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아니기는 뭐가 아니야?
에르도안에게는 그밖에 조건을 하나 더 걸었다.
스웨덴의 나토 가입을 방해하지 말 것.
이건 좀 뜻밖이었는지 정치적인 일에 내가 왜 개입하냐고 한참을 항의하다가 결국은 받아들였다.
500억 달러는 그만큼 그에게 생명수 역할을 할 테니까.
특히 대선을 앞두고서 지지율이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조지, 고생이 많다.”
터키에 온 김에 폴란드를 방문하여 조지를 위문(?)하였다.
“뭐, 이젠 익숙해서 괜찮아. 폴란드 생활도 나쁘지는 않고.”
“돌아오고 싶으면 말해. 다른 사람을 파견할 테니까.”
“됐어. 전쟁이 끝나기 전에 가지 않을 생각이야. 여기서 나만 바라보고 있는 난민들도 많아.”
“호오? 너, 철들었다?”
“미친놈!”
“하하하!”
“그건 그렇고 배 두 척이 오고 있다던데 그건 무슨 소리야?”
“아, 그거. 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무슨 소리야? 재건 중장비와 구호 물품이 산더미처럼 그단스크로 오고 있다던데?”
“그거 누구에게 말했냐?”
“아니, 장 비서가 회장님 지시라면서 이쪽에는 말하지 말라고 하더라.”
“잘했다. 하여간 그거는 넌 모른 척하고 있어. 최종 목적지가 다른 쪽으로 바뀔 수도 있어서 그래.”
“정말 넌 알다가도 모르겠다. 알았다. 네가 하는 일이니 다 이유가 있겠지.”
“흐흐흐!”
오래된 친구가 이래서 좋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아도 자주 그런 모습을 옆에서 보다 보니까 이젠 번거롭게 따지지 않고 그러려니 한다.
그렇게 하룻밤은 조지 녀석과 진탕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오전에 숙취에 시달리다가 폴란드 안제이 두다 대통령을 만났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버린다는 것은 그를 무시하는 행동이니까.
“하하하! 어서 오세요.”
“오랜만입니다, 대통령.”
자리에 앉아서 환담을 나누다가 최근 우크라이나 정세를 물어봤다.
“요즘 우크라이나 전황이 어떻습니까?”
“지금은 겨울이라 소강상태입니다만, 다음 달에 침공 1년이 되면 러시아 놈들이 대대적인 공세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참, 걱정이네요. 우크라이나는 잘 대비하고 있나요?”
“지금 우크라이나 기갑병들이 우리 폴란드에서 열심히 훈련하고 있습니다. 대대적으로 전차를 지원하였으니, 절대로 물러서는 일은 없을 겁니다.”
“봄이 되면 라스푸티차로 지형이 엉망진창이 될 텐데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전차가 기동하기에는 차라리 땅이 얼어붙은 지금이 훨씬 낫다.
봄이 되면 모든 땅이 늪과도 같은 진흙뻘이 되는 라스푸티차가 시작되니까.
괜히 러시아 전차들이 통나무를 두르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궤도로 달리는 전차조차도 빠지면 탈출이 불가능하기에 탈출 지지대로 사용하기 위하여 통나무를 달고 다니는 진풍경을 연출하는 것이었다.
“하하하! 그건 러시아 놈들도 마찬가지지요. 아니, 공격하는 놈들이 훨씬 불리한 것이 라스푸티차입니다.”
“그렇군요.”
“그건 그렇고 에르도안을 만나고 오셨다고요?”
“네, 투자 관련해서 잠시 만났습니다.”
“끄응! 그 노인네 신났겠네요. 가뜩이나 대선을 앞두고서 지지율 하락으로 속이 말이 아닐 텐데요.”
“하하!”
“회장님, 우리 폴란드도 있습니다. 요즘 한국과 폴란드 관계가 유례없을 정도로 좋은데, 우리도 신경 좀 써주세요.”
“네, 잘하면 새로운 형제의 나라가 될지도 모르는데, 신경을 쓰겠습니다.”
“형제의 나라요?”
“그게 뭐냐면요….”
나는 왜 내가 터키에 우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한국전쟁에 4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병하여 같이 피를 흘린 전우였고, 2002년에 우리 붉은 악마들이 터키의 국기인 대형 월성기를 흔들어 주어 감동을 주었다는 것 등등.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전 몰랐습니다. 젠장! 그때 우리는 따지고 보면 소련 놈들의 위성국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입니다. 이거 혈맹에는 못 당하겠네요.”
“하하! 한국인들은 폴란드의 사정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같은 전차와 같은 자주포, 같은 전투기를 사용합니다. 미래의 한국과 폴란드 관계는 터키에 못지않을 겁니다.”
“하하! 저도 그러기를 희망합니다. 형제의 나라? 우리도 한국과 형제입니다.”
“하하하! 아, 이건 알고만 계세요. 에르도안이 더는 스웨덴의 나토 가입을 방해하지 않을 겁니다.”
“오! 그건 어떻게 하신 겁니까?”
“투자에 대하여 조건을 걸었는데, 당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오오! 정말 대단하십니다! 미국조차도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었는데요.”
미국은 못 해도 나는 할 수 있다.
아무리 미국이라도 돈을 조건으로 그런 종류의 일을 해결할 수는 없다.
명분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는 것이 국가라는 존재니까.
하지만 나는 다르지.
내 맘대로 손을 돈을 들고 흔들면 그만이다.
“그냥 소소한 투자일 뿐입니다. 터키 리라화가 워낙 저평가되어 있기도 하고요.”
“흐음, 그럼 이제는 헝가리의 그 미친 오르반만 해결하면 되겠습니다.”
“헝가리요? 아! 오르반 총리!”
“휴우! 그 양반이 왜 그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 대체 인구 1,000만도 되지 않는 나라에서 왜 그렇게 딴지를 걸어대는지 말입니다. 아주 EU나 나토에서 헝가리 말만 나오면 다들 고개를 흔들어요. 아주 그냥 내부의 적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나 심해요?”
“어유! 말도 마세요. 솔직히 말해서 전쟁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와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전통적인 비셰그라드 그룹으로서 서부 유럽의 잘사는 나라들에 같이 대항하는 것도 있었고, 우리와는 종교적 보수주의에 기반한 민족주의 성향인 것도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정도껏 해야지요? 아니 이 마당에 아직도 친러고 친중이에요? 미친 것 아닙니까?”
“그렇군요.”
“우리 법과 정의당이 꼴통이라고 하면서 해외에서 이미지가 그리 좋지 않은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린 그래도 선은 넘지 않아요. 그런데 정말 오르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흐음….”
“아, 이거 제가 실례하였습니다. 회장님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문제인데요.”
“아닙니다. 저도 헝가리가 삐딱선을 타고 있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좀 심하긴 심하네요.”
“저러다가 진짜 EU와 나토에서 축출될지도 모릅니다. 이미 전체적으로 감정들이 격앙되었어요.”
“헝가리가 유로화를 사용합니까?”
“네? 헝가리요? 아닙니다. 동유럽에서 유로화를 사용하는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헝가리는 포린트라는 독자 통화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건 왜?”
“흐흐흐! 자꾸 내 신경을 거스르면 손 좀 봐주려고요.”
“네? 아….”
이제야 내 말의 뜻을 알고서 입을 벌리는 두다 대통령이다.
두다 대통령은 모르겠지만, 헝가리는 내 블랙리스트에 오른 지 좀 되었는데,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친중 질을 하고 있다는 거지.
내 기준에 친중은 죄악이다.
그런데 인구 1,000만도 안 되는 데다가 총 GDP 2,000억 달러짜리가 자꾸 까불어?
거기다가 유로화도 안 쓰니 보호막도 없다.
막말로 내가 존에게 전화 한 통만 하면 언제든지 날려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자꾸 까불면 말이다.
***
내가 에르도안을 좀 우습게 본 모양이다.
이 인간, 장난이 아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서, 독재자가 달러에 미치면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를 에르도안이 보여주었다.
2월 1일 자로 가지안테프를 비롯한 터키 동남부에 지진 경보를 내리고 심지어는 군인까지 동원하여 시민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이 엄동설한에 말이다.
“저, 저! 저 미친 영감탱이가!”
나는 집무실에서 CNN 뉴스를 보면서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좀 대책이라도 세우고 시민들을 내몰든가!
이 추위에 저렇게 막무가내로 사람들을 내쫓아내면 어쩌란 말이냐고!
저러다가 지진에 죽기 전에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저 인간 대체 왜 저러냐? 너 혹시….”
내가 터키로 가서 에르도안을 만났던 것을 아는 제프리 형이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흠….”
“너지?”
“뭐, 뭘?”
“호오? 이놈 봐라? 말까지 더듬어?”
“…….”
젠장, 누가 저렇게까지 미친 인간일 줄 알았나?
어쨌든 지진으로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가슴이 쓰렸다.
장 비서에게 급히 연락하여 구호물자를 실은 배를 최대한 전속력으로 달리게 하라고 닦달하였다.
망할 인간, 내가 재선되는 꼴을 보나 봐라.
무슨 수를 쓰든지 낙선하게 만들 생각이다.
형제의 나라, 터키를 위해서.
***
2023년 터키 시각 2월 6일 오전 4시 17분 36초.
LA 시각 2월 5일 오후 5시 17분 36초.
드드드드드! 콰콰콰콰쾅! 콰앙!
가지안테프를 중심으로 한 터키 동남부, 그리고 국경 넘어 알레포를 중심으로 시리아 북부에 대지진이 덮쳤다.
“아이고! 저거 다 무너졌네? 저거 어쩌냐?”
“빌어먹을!”
그렇게 노력했는데 꿈과 다르지 않은 현장 영상이 속속 뉴스를 타고 전해졌다.
에르도안이 미친 짓이지만 주민들을 내쫓았으니 괜찮지 않냐고?
그랬으면 내가 이렇게 열 받지 않지.
에르도안은 이틀 정도 주민을 잡다가, 워낙 격렬하게 저항하니 표가 떨어질 것을 우려하여 다시 그냥 내버려 두었다.
결국은 거의 모든 시민이 원상으로 복귀하였다.
도루묵이 된 것이다.
심한 자괴감이 몰려왔다.
알고도 막지 못하다니.
염주로 인하여 예지몽을 꾸기 시작한 이래로 처음이다.
재난을 막지 못한 것이.
내가 너무 안일하였다.
에르도안 같은 독재자 따위는 믿는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 인간은 처음에는 혹시나 하여 달려들었다가 표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니 곧장 설마 지진이 나리가 없다고 생각하였을 거다
망할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즉시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 네, 회장님! 장 비서입니다.
“장 비서, 우리 배들의 위치는 어디쯤입니까?”
- 세 시간 전에 수에즈를 통과하였습니다. 하하! 회장님, 제가 기한 내로 해냈….
“장 비서!”
- 예, 예?
“나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닙니다.”
- 죄송합니다.
수에즈를 통과하였으면 바로 지척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장 비서, 터키에 대지진이 발생하였습니다.”
- 네? 대지진이요?
“네, 그래요.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요. 폴란드 그단스크로 향하던 우리 배들을 터키 메르신으로 돌립니다. 그쪽이 더 급해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즉시 지시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시안 항공에 지시하여 긴급으로 화물기 몇 대를 빼놓으라고 하세요. 구호물자를 추가로 실어 보내세요. 우리 아버지와 상의하면 알아서 처리해 줄 겁니다.”
- 알겠습니다.
“그리고 남정원 부회장에게도 전달하세요. 정부에 말해서 신속하게 구조대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라고 하세요. 비용이 문제가 된다면 우리가 내는 것으로 하라고 하고요.”
- 알겠습니다, 회장님.
전화를 끊고 짜증스럽게 급보로 나오는 지진 현장을 보고 있는데, 제프리 형이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왜요?”
“아니다. 그냥 좀 그래서….”
“뭐가요?”
“아니라니까?”
아니기는 뭐가 아니야?
속으로 저 자식은 신기가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