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날 죽일 셈이냐?
“저기,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아니 왜요? 우리 회원들이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데요?”
“그게 그러니까…. 아! 몰라! 하여간 싫어! 나는 사람들 많이 모인 곳에 얼굴 내미는 것이 싫단 말이야!”
“그런 게 어딨어요? 지난번에 약속하셨잖아요!”
“난 분명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들어준다고 했는데? 그리고 그런 게 왜 없어? 여기 있지 어디 있기는?”
“아유! 정말!”
“하아….”
내가 어쩌다가 내 집무실에서 생떼를 부리게 되었을까?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원인은 바로 내 앞에서 나를 조르고 있는 이 아이, 소현이 때문이다.
대체 뭘 조르는데 싫다고 하냐고?
30분 전으로 돌아가 보자.
“회장님, 정화재단의 공소현 과장이 찾아왔습니다. 약속되었다고 하는데요?”
“아! 소현이? 깜빡했네. 어서 들어오라고 하세요. 약속되었는데, 내가 깜빡하고 비서실에 이야기 안 했네요.”
“네, 회장님.”
어제 소현이에게서 연락이 와서 오늘 잠시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그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버럭버럭했겠지만, 내가 어떻게 이 아이에게 버럭댈 수 있을까?
소미와 제인 이외에는 유일하게 오빠라 부르는 아이인데?
그래서 알았다고 하며 시간 약속을 했는데, 내가 그만 깜빡하고 비서실에 통보하지 않는 바람에 입구에서 차단을 당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소현이에게 한 소릴 들을 것 같았다.
젠장, 이제 30대 끄트머리인데 벌써 치매가 오나?
술 좀 적당히 마셔야겠다.
“오빠, 안녕하세요?”
“오! 소현아! 오빠가 미안! 너와 만나기로 한 것을 깜빡했네?”
“헤헤헤! 괜찮아요. 뭐, 그럴 수도 있죠.”
“하하하! 우리 소현이는 참 마음도 넓어. 그래, 앉아라.”
“네, 오빠.”
비서가 차를 내오고 잠시 한담을 나누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 우리 소현이가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했을까?”
“다른 것이 아니라요, 접때 약속한 것 있잖아요.”
“응? 약속? 무슨 약속?”
“아이, 참? 저번에 같이 술 마시면서 약속하셨잖아요? 내가 원하는 부탁 하나는 무조건 꼭 들어주신다고?”
“으, 응? 내가 그랬나?”
“2차 집에 가서 제 머릴 쓰다듬으면서 말씀하셨거든요?”
“아….”
이제야 생각이 났다.
그때 소현이가 너무 기특해서 나도 모르게 약속을 했었구나.
“칫! 이제 생각나세요?”
“미안, 미안. 내가 그때 좀 취했었나 봐. 이제 생각이 나네?”
“뭐예요? 그럼 술 먹고 한 말이니까 아니라는 말씀?”
“에이! 사람을 어떻게 보고? 나는 내 입 밖으로 낸 말을 어겨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이거 왜 이러셔?”
“그럼 진짜지요?”
“그럼! 뭐든지 말만 해. 내가 다 들어 준다!”
막말로 거액을 달라고 해도 줄 것이다.
물론 소현이가 그럴 애도 아니지만 말이다.
“헤헤헤! 그럼 약속을 지켜 주세요.”
“응? 벌써 써먹으려고?”
“묵혀두면 뭐해요?”
“그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내가 소현이에게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한 말은 정말이야. 그 말은 즉, 너에게는 어마어마한 기회라는 거다. 알겠어?”
세계 최고 부자가 한 약속이다.
나에게는 그냥 술 먹다가 한 소리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엄청난 기회인 것이다.
소현이가 혹시 허투루 쓸까 봐 걱정되었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번에 쓰려는 것이고요.”
“흐음, 좋아! 뭐든 말해 봐. 오빠가 전부 들어 준다!”
“이야! 신난다!”
“하하하! 녀석, 그래 원하는 것이 뭔데?”
“이번 토요일에 서울 올림픽 경기장에서 행사가 있는데, 혹시 아세요?”
“응? 모르겠는데?”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정화재단에서는 매년 사다리 멤버들을 위해서 축제를 열어요.”
“추, 축제? 사다리 멤버?”
얼마 전의 할로윈 건으로 축제라면 겁부터 나는 상황이다.
하여간 그건 그렇고, 사다리 멤버는 또 뭐지?
“하나도 모르시는구나. 우리 사다리 센터에 있거나 출신 아이들이 만든 것이 사다리 회예요.”
“아, 사다리 출신이라 사다리 회? 그런 모임이 있었구나. 그런데 모임 이름이 좀….”
“어때서요? 사다리 출신이라 사다리 회라 지었는데?”
“아니 좀, 무슨 일식집 생선회 같은 느낌이….”
“오빠!”
“쏘리, 쏘리! 하여간 그래서?”
그나마 다금바리 회라고 짓지 않은 것이 어디냐?
“오빠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정말 큰 행사예요. 뭐랄까? 비록 부모는 없거나 버려졌지만, 우리 서로 서로가 한 가족임을 확인하는 자리거든요.”
“…….”
내가 너무 가볍게 들은 것 같았다.
그랬다.
이 아이들에게는 사다리 센터가 집이고, 서로 서로가 유일한 가족인 것이었다.
“미안하다, 내가 너무 무심했던 모양이다. 근데 무슨 행사를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하지? 너무 크지 않나?”
“그럼 5만 명이 넘게 모이는데, 그만한 장소가 또 있어요?”
“5만 명? 그렇게나 많아?”
“우리 사다리 회는 준회원이 정화재단에서 운영하거나 지원하는 보육원에 있는 고등학생부터예요. 거기다가 몇 년 전부터는 센터에 있지 않더라도 별도로 지원하는 조손 가구 아이들도 가입 자격이 있고요.”
“아, 그럼 정회원은?”
“사다리 센터 출신이나, 센터 출신이 아니더라도 장학금을 지원받거나 받았던 아이들이죠. 그래서 회원이 엄청나게 많아요. 그러니 5만 명도 일부라고요.”
“아….”
이거 좀 민망해 졌다.
아버지와 형들에게 맡겨 놓고 나 몰라라 한 것 같아서.
“험험, 지원은 충분하고?”
“그럼요. 기동이 아저씨와 선호 아저씨는 물론이고 사무총장님께서 얼마나 신경을 써 주시는데요.”
“우리 아버지가?”
“네, 정말 마음만 먹으면 해외 팝스타들도 초청이 가능할 정도예요.”
“하하! 그거 다행이네.”
내가 손이 큰 것은 다 우리 아버지 닮아서다.
역시 우리 아버지!
지나치게 손이 커서 집안을 말아 드신 것이 문제였지만.
“그래서 이번에도 국내 톱스타들이 많이 참여하기로 했어요. 방탄돌격단, 블루핑크, 이지금, 그리고 사이까지….”
“오오! 정말 신경 좀 썼네? 게다가 사이는 축제의 황제 아니냐?”
“헤헤! 맞아요. 작년부터 참여해 주었었는데, 이번에도 아주 꿈뻑쇼를 제대로 해준다고 했어요.”
“하하하! 그거 재밌겠다.”
“그리고 안기환 님까지….”
“아, 안기환? 그 양반은 연식이 좀 된 것 같은데? 너희 또래나 밑의 아이들이 알 만한 사람도 아니고?”
안기환은 나도 좋아하는 가수지만, 10대 중후반에서 20대 청년들이 선호하는 가수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니 무리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마 이름도 모를 것이 틀림없었다.
대표적인 히트곡을 들어야 ‘아! 그 노래!’ 할 것 같은데?
“사무총장님께서 좋아하신다고 하셔서….”
“어흠!”
어째, 우리 아버지가 좋아하는 가수가 거기에 왜 껴있나 했네.
에이, 아버지도 참.
아이들 좋아하는 젊은 가수들이나 부를 것이지.
그래도 트롯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니 다행이었다.
어쨌든 나머지 출연진들이 워낙 쟁쟁하니까, 한 명 정도야.
방탄돌격단과 블루핑크는 두말할 것 없는 당대의 월드 스타들이고, 이지금은 국내 여성 솔로 가수 원탑을 10년 가까이 찍고 있는 최고의 가수다.
게다가, ‘경남스타일’로 10년 전에 세계를 들썩이게 했던 사이까지 출연한다니.
이거 돈 주고 보려면 100만 원에 표를 내놓더라도 매진될 터였다.
“그래, 그래서 네 부탁은 뭐야? 재단에서 충분히 지원하는 것 같은데?”
“다 있는데, 하나가 빠졌잖아요?”
“응? 그게 뭔데? 혹시 해외 톱스타 말이냐? 그럼 진작 말했어야지. 진작 말했으면 콜드플레이나 비욘세라도 불러주었을 텐데….”
속으로 여차하면 평소 출연료의 몇 배를 더 주더라도 데리고 올 요량이었지만, 일정이 너무 빡세다.
하지만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있을까.
여차하면 당장 일정이 비는 해외 톱스타들에게 돈다발을 안겨주고 전용기로 쓸어오라고 하면 되겠지.
비욘세는 인도 재벌 랄라이언스 그룹 회장 딸내미 결혼식에도 가서 돈 받고 노래 부르더라.
아마 30억을 받았다지?
그럼 우린 50억을 주는 거다.
그럼 무조건 온다.
“아이, 참? 오빠도? 우리가 무슨 스타에 환장했어요?”
“그럼?”
“우리가 모두 너무나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빠졌잖아요?”
“그니까, 그게 누군데?”
“우리에게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신 사람, 우리가 서로 가족이 되게 해준 사람, 그리고 우리가 꿈을 펼칠 수 있도록 해준 사람….”
“어, 어….”
불길한 예감이 뒷골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어째 번거로운 일에 휘말릴 것 같은 느낌….
“오빠만 참석해 주시면 완벽해요.”
“나, 나?”
“네, 오빠요. 우리 회원들 모두 오빠가 참석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저기,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된 것이다.
환장하겠네.
“정말 약속 안 지키실 거에요?”
“아니, 그게 아니라…. 소현아, 그러지 말고 다른 것을 말해 봐, 응? 난 정말 누구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해서 말이지….”
“실망이에요, 오빠. 우리가 오빠에게 이거밖에 안 되는군요.”
“그런 것이 아니라니까는 그러네?”
“우리 사다리 회 사이트에서는 모두가 오빠 이야기만 해요.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대부분 사회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렸을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어떤 분일까? 하고 말이지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오빠는 우리에게 아버지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니 자식이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외면하시면…. 히잉!”
“…….”
미쳐버리겠네.
하아, 내가 졌다.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못 나간다고 하면 내가 죽일 놈이 되는 것이다.
“후유! 알았어! 가면 될 것 아니야?”
“진짜지요?”
“참석만 하면 되는 거지?”
“에이, 그건 아니죠. 우리 회원들에게 격려의 말씀도 해주셔야….”
“날 죽일 셈이냐?”
“…….”
* * *
결국 토요일이 되자 나는 잠실의 올림픽 주경기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제인과 함께.
“오빠, 왜 그렇게 인상을 써? 꼭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자기야.”
“웅, 오빠.”
“난 정말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싫거든?”
“오빠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아는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잖아. 오빠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도 간절하게 보고 싶다는데….”
“하아….”
“아, 좀! 한숨 좀 그만 쉬어!”
“하아….”
“…….”
그렇게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도착한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은 이미 무슨 행사를 하는지 함성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있었다.
“오셨어요, 오빠?”
“응, 소현아. 여기 인사해. 결혼식 때 봤지? 내 와이프 제인이야.”
“우와아아! 저번에 결혼식 때도 봤지만, 이렇게 가까이 보니까 너무 이쁘시다! 무슨 연예인이에요? 지금 대기실에 있는 아이돌 스타들보다도 훨씬 미인이세요!”
“어머! 고마워요. 그리고 말씀 많이 들었어요.”
“어흠! 우리 제인이 이쁘기는 하지.”
팔불출 같지만, 우리 제인이 이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이고.
그리고 마침내, 내가 무대로 나가서 인사해야 할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