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그 강철식이 이 강철식이라고요?”
“…….”
가끔 듣는 소리라 이젠 감흥도 없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세은아, 사실이야.”
“그런데 오빠는 내게 왜 그 사실을 숨긴 거야?”
“그게 말이지….”
“그건 내가 말할게요. 내가 좀 지나칠 정도로 대중에 노출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소리는 많이 들었어요. 심지어 결혼식에서도 일체의 사진 촬영을 금지했다고….”
“네, 맞아요.”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세요?”
“얼굴이 노출되는 순간에 일상적인 평온을 더는 누릴 수가 없으니까요. 친구들과 평범한 돼지갈빗집에서 소주 한잔을 먹는 자유, 그게 내게는 무척 소중했어요.”
“아….”
“그래서 내가 좀 유난합니다. 내 얼굴이나 신분이 알려지는 것에 대해서 말이죠. 정훈이는 사적으로는 제일 친한 친구지만, 우리 회사의 임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함부로 말을 못 한 거죠.”
“그랬구나…. 그럼 이젠 괜찮다는 건가요?”
“그럼요? 정훈이와 결혼할 사이라면 남이 아니잖아요?”
“호호호! 그거 괜찮은데요? 세계 최고 부자가 인정하는 가까운 사이라는 거요.”
“푸하하! 그거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좋은 겁니다.”
“에이, 그렇다고 해서 신세 질 생각은 없어요. 이래 봬도 저 의사라고요?”
“흐음, 그래요? 그럼 관둬야겠네….”
“예? 뭘요?”
“결혼 축하 선물로 신혼여행 갈 때, 전용기에 태워주고 하와이 내 별장을 빌려줄 생각이었는데?”
“아…! 그, 그건….”
“캬! 내 하와이 별장이 얼마나 좋냐면요, 별장에 딸린 개인 해변에는 푸른 산호초가 깔려서 깨끗하고 아름다운 게 아주 그냥….”
“철식 오빠!”
“푸하하!”
“하하하!”
그건 못 참을 거다.
***
“흐음, P-8 포세이돈을 추가로 구매하고 싶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2조 원이면 6대를 추가로 구매할 수 있습니다.”
며칠 후에 해군 참모총장이 찾아와서 지난번에 약속한 2조 원의 용처에 대하여 설명하는데, 호위함이나 구축함을 추가로 건조하는 것이 아니라 P-8 포세이돈 대잠초계기를 구매하겠다고 한다.
“수상 전투함도 부족한 것으로 아는데, 괜찮겠어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대잠초계기가 더 시급합니다.”
“그래요?”
“네, 현재 우리 대잠초계기는 90년대에 신조 기체로 직도입한 P-3C 오라이언 8대와 2000년대에 미 해군에서 사용하고 퇴역한 기체를 오버헐하여 도입한 P-3CK 8대, 그리고 몇 년 전에 주문하여 올해부터 순차적으로 도입되는 P-8 포세이돈 6대가 전부입니다.”
“그건 나도 아는데, 그 정도면 일단은 우선순위가 수상함에 비하여 낮지 않나요?”
“그렇지가 않은 것이, 퇴역 기체를 개수하여 추가로 도입한 P-3CK가 생각보다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사막에서 다 썩어가던 기체를 거의 어거지로 기우다시피 하여 도입했는데, 앞으로 잘해야 7년에서 8년 정도밖에 사용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좋지 않아요?”
“네, 센서류야 신형이지만 기체가 정말 엉망입니다.”
“그랬군요. 나는 잘 사용하는 줄 알았네요.”
“게다가 P-8 포세이돈은 지금 주문하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그건 왜요?”
“미 해군이 주문한 물량이 조만간 완료됩니다. 그럼 생산라인에 문제가 생길 것이고 다시 주문하려면 90년대에 생산라인 복구 비용까지 대면서 주문한 P-3C처럼 비싸게 도입해야 합니다.”
“아,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2조면 되지요?”
“네, 회장님.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진행하세요. 돈 걱정은 하지 마시고.”
“감사합니다! 회장님! 충성입니다!”
“하하하! 무슨 충성까지야….”
해군 참모총장은 내게 충성을 때릴 정도로 감격해 마지않았다.
어지간히 좋은 듯했다.
“아, 하나만 물어볼게요.”
“네, 회장님. 뭐든 편하게 물어보시지요.”
“이순신급 구축함 개량은 안 해요? 그 할 때가 한참 지난 것으로 아는데요?”
“아! 이순신급이요? 그건 여러 사정으로 밀리다가 지난달 12월 28일 열린 방사추에서 하는 것으로 의결되었습니다.”
“오! 그거 잘 되었네요! 하하하! 이제 드디어 고자 레이더를 벗어나는 겁니까?”
“에? 저기 그, 그게….”
응? 왜 말을 더듬지?
“왜요? 무슨 문제가 있어요?”
“레이더 교체는 없습니다.”
“네? 레이더 교체가 없다니요? 아니 고속정이나 초계함 정도에나 달고 다니는 MW-08 레이더를 계속 쓰겠다는 겁니까? 명색이 구축함에서요?”
“개량 시기를 놓치기도 했고, 예산도 부족하여 그렇게 되었습니다. 개량은 전투시스템 교체와 예인선배열 소나, 그리고 그간 사격 통제용으로 쓰던 STIR 240 레이더만 교체하기로 했습니다. 그밖에 소소한 개량이 있을 예정입니다.”
“에이! 그건 아니죠! 쪽팔리게!”
“죄, 죄송합니다. 아(我) 해군도 교체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굴뚝같지만? 뭐가 문제예요?”
“레이더 교체 비용도 비용이지만, 문제는 SM-2 미사일입니다. 세종대왕과 작년에 진수한 정조대왕급을 제외하면 유일한 함대 방공을 담당하는 것이 이순신급의 SM-2 미사일이거든요. 그런데, 레이더를 교체하면 우리 국산 레이더와 SM-2 미사일의 통합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니, 우리 국산 중거리 함대공 미사일이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SM-2 미사일을 꼭 써야 해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건 2029년까지 개발 완료입니다. 만약에 SM-2를 버린다면 한동안 함대 방공을 못 한다는 말이지요.”
“그럼 SM-2 미사일을 우리 국산 레이더에 통합하면 되잖아요? FFX 배치 3에 탑재되는 레이더가 상당한 고성능으로 아는데요?”
“국산 레이더와 통합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그것도 곤란합니다.”
“헐….”
결국은 돈 문제라는 말이다.
그래서 대충 전투시스템과 예인 소나만 교체하여 적당히 굴리다가 일찍 퇴역시켜 버리겠다는 말이고.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아까운 함이 이순신급이다.
이건 아니지.
“예산 더 드릴 테니까, 완전히 싹 뜯어고치세요!”
“예? 정말입니까?”
“에이, 내가 명색이 해군 예비역입니다! 내가 그런 것 하나 못 해줄까? 정부 예산이 얼마예요?”
“6,700억입니다.”
“얼마가 더 들든지 추가로 더 드릴 테니까, 레이더도 교체하세요. SM-2 미사일도 통합하시고요. 그럼 되었죠?”
“크흐흑! 회장님!”
“아, 울지 말고요!”
저렇게 좋을까?
***
“앙! 오빠!”
“아흥!”
한국에 머무는지도 벌써 열흘이 넘어갈 때쯤, 제인과 나는 엄마가 대체 언제 손주 소식을 전해 줄 거냐는 말에 좀 더 가열차게 불타올랐다.
열심히는 하는데 이상하게 애가 생기지 않아서 약간 위기감을 느꼈지만, 병원 검사 결과는 나나 제인이나 전혀 이상이 없다고 하니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하다 보면 생길 거다.
너무 집착하지는 말자.
“껑!”
가뿐하게 오늘도 제인을 떡실신을 시켜 놓고서 샤워를 한 다음에 맥주 한 캔을 땄다.
“캬!”
아, 행복하다.
역시 격렬하게 사랑한 후에 마시는 맥주 맛은 최고였다.
그렇게 자기 전에 잠시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응? 이 기분은?”
전에는 잘 몰랐는데 이제는 확실하다.
이거 예지몽을 꾸기 전의 기분이다.
“하아, 또 무슨 숙제를 주려고….”
이젠 이걸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았다.
그만큼 내가 받은 것이 많으니까 거부할 수 없는 거였다.
그리고, 내가 짊어지지 못할 일은 주어진 적이 없었으니까.
역시 포기하니까 마음이 편해져서, 나름 홀가분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예지몽을 꾸었다.
어두운 밤에 나는 어느 유럽풍의 건물들이 즐비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어디지? 여기는?
내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불이 꺼진 관광 안내소가 눈에 들어왔기에, 그곳으로 갔다.
터키? 가지안테프?
영문으로 된 소책자에는 터키의 가지안테프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전광판은 2월 6일 04시 17분으로 막 넘어갔다.
터키에서 무슨 일이지?
그때였다.
드드드드!
“뭐, 뭐야?”
지진이다.
나는 갑자기 출렁이듯이 땅이 진동하자 기겁을 하면서 옆의 가로등을 붙잡았다.
그런데, 이건 시작이었다.
드드드드! 그러러렁! 콰콰콰쾅!
천지가 경동했고, 속절없이 건물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세상에나!
무슨 건물들이 저리도 속절없이 무너지나?
도시 전체가 바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꺄아아악!”
“으아아악!”
안타깝게 건물에서 튀어나오는 사람들도 얼마 되지 않았다.
새벽 4시면 모두가 자는 시간, 이런 시간에 대지진이 덮치다니.
너무나 엄청난 규모의 대재앙에 나는 할 말을 잃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앞이 확 밝아졌다.
순식간에 대낮으로 변한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맙소사…….”
수백만은 살듯한 거대 도시에 제대로 서 있는 건물이 얼마 없었다.
대체 얼마나 희생된 것이야?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느닷없이 밝은 낮을 보여주는 이유가 다 있었다.
드드드드드! 콰콰콰콰! 콰쾅!
“빌어먹을! 또?”
새벽에 겪었던 지진과 맞먹을 정도의 강진이 다시 도시를 덮치면서 마지막 숨통을 끊어 놓았다.
그나마 위태롭게 서 있던 건물들마저 모조리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끄아아악!”
“꺄아아아!”
인세에 지옥이 펼쳐지고 있었다.
“헉!”
잠에서 깨어났다.
이번에는 다행히 소리를 안 질러서인지 제인은 옆에서 계속 자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침대 밖으로 나와서 가운을 걸치고 거실로 나가 위스키를 따랐다.
“크!”
단숨에 스트레이트로 한 잔을 마시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대체 이걸 나보고 어쩌라고?”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충 봐도 수백만이 사는 도시가 결딴이 났다.
아마도 만 단위, 아니 십만 명 이상은 희생이 났을 것 같은 엄청난 대재앙이다.
문제는 아무리 나라도 이걸 막을 방법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지.
대체 뭐라고 하냐고?
내가 예지몽을 꿨는데, 2월 6일 새벽에 도시가 대지진으로 작살이 난다고 해?
말해 봤자 나만 미친놈이 될 것이고, 듣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또, 지진이 난 후에 어떻게 알았냐고 하면 뭐라고 변명할 것이고.
그렇다고 바라만 볼 수도 없었다.
워낙 많은 사람이 죽는 대재앙인데, 그것도 터키다.
형제의 나라 터키.
물론 터키 사람들이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 나라를 다 따져 보면 한 50개국은 넘을 거였다.
이 사람들은 그냥 좀 우호적이거나 친하게 지내고 싶은 나라는 전부 형제의 나라라고 하더라고.
하여간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터키는 한국전쟁 당시에 미국, 영국, 캐나다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해준 나라라는 거지.
내 기억으로는 2만 명이 넘는 병력을 파병하여 그중 1,0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었다.
형제의 나라고 자매의 나라고 간에 진짜로 신세를 진 나라라는 말이다.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위스키 몇 잔을 더 따라 마시면서 온갖 궁리를 다 했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그나마 궁리 끝에 방향이나마 잡은 것이 전부다.
“젠장!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결론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