 울려고 한다.
이 양반도 참 어지간하네.
“미안합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좀 바빠서 자주 찾지를 못했네요. 다음에 우리 소주 한잔하시지요. 예전처럼 말이지요.”
“크으! 예전처럼! 영광, 또 영광이옵니다!”
“…….”
이러다가 성은이 망극하다는 소리도 나올 것 같다.
얼른 끝내자.
“이거 제 결혼식 청첩장입니다. 오실 거지요?”
“물론이지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아, 예! 거기까지!”
“헙!”
“그건 그렇고, 부사장님 혹시 김현경 바이어 근황 아세요?”
“김현경 바이어? 아, 로체 김현경 바이어! 회장님과 참 친했지요?”
“하하! 네, 맞습니다.”
“그 친구가…. 가만, 어디 있더라? 아! 지금은 상품본부에서 나와서 로체 인천 터미널점에서 플로어장으로 있습니다.”
“네? 인천점이면 인천점이지, 인천 터미널점은 뭐예요?”
“회장님은 모르시겠군요. 뉴월드 인천점 있잖습니까?”
“있지요. 거기 장사 잘되는 지점이잖아요?”
“그게 로체 인천 터미널점입니다.”
“네에? 아니 어떻게? 뉴월드가 그걸 뺏겼다고요? 그게 말이 되나?”
뉴월드 인천점은 장사가 무척이나 잘 되는 지점이었다.
그걸 경쟁사에게 뺏기다니?
“흐흐흐! 회장님 기억 안 나세요? 그거 부지를 인천시에서 로체에 파는 바람에 시끄러웠던 거?”
“아, 맞다! 거기 그랬죠? 그래도 뉴월드가 나가리라고는….”
“하여간 그렇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결국, 19년도부터는 로체가 건물까지 전부 매입했고요.”
“히야! 그게 되네?”
“하하! 그렇게 되어서 현재는 로체 인천점이 되었습니다.”
“알겠습니다.”
뉴월드와 로체와의 싸움 따위는 내가 이젠 알 바가 아니지.
***
다음 날, 시간을 내서 로체 인천점으로 출발했다.
박진호 부사장이 알려주었는데, 마침 오늘은 층 간담회가 있다고 한다.
아마 매출을 닦달하려고 업체 팀장들을 부른 모양이다.
“이름이 뭐라고 했죠?”
“네! 이칠호 대리입니다, 회장님!”
“응? 이치로?”
“이치로가 아니라 이칠호….”
“어유, 이름 가지고 놀림 좀 받았겠네요?”
“네….”
박진호 부사장이 붙여 준 직원과 같이 가는데, 이름이 특이해서 놀려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런데 팀장급 간담회인데 대리가 가도 돼요?”
“그럼요, 회장님. 우리 대성에서는 대리급만 가도 됩니다. 원래는 주임이 가도 되는데, 거기 김현경 플로어장이 예전에 상품본부 바이어라고 해서 나름 우대해주는 겁니다.”
“이야! 대성 많이 컸네?”
“그럼요! 의류 회사로는 우리나라 원탑인데요?”
“호오오! 하하하하!”
진짜 격세지감이네.
예전 같았으면 욕을 바가지로 먹었을 텐데, 이젠 팀장급 간담회에 주임 나부랭이들이 간다고 하니 말이다.
“그럼 먼저 들어가요. 나는 분위기 봐서 들어갈 테니까.”
“네, 회장님. 제 옆에 자리는 맡아 두겠습니다.”
“그렇게 해요.”
이치로 이 친구 은근히 눈치도 빠르고 싹싹했다.
예전의 대성이라면 데리고 있기 힘든 인재인데, 정말 대성 많이 컸다.
간담회가 오후 3시였는데, 매장을 잠시 구경하다가 간담회가 열리는 회의실을 슬쩍 열어보았다.
어두컴컴한 회의실.
보아하니 프로젝터를 쏘느라 불을 끄고 있었는데, 스크린 앞에서는 김현경 바이어가 레이저 포인터로 업체별 매출이 나온 액셀 시트를 가리키며 하나씩 조지는 것 같았다.
큭, 여전하구먼.
김현경 바이어가 스크린을 향해 있는 틈을 타서 슬그머니 이치로 대리 옆에 앉았다.
“두섬은 매출이 너무 저조해서 이거 올해 매출 목표 달성하기 힘들겠는데요? 조 팀장님!”
“네, 플로어장님.”
“매출 대책서 작성해서 다음 주까지 메일로 보내주세요.”
“하아, 알겠습니다.”
“대충 하시면 알지요? 내년 봄에 대규모 MD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눼….”
점에서 업체를 조질 때 쓰는 무기 중의 하나가 대규모 매장 공사를 하여 매장 재배치를 할 때 좋은 자리를 미끼로 사용하는 것이다.
매출이 시원찮으면 나쁜 자리로 보내거나 아예 빼버린다는 거지.
“다음은 대성. 대성은 브랜드 다섯 개가 모두 선방하고 있지만, 좀 아슬아슬한데? 이거 안심하면 안 되겠는데요? 대성, 올해 매출 목표 달성할 수 있지요?”
“네! 플로어장님! 자신 있습니다!”
나는 이치로의 입을 막으면서 내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어머, 무슨 근자감이야? 정말 자신이 있는 거예요?”
“이거 왜 이러셔? 정 안 되면 내 돈으로라도 매장 매출 올려주면 되잖아?”
“뭐, 뭐? 뭐예요? 이게 무슨 소리야?”
휙!
스크린을 응시하던 김현경 바이어가 고개를 내게 돌렸다.
그리고 씨익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입이 점점 벌어졌다.
“가, 강 팀장님?”
“잘 있었어요? 바이어님?”
그녀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