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초큼 미안하게 생각해?
“저기, 회장님….”
“네, 부회장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패튼 할아버지를 쉬게 하는 오더를 내리고 며칠 후, 남정원 부회장이 다시 불편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다가 말았다.
무슨 문제가 있나?
“다른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또….”
“또? 이번에는 뭡니까?”
다시 정부로 시작하자 솔직히 슬슬 짜증이 나려고 했다.
정말 내가 호구로 보이는 거야, 뭐야?
진짜 한국에 가능하면 오질 말든가 해야지….
“살짝 짜증이 나기는 하지만, 우리 회사에 이익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혹시, 뉴스 안 보셨습니까?”
“뉴스요? 요즘 며칠 바빴고, 지인들을 만나느라 뉴스는 잘 못 봤는데요.”
명색이 투자회사 회장이라 미국이나 유럽 등 덩치가 큰 경제권의 뉴스는 열심히 챙겨보지만, 솔직히 우리 한국의 경제 뉴스는 가능하면 챙겨보려고 해도 바쁘면 건너뛸 때도 많았다.
막말로 한국 시장은 아직 내가 관심을 가질 정도의 규모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정원 부회장이 워낙 똑소리 나게 일을 잘하고 있으니 관여할 필요도 크지 않았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나라 채권의 신용도가 폭락했습니다.”
“네? 왜요? 갑자기?”
“어떤 지방 자치단체장이 삽질을 해서요. 그것도 아주 크게 말입니다.”
“엥?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게 그러니까, 어떻게 시작이 되었느냐면요….”
남 부회장이 상세하게 설명을 시작했는데, 이건 뭐 들으면 들을수록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법한 일이잖아?
“아니, 전임 도지사가 아무리 개판을 쳤다고 해도 그렇지, 그걸 수습해야 할 사람이 배 째라고 해요? 민간 기업도 아니고?”
“그러니까 여의도 채권 시장이 이 난리지요.”
“우와아! 정말, 세상은 요지경이네요?”
“신신애 씨가 불렀습니다.”
“…….”
“험험, 죄송합니다.”
“하여간 그래서요? 지방정부 지급보증이면 거의 국채 취급 아닌가?”
“맞습니다, 시장에서는 거의 동급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그 신화가 무너진 거지요. 가장 안정적인 투자 상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부도가 나버렸으니까요.”
“부도가 났어요?”
“네, 그 지방정부에서 지급 보증한 자산담보 기업어음(Asset-backed Commercial Paper·ABCP)이 얼마 전에 최종 부도처리 되었습니다.”
정신들이 나갔구나.
아니 정신이 나가도 정도라는 것이 있지.
자그마치 도정을 책임지는 사람들이 이런 행위가 얼마나 큰 폭풍을 불러오는 것인지 모르는 거야?
전임 단체장이 아무리 일을 형편없이 했고, 제정신이 아니었더라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책임을 물으려면 별도로 조사해서 고소미를 먹이든 하면 되는 것이고, 수습은 수습대로 해야 한다는 것은 지나가는 고등학생을 불러도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걸 배 째라고 누워버려서 진짜로 부도를 내버려?
그것도 갚을 능력이 있으면서도?
이건 일반 기업체에서 전임 사장이 빌린 돈을 새로 온 사장이 갚지 않겠다고 누워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니, 훨씬 더 나쁜 짓이지.
지방정부라는 신뢰성을 믿고 빌려준 것에 대하여 뒤통수를 친 것이니까.
“헐, 아니 중앙 정부는 뭐하고요?”
“그게 더 웃기는 거였죠. 이런 종류의 사건은 번지기 전에 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시장이 국채와 지방채는 물론이고 한국의 단기 금융시장, 아니 금융시장 전체를 불신하게 되니까요.”
“그런데요?”
“우왕좌왕하다가 시기를 놓쳤습니다.”
“우와….”
미친 사람들 아닌가?
남들이 10대 경제 대국이니 뭐니 해서 받들어 주니까, 국뽕에 취하기라도 한 거야?
그렇게 가혹했던 IMF 시절을 벌써 잊었어?
“그래서요, 영향이 어디까지 갈 것 같습니까?”
“이미 단기자금시장은 극도로 경색하고 있습니다. 한국도로공사 회사채 발행하려던 1,000억 원이 전액 유찰되었고, 한국전력공사 역시 4,000억을 시도했다가 1,200억이 유찰되었습니다.”
“그 회사들 발행 채권은 국채나 다름이 없잖아요?”
“그럴 뿐만 아니라, 두 회사 신용도는 모두 트리플 A입니다. 이런 초우량 채권이 유찰인데, 다른 회사들이라면?”
“웬만한 금리로는 부킹도 안 되겠네요.”
“맞습니다. 트리플 B등급의 경우는 12%에 육박하는 금리로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부동산 PF 시장은 말할 것도 없고요. 덕분에 이미 중소나 중견 건설사들 여러 곳이 부도를 맞거나 맞을 위기에 빠져 있지요. 심지어는 몇몇 대형 건설사도 위험하다는 소문이 들리고 있습니다.”
“허어….”
“한마디로, 정신이 나간 지방자치 단체장이 2,000억을 배 째라고 한 덕분에, 천문학적인 피해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인간은 대체 누구예요? 이름이 뭐? 노정태?”
배 째라고 했으니, 확 배를 째 버리고 싶었다.
“국회의원이었다가 지난 지방선거에서 도지사로 당선된 인간입니다. 웬만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회장님께서 미국에 있을 때 유명해진 사람이라 잘 모르시나 봅니다.”
“어떤 사람이에요?”
“굉장히 극단적인 성향의 인물로 사실 소속 당에서도 꺼려서 다른 사람이 공천되었는데, 단식 농성까지 해서 경선 구도를 만들더니 당에서 미는 경선 후보를 물리치고 본선에서도 덜컥 당선되었습니다.”
“미치겠네…. 하여간 그 인간은 뭐라고 해요? 잘못했다고 해요?”
“초큼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에라이!”
뭐, 그딴 인간이 다 있냐?
나는 한국 정치판은 이쪽이고 저쪽이고 간에 쳐다도 안 보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그 인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눈물을 흘려야 하냐고!
그래 놓고서는 뭐?
초큼 미안하게 생각해?
진짜 옆에 있으면 패버리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하여간 그래서요? 정부는 또 왜 귀찮게 하는 거예요?”
“뭐, 뻔하지요. 지난번에 들어온 돈으로 우리가 개입하여 안정을 시켜주었으면 하는 거지요.”
“아니 우리가 정부가 똥을 싸면 똥이나 치우는 사람들이에요? 자꾸 왜 이래?”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에게는 기회가 될 수도 있어서요.”
“기회라니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량 채권의 금리가 폭등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보유 중인 100조가 넘는 돈 일부를 투자하기에는 적절하다고 보지 않으십니까?”
“…….”
그건 또 그러네.
“사실상 부도날 염려가 거의 없는 트리플 B(BBB) 등급의 금리가 거의 12%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한국전력 같은 초우량 채권도 6%에 달하고요. 2년이나 3년물짜리들이 말입니다. 하는 꼬라지들이 짜증 나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기회가 맞습니다.”
“흐음….”
“어떻게 할까요?”
“일단 두고 봅시다. 정부가 손을 내민다고 덜컥 잡아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요. 그리고 부회장님이 말씀하신 대로라면 시간이 지나면 더 금리가 오를 것 같은데요?”
“흐흐흐! 그야 그렇지요.”
“그럼 그렇게 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휘유! 한동안 또 겁나게 시달리겠군요.”
“잠시 전화기를 꺼두시지요.”
“한석규?”
“…….”
***
상황은 생각보다 더 점입가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국가 철도공단 2년 만기채권 유찰, 인천교통공사 5년물짜리 유찰, 둔촌주공 PF 7,000억 차환 발행 실패!
연이어 한국전력공사 2,000억 유찰, 한국가스공사 2년물 유찰…….
급기야는 광역 지방자치단체의 산업단지 개발의 채무 보증 금리가 5.69%에서 13%까지 치솟게 되었다.
최고 안정등급의 공사나 지방정부 지급보증 채권이 이 모양인데, 민간 시장은 오죽할까?
그냥 아수라장이다.
그야말로 노정태가 쏘아 올린 공이 한국 전체를 초토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대형 폭탄이 터지는 일이 벌어졌다.
“이야! 아주 그냥 결정타를 날리는구나!”
난데없는 남정원 부회장의 외침에 심하게 궁금증이 생겼다.
“예? 무슨 말씀이세요?”
“만국생명 말입니다.”
“만국생명이 왜요?”
“이놈들, 신종자본증권의 콜옵션 행사기한이 닥쳐 왔는데, 그냥 연장하겠답니다. 푸하하!”
“워어! 얼마짜린데요?”
“5,000억이 넘습니다.”
“미친놈들인가? 이건 아주 핵폭탄급인데요?”
“난리가 났습니다, 난리가요. 흐흐흐!”
이건 정말 치명타다.
국제 금융시장의 외화채권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신종자본증권은 만기가 사실상 없는 영구채이지만, 한국에서는 금융사에서 자기자본비율을 맞추기 위한 유상증자를 피하기 위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우회 수단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무조건 5년이 되면 상환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따라서 적어도 한국에서는 100% 5년물로 인식되는 것이 신종자본증권으로, 이걸 상환하지 않겠다는 것은 국제 금융시장에서 한국이 위험하다고 발광 신호를 보내는 것과도 같다.
“아니 대체 왜요?”
“이게 돈을 조기 상환하려면 보통은 채권을 발행해서 차환해야 합니다.”
“그런데요?”
“지금 노정태 사태로 시장이 이 모냥인데, 흥행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줄줄이 박살이 나고 있는 상황인데 말입니다.”
“아….”
“그래도 만국생명이니까, 금리를 높이면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싫다는 거지요. 한국채권 전체가 어떻게 되던 말입니다.”
“만국이면 소광그룹 계열이잖아요?”
“맞습니다. 그 황제보석의 소광그룹 계열이지요. 아니, 거의 모든 주식을 소광그룹 오너들이 보유하고 있는 개인회사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소광이 그룹 차원으로 지원하는 것은 약간 불법의 소지가 있습니다. 뭐, 결국은 그렇게 처리하겠지만요.”
“허어….”
“소광그룹의 도움이 아니더라도, 제가 보기에는 얼마든지 자체적으로 이번 옵션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지 않았지요. 푸하하! 이 사람들 정말 참….”
“이게 무슨….”
아주 나라 꼴이 그냥….
“시장에서 난리 났죠?”
“한국채권은 전부 똥값이지요. 신종자본증권 시장에서 당장 우리나라 금융사들 채권이 20~30% 이상 폭락했습니다.”
“갑자기 웬 빌런들이 이렇게 속속 등장하지? 종말이라도 온 건가요?”
“하하하! 그건 그렇고, 어떻습니까, 회장님? 이젠 슬슬 개입할 때가 온 것 같은데요?”
“흐음….”
“더 기다리면 곤란할 것 같습니다. 한국 경제 전체가 대미지가 너무 심할 것이고, 우리로서도 실기를 하면 이익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이 딱 적기입니다, 회장님.”
“알겠습니다. 본격적으로 개입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번 건은 존하고도 상의해서 처리하세요.”
“네, 회장님.”
“아! 정부에서는 뭐라고 해요?”
“기재부 부총리가 달려오겠다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이왕 개입하는 거, 눈물 쏙 빼고 개입하세요.”
“흐흐흐! 알겠습니다.”
“…….”
남정원 부회장은 이번 기회에 한몫을 볼 생각에 들떠 있었지만, 내 속은 그렇게 편하지 않았다.
아니 대체 뭐가 이렇게 약하고 허술하냐고?
정말 내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을까?
물론 내가 개입하지 않았어도 어떻게든 넘어갔을 것이다.
천문학적인 손실을 보고 넘어갈 테니 그게 문제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