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여! 기동이 형!”
“왔냐? 앉아라.”
오랜만에 기동이 형하고 신호 형과 술 한잔하기로 해서 식당에 들어왔다.
그런데, 신호 형이 보이지 않았다.
“신호 형은?”
“차 박고 있어.”
“그래? 기사 데리고 오지 않았어?”
기동이 형과 신호 형은 지금은 정화재단의 최고위층 인사로 수십 조를 주무르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복지 재단이지만 당연히 기사가 배정되어 있었다.
“사적으로 술 마시러 오는데, 기사 데리고 오기가 좀 그래서.”
“에이, 우리가 무슨 공무원도 아닌데 뭘 그렇게 빡빡하게 해?”
“야, 우리가 일하는 곳이 어디냐? 복지 재단 아니냐? 네 덕에 돈은 넘쳐나지만, 그래도 항상 조심해야 해. 괜히 입방아에 오르면 재단에 피해가 갈 수도 있고 말이야.”
“흐흐흐! 형도 참, 이젠 재단 사람이 다 되었네?”
“임마! 우리가 설립 멤버인데 다 되기는 뭐가 돼?”
“그런가?”
“아, 그건 그렇고 오늘 우리 직원도 같이 데리고 왔다.”
“응? 무슨 직원?”
내 위치가 위치다 보니, 사적으로 형들을 만날 때도 원래부터 인연이 있던 사람이 아니면 같이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무슨 직원을 데리고 나와?
“글쎄? 그 직원은 널 예전에 한 번 봤다던데?”
“우리 재단 직원이? 회사에서 봤겠지.”
“그건 아니고 오래전에 너하고 한참 이야기도 했다던데?”
“잉? 누구지?”
“흐흐흐! 신호하고 같이 들어올 거니까, 오면 봐봐. 예전부터 너에게 꼭 다시 인사드리고 싶다고 노랠 불러서 오늘 특별히 데리고 나왔다. 괜찮지?”
“아니 뭐, 나야 상관없지만….”
상관은 없지만 그리 좋지는 않았다.
형들하고 오랜만에 회포를 푸는 자리였으니까.
“철식아!”
그때, 신호 형이 나를 부르면 식당 룸으로 들어왔다.
웬 젊고 이쁜 처자를 데리고 오는데, 이상하게 낯이 익기는 하였다.
누구지?
“어, 형. 이분은 누구?”
“흐흐흐! 너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구나?”
“누군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벌써 치매인가?
“안녕하셨어요? 오빠?”
“오, 오빠? 오빠라니?”
내가 왜 당신 오빠냐?
지구상에서 나를 오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딱 두 명이다.
소미하고 제인.
한때는 예전 여자친구 연주도 오빠라고 불렀지만, 그건 과거 이야기고.
“오빠가 오빠라고 부르라고 강요하셨잖아요?”
“예? 내가? 누구세요?”
“실망이네요. 그래도 기억하실 줄 알았는데….”
“헐….”
낙담한 표정으로 어깨를 내려뜨리는 정체불명의 젊은 여자.
이거 환장하겠네.
누가 보면 오해라도 하겠다.
“아니 난 정말….”
“처음에 아저씨라고 불렀더니, 막 화를 내셨잖아요?”
“내, 내가?”
“네, 그러면서 오빠라고 부르라고 하셨고요.”
“아니 이게 무슨…. 응? 아저씨? 오빠? 아아!”
그제야 내 머릿속에서 어떤 대화가 생각이 났다.
‘저기, 아저씨….’
‘응? 나?’
‘네, 아저씨요.’
‘나, 아저씨 아닌데?’
‘예?’
‘오빠라는 좋은 말을 놔두고, 왜 아저씨라고 부르지?’
‘푸웁! 호호호! 그러니까 더 아저씨 같잖아요?’
‘아! 몰라! 오빠라고 하지 않으면 대답 안 할 거야.’
‘호호! 알았어요, 오빠.’
그 아이다.
박달동 사다리 센터 1기생.
내게 감사하다고 하면서 다가온 아이.
그러면서 교대를 나와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였던….
나는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외쳤다.
“너, 너! 설마?”
“헤헤헤! 이제 기억이 나시다 보다.”
“소현이! 공소현! 맞지?”
“네, 맞아요. 저 소현이에요.”
“허어….”
내 기억력이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박달동 사다리 센터에서 봤을 때는 왜 그런지 위축되고 그늘이 잔뜩 깔려 있던 아이였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소현이는 그때 소현이가 전혀 아니었다.
외모야 그때도 상당히 이뻤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활짝 핀 미녀였다.
그늘이라고는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고.
이러니 내가 알아보지 못할 수밖에.
“세상에나, 아무리 시간이 흘렀지만 이렇게 변했을 줄이야….”
“저, 많이 변했어요?”
“많이 변한 정도가 아니잖아? 완전히 다른 사람인데?”
“히잉! 나 이상해졌나 보다….”
“그, 그게 아니라 엄청나게 이뻐졌잖아? 이러니 내가 몰라볼 수밖에….”
“오빠? 진짜요?”
“응, 너 정말 이뻐졌어. 너무 이쁘고 보기 좋아.”
“고마워요, 오빠. 다 오빠 덕분이에요.”
“이야, 이거 정말! 하하하!”
너무나 반가웠다.
특히나 이렇게 이뻐지고 밝아진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정말 가슴이 뿌듯해졌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대체 기동이 형하고 신호 형하고는 어떻게 아는 것이지?
보아하니 상당히 가까운 사이들 같은데?
“아니 근데, 대체 형들하고 소현이는 어떻게 알게 된 거야? 그게 아닌가? 사다리 1기생이니까 알 수야 있겠지만, 어떻게 같이 나온 거지?”
“푸하하! 소현이 우리 회사 다닌다.”
“응? 우리 회사라니?”
“우리 재단 직원이라고 임마! 벌써 4년 차인가?”
“엥? 우리 직원이라고?”
“응, 그것도 바로 내 직속이야.”
소현이는 교대 간다고 했는데?
“소현아, 너 교대는 어떻게 된 거야?”
“헤헤! 그것도 기억하시는구나. 저 교대 안 갔어요.”
“아니 왜? 아이들 가르치는 것이 꿈이라고 했잖아?”
“오빠 만나고 방향을 틀었어요.”
“나를 만나고?”
“네, 그때 오빠가 우리 같은 아이들이 공부를 원하면 뭐든지 지원해 주시겠다고 하셨잖아요?”
“그, 그랬지.”
“저도 그 말을 듣고서 방향을 바꿨어요. 우리 같은 아이들이 세상에 정상적으로 나가는 것에 도움이 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교대 대신에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했어요. 그리고 졸업 후에 바로 정화재단에 입사하였고요.”
“아, 그랬구나….”
허 참, 내 말 한마디에 사람 인생이 이렇게도 바뀔 수가 있구나.
그때 웃고만 있던 기동이 형이 입을 열었다.
“소현이 쟤, 우리 재단의 인재야.”
“그래?”
“응, 소현이 벌써 과장급이다.”
“뭐? 이제 4년 차라면서?”
“우리 회사에 다니면서 재작년에 공인회계사 시험에 붙었거든.”
“공인회계사를? 아니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면서?”
“그러니까 인재라는 거다. 쟤, 양서대 사회복지학과에 다니면서 독하게 공부해서 경영학도 복수로 전공했어.”
“오!”
“그래서 작년에 1년간 회계법인에서 연수하고 돌아왔고, 돌아오면서 과장 달아줬다. 뭐, 요즘은 대기업에서 공인회계사들 대리급을 채용한다지만, 소현이는 이미 우리 회사에서 이미 경력이 있으니까 바로 과장을 달아줬지. 다른 아이들에게도 동기 부여도 될 수 있고 해서 말이다. 그런데 일을 여간 잘하는 것이 아니야.”
“오오!”
공인회계사가 예전과 같지 않다지만, 얼마나 어려운 시험인 줄은 나도 안다.
그런데 그 어려운 시험을 복수전공을 거쳐서 회사에 다니면서 패스하였다는 말이지?
그리고 일도 잘하고?
“하하하!”
“기쁘냐?”
“그럼요! 꼭 내 딸이 성공한 것 같은데?”
“지랄하고 있네, 흐흐흐! 하긴, 이게 우리 일의 기쁨이자 보람이지. 우리가 보살펴서 사회로 내보낸 아이들이 번듯하게 사회에서 자리 잡는 것 말이야.”
“하하하!”
“하하하!”
너무나 기분 좋은 밤이었기에, 우리는 정말 오랜만에 진탕 술을 마시면서 웃고 떠들었다.
그래, 이게 아이들을 돕는 맛이지.
다른 아이들도 전부 잘되었으면 좋겠다.
꼭 소현이처럼 무슨 전문인이 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어디서든 한사람 몫을 하면서 자립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뿌듯한 마음으로 만취하여 귀가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나는 한동안 꾸지 않았던 꿈을 꿨다.
어딘지 모르겠지만,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 형형색색의 이상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분장도 하고 길거리에 나와서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들었다.
그래, 코로나로 답답하던 것이 이제야 풀리니 저럴 만도 하지.
근데 웬 탈바가지냐?
대게 이건 뭐지?
아! 할로윈 데이?
할로윈 데이 축제구나.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다.
어이구, 발 디딜 틈도 없는데?
이거 숨도 못 쉴 것 같았다.
경찰이 제대로 통제해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인파가 너무 몰리다 보니 역부족인 것 같았다.
이거 참, 우리나라 같은데 할로윈 데이가 이렇게나 엄청난 축제였구나.
나는 아싸에 찐따라서 전혀 몰랐었다.
국적도 다양하고 각양각색의 분장을 한 젊은 아이들은 점점 몰려들었다.
이거 위험하다.
대체 어딘데 이렇게 좁은 곳에 이 많은 인파가 몰린 것이지?
내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시야에 골목 옆에 있는 거대한 호텔의 간판이 보였다.
찰톤 호텔.
아, 이태원 찰톤 호텔이구나!
이태원에서는 가장 핫플레이스고, 나도 근방에서 몇 번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현도 백화점의 지점 대리 하나가 그쪽에 살아서 어울렸었으니까.
그런데, 이거 점점 장난이 아니다.
인파가 점점 몰려들었는데, 특히 찰톤 호텔의 서편 골목은 좁디좁은 곳에 거의 사람이 우겨져 있다시피 하였다.
밀고 밀리고, 골목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 하는 젊은이들.
꿈속에서조차 내 머리털이 서기 시작하였다.
진짜 위험하다.
이러다가는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은데, 왜 자꾸 이쪽으로 밀려드는 거냐고!
결국, 파국이 다가왔다.
‘미, 밀지 마!’
‘아악! 제발 밀지 말아요! 엉엉!’
‘살려줘요! 숨이 막혀!’
‘아아아악!’
사람들이 깔리고 또 깔렸고, 그 모습이 너무 처참하면서 이상하게 내 숨도 가빠지기 시작하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이런 일도 있을 수가 있나?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깔린 사람들의 의식이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이 느껴져서 나는 소리를 질렀다.
‘밀지 마! 사람이 죽는단 말이야!’
내 밑에도 젊은 여자애들 여럿이 깔려 있었다.
이미 얼굴이 새파래지는 것이 지금 당장 구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사람이 죽는다고 이 자식들아! 제발 좀 밀지 마!’
‘아아아악!’
얼마 후, 이젠 비명도 들려오지 않는다.
곳곳에 119 응급구조대가 한 명이라도 살리기 위하여 심폐소생술을 펼치고 있었고, 이미 고인이 된 젊디젊은 아이들의 시신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족히 수백 명은 될 듯하다.
말도 안 된다.
세상에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너무 분통이 터지고 참담한 심정에, 나는 그만 엉엉 울고 말았다.
“크흐흑! 밀지 말라고 했잖아! 어엉!”
“오빠!”
“크허엉!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엉엉!”
“오빠! 일어나요! 오빠!”
“어엉! 허어억!”
그제야 나는 꿈에서 깨어났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오빠, 대체 무슨 일이야? 아니 무슨 악몽을….”
“허억! 허억!”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나를 제인이 안아주자, 그제야 조금씩 안정이 되기 시작하였다.
“오빠, 대체 무슨 악몽을 심하게 꿔요?”
“후우! 많이 소리 질렀니?”
“말도 마, 오빠. 내가 흔들고 불러도 깨지도 못하고, 너무 무서웠어….”
“미안. 미안해 제인. 아무 일도 아니야. 오빠가 가끔 이렇게 악몽을 심하게 꿔.”
“이젠 괜찮아?”
“그래, 괜찮아. 오빤 괜찮아….”
“하유….”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물을 마시며 정신을 차리며 중얼거렸다.
“이게 진짜로 일어난다고?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너무나 어처구니없어서, 나는 한참을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