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노인 학대도 좀 적당히 해야지.
독일 방문은 생각보다 쉽게 성사되었다.
독일 정부에서는 이전부터 나에게 초청 의사를 수차례 전달했으나, 내가 사양하고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다고 하니까, 곧바로 어서옵시오! 하는데 내가 다 민망할 정도였다.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네.
독일로 가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었다.
뚜르륵! 뚜르륵!
- 여보세요? 알렉스?
“에, 조. 저 알렉스예요.”
- 오호! 우리 알렉스구나! 네가 먼저 전화를 다 하고 웬일이냐?
내가 왜 ‘우리 알렉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쉬운 놈은 나니까 넘어가자.
“다른 것이 아니라, 저 지금 폴란드에 있는데요….”
내가 폴란드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설명하자, 바이든 대통령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 흐음, 두다 대통령이 머릴 굴렸구나. 너를 끌어들이다니.
“하아, 그러게나 말입니다. 인제 와서 발을 뺄 수도 없고요.”
-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일단 독일에 연락했더니, 언제든지 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일 저녁에 비공식적으로 올라프 슐츠 총리와 만나기로 했어요.”
- 그건 당연한 일이지. 지금 지구상에서 네 방문을 거부할 나라는 없을 거다.
“에이, 조도 참? 왜 그래요?”
- 그게 현실이야. 너는 이젠 1인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 말이다. 어딜 가도 웬만한 강대국 대통령 이상의 대접을 받을 것이고.
“쩝, 그렇다고 치지요.”
- 그렇다고 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니까? 하여간 그건 그렇고, 그럼 나에게 전화 건 용건이 혹시?
“독일이 전차 공여를 승인하게 하려면 약간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 흐음, 나도 몇 번 말해 봤는데 아주 완강하더라. 전차 공여를 승인했다가 러시아에 찍히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하더라고.
“그래서 조에게 부탁하려고요.”
- 내가 말해도 안 듣는다니까? 그렇다고 그런 문제를 가지고 강압적으로 말할 수도 없어. 독일 정도 되는 나라에 말이지.
독일 정도나 되니까 미국의 요청에도 버티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나라 같았으면…. 더 말을 말자.
“제 부탁은 압력을 가해 달라는 것이 아니에요.”
- 음? 그럼?
“지금 독일의 입장은 총대 메기가 싫다는 것 아닙니까?”
- 그런 셈이지. 그래서 정 전차를 주고 싶으면 우리보고 주라고 하는 것이고. 일단 우리 미국이 먼저 주면 묻어갈 수 있으니까, 덜 찍힌다고 생각하는 걸 거야.
“그럼 미국이 전차를 주면 되잖아요?”
- 무슨 소리야? 군사에 대하여 잘 아는 네가 할 소리가 아닌데? 우리 에이브럼스 전차는 제대로 군수 유지가 가능한 나라가 아니면 운용할 수가 없어. 알잖아? 엔진이 망할 가스터빈 엔진이라는 거. 그걸 우크라이나에 주었다가는 얼마 쓰지도 못하고 기름이 떨어져서 길에서 멈춰 서거나 고장이 날 거야. 우리 미국의 현재 주력 전차가 그런 꼴을 당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어. 게다가 열화우라늄 복합장갑은 수출용에 달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 장갑도 일반 복합장갑으로 교체해야 하는데 지금 그럴 새가 어디 있다고?
“잘 알지요. 하지만, 제가 주자고 말하는 전차는 에이브럼스 전차가 아니에요.”
- 응? 그럼?
“슈퍼 패튼!”
- 뭐? 슈퍼 패튼? M60 전차를 말이냐? 그 고물을?
“…….”
미안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슈퍼’ 패튼도 아닌, 그냥 패튼인 M48 전차를 아직도 운용하고 있답니다.
일명 ‘똥튼’을 말입니다.
젠장, 이참에 내가 돈을 내서라도 M48 노인네는 쉬게 해줘야겠다.
노인 학대도 좀 적당히 해야지.
“저기, 우리 한국은 M60 전차도 아닌 무려 M48 패튼을 운용하고 있습니다만….”
- 뭐? M48 전차를? 그럴 리가. 그 전차는 1950년대에 개발된 전차가 아닌가? 한국이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런 고대 유물을? 박물관에 있는 걸 잘못 아는 것 아니야?
“에이, 진짜….”
쪽팔리게 왜 이리 놀라셔?
심지어 우리 해병대가 얼마 전까지 T자형 포구제퇴기를 쓰는 90mm 주포를 탑재한 M48a3k를 운용했었다는 것을 알면 기절이라도 할 태세다.
진짜 다음에 한국에 가면 무조건 전부 바꿔주어야겠다.
“부끄럽지만 사실이에요.”
- 허어! 한국이 생각보다 어려운 모양이구나.
“하여간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고, M60 전차를 주는 것이 어때요? 그건 정치적으로 부담도 없을 것 아닙니까? 디젤 엔진을 사용하니 운용하기도 편할 것이고요.”
- 흐음….
“게다가 좀 오래된 전차이기는 하지만, 전차는 전차란 말이지요. 그걸 우크라이나에 주면 독일이 내세우는 명분도 깨지는 셈이지요.”
- 나쁘지 않은 생각이기는 하다만, M60 전차가 제대로 전력이 될까? 이거 주고서 욕을 먹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드는구나.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하시네요. 충분한 전력이 될 터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1991년 걸프 전쟁 당시에 미국 해병대가 이라크의 T-62 전차와 T-72 전차를 모조리 격파하면서 한 대도 잃지 않은 적이 있어요. 그것도 당시 미 해병대의 M60 전차는 레이저 거리측정기조차도 달리지 않은 M60A1 RISE 사양이었다고요.”
- 호오? 그런 적이 있었어?
미국 대통령이라고 하여도 이런 것까지 알지는 못한다.
대통령이 밀덕이 아닌 이상에는.
“물어보시면 바로 확인하실 수 있잖아요? 게다가, 제가 이번에 주자는 것은 열영상 사이트까지 달린 M60A3 TTS(Tank Thermal Sights) 버전이에요. 명분용으로는 물론이고 실제로도 충분한 전력이 될 거라고요.”
- 그래?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 알았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게 하지.
“진짜지요? 저, 슐츠 총리를 만나면 그렇게 말할 겁니다?”
- 그렇게 한다니까? 나, 미국 대통령이야!
“흐흐흐! 누가 뭐래요?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조.”
- 고맙기는? 오히려 내가 고맙지.
휴우, 이렇게 하나는 해결되었다.
어디, 이젠 슐츠가 뭐라고 하는지 보자.
***
슐츠 총리와의 만남은 다음 날 저녁, 독일의 총리 관저인 연방총리청(Bundeskanzleramt)에서 이루어졌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그리고 독일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환영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르마 인베스트먼트의 알렉스 강입니다.”
“하하하! 회장님이라면 한밤중에 쳐들어와도 환영합니다.”
빈말로도 인상이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슐츠 독일 총리다.
머리털과 콧수염만 있으면 묘하게 아돌프 히틀러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환영하여 준다니까 고맙네.
그렇게 정상회담(?)은 아니고 환담 비스름한 것을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역시 슐츠의 관심사는 내 사업에 집중되었다.
특히나 에너지, 노골적으로 에너지 확보에 관하여 관심을 보였는데, 이거 잘하면 좋은 결과를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연합과 나토의 일원으로서, 회장님께서 우크라이나에 많은 물자와 자금을 지원하시는 것에 대하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정말 개인이 지원하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저 운이 좋아서 많은 돈을 벌었기에, 일부는 사회에 환원하는 차원에서 지원하는 겁니다.”
“세상의 많은 부자가 그렇게 말하지만, 실제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회장님의 선행은 칭송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네?”
“회장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우리 독일은 러시아의 에너지에 지나치게 의존했습니다. 아무리 저렴했더라도 너무 지나쳤지요.”
“잘 알고 있습니다. 메르켈 전 총리께서 독일을 잘 이끌어 오셨지만, 좀 심하기는 했지요.”
“참으로 뼈 아픈 일입니다. 그런데, 인제 와서 러시아 에너지의 의존도를 낮추려고 하니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이게 단기간 내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시민들에게 고통 분담을 강요하고 최대한 빨리 서두른다고 하여도 적어도 몇 년은 걸릴 일이니까요.”
“당연히 그렇겠지요.”
무려 세계 4위의 경제 대국 독일의 에너지 소비 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적어도 10여 년의 기간에 단계적으로 변경해도 힘든 일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는 것이 문제지.
당장 천연가스 라인을 끊어야 하는 상황이니까.
“그래서 말입니다만, 회장님께서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이번에 에너지 투자에 크게 성공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요.”
“흐음….”
“회장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조금 더 수월하게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를 줄일 수 있을 겁니다. 부탁드립니다.”
“제가 만약 도와드린다면, 독일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단절할 수 있습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우리 독일이 러시아와 어떤 관계라도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만?”
슐츠 총리가 정색하면서 반문했다.
“사실 제가 폴란드에 방문하여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아!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나셨습니까? 그 사람이 뭐라 하던가요?”
“전차가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아주 절실하게 말입니다. 그런데 독일 레오파드 2 전차의 공여 승인을 거부하여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하고요.”
“험험, 그 이야기는 회장님과 나눌 만한 사안이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안 되고, 에너지 이야기는 되는 것입니까?”
“그런 말이 아니잖습니까? 전차 공여는 우리 독일에 굉장히 예민한 문제입니다.”
“총리님, 저는 솔직하게 대화하고 싶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럼 솔직하게 말해 볼까요?”
“좋습니다!”
그래, 간을 보지 말고 서로 밑천 전부 드러내 보자고.
“저부터 말씀드리지요. 솔직히 독일은 러시아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닙니까? 상황이 이렇게 된 와중에도 말이지요.”
“아니라고는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안타깝기는 하지만, 국익이 최우선이니까요.”
“아니, 이 마당에 아직도 러시아산 에너지를 바라고 계세요? 이렇게 뜨거운 맛을 보고서도?”
“국가 간에는 영원한 적도, 동지는 없는 법입니다. 혹시 압니까? 전쟁이 어떻게 끝나든 몇 년 이후에는 다시 러시아산 가스를 공급 받을 수 있을지도요. 라인은 이미 건설되어 있으니, 이건 우리 독일이나 러시아에 최상의 시나리오입니다만?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 독일이 러시아를 적대한 주역으로 꼽히는 것은 사양하고 싶습니다.”
“네에? 러시아에 에너지를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말입니까?”
“물론 지금처럼 무식하게는 아니지요. 솔직히 50% 이상을 한 나라에 의존한 것은 명백한 실책입니다. 하지만, 20~30% 선에서는 충분히 제어가 가능할 겁니다. 그만큼 러시아산 에너지는 매력적이니까요.”
“허어….”
“더 솔직하게 말해 볼까요? 저는 젤렌스키 대통령을 마냥 이쁘게만 볼 수 없습니다. 도망가지 않고 결사 항전을 외치면서 서방 세계의 영웅으로 등극했지만 말입니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이번 전쟁, 좀 더 현명하게 대처했다면 피할 수도 있는 전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토가 먼저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유럽연합 가입을 우선으로 했다면, 러시아의 반발도 지금처럼 크지는 않았을 것이고 훗날을 기약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아마추어가…. 하아, 이 이야기는 그만하겠습니다.”
독일의 지도자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약간 충격으로 다가왔다.
일리가 전혀 없다고 볼 수도 없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