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뜻밖에 동지를 만들었다.
뜬금없는 친근함에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뭐야? 이 아줌마?
나름 패셔니스타라고 하더니만, 환갑에 이르는 나이답지 않게 옷도 상당히 감각 있게 입고서….
아, 지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아, 네네. 나비올리나 총리님.”
“아이, 엘비라라고 하라니까 그러시네?”
“네네, 엘비라. 그래요, 전 무슨 일로 보자고 하신 겁니까?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제가 그리 곱게 보일 리가 없을 텐데요?”
“글쎄요? 그건 러시아 입장이고, 난 달라요. 혹시 알아요?”
“뭘 말입니까?”
“내가 알렉스의 팬이라는 거?”
“쿨럭!”
이 아줌마 정말 깜빡이 안 켜고 들어오는 선수네, 선수.
“어머! 진짜인데? 경제학자로서 알렉스는 정말 연구 대상이라니까요?”
“그건 왜 그렇습니까? 나비…. 엘비라.”
“믿어지지 않는 기적의 수익률!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무패의 투자자!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부를 쌓은 개인! 더 말해야 할까요? 잘 모르시나 본데, 알렉스는 나뿐만 아니라 세계의 거의 모든 경제학자의 머리를 아프게 한 사람이자 동경의 대상이에요. 정말 몰랐어요?”
“경제학 쪽 하고는 그다지 친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어머! 섭섭해라!”
“…….”
자꾸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어머!’ 소리가 귓속을 후벼 파는 것 같았고.
더 말리기 전에 빨리 이야기 끝내고 가자.
“아니, 엘비라. 그래서 부르신 이유가 대체….”
“성격도 급하기는? 알았어요. 그런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네, 그러시지요.”
“발로쟈가 그렇게 죽고….”
“발로쟈가 누구신지?”
“아! 발로쟈는 푸틴 대통령의 애칭이에요. 잘 모르시겠구나.”
“…….”
내가 알 리가 없지.
그런데 왜 이렇게 ‘발로쟈’가 입에 쩍쩍 붙지?
굉장히 친근하게 들리는 이유는 또 뭐고?
전생에 무슨 인연이라도 있었나 보다.
“하여간 푸틴 대통령이 그렇게 죽고 난 후, 러시아는 정말 많은 곤경에 처했어요. 전황이야 원래도 좋지 않았지만, 이젠 더는 전쟁할 여력도 없어졌고요.”
“그렇게 솔직히 말씀하셔도 됩니까?”
“뭐, 사실이니까요. 다들 알고 있을 것이고.”
“그래서요?”
“하여간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하는 것에는 동의하지요?”
“내가 동의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종전을 하려니 문제가 있어요.”
“크림반도 말입니까?”
“맞아요. 아무리 죽은 사람인 푸틴 대통령에게 뒤집어씌운다고 하더라도, 현 대통령인 드미트리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가뜩이나 푸틴의 애완견이니 뭐니 해서 인기도 없는 판국에….”
“…….”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푸틴이 죽고 난 다음에도 무시당하는 느낌이었다.
원래 캐릭터가 그런 캐릭터인가?
“푸틴 대통령이 2014년 이후로 어찌나 그리도 크림에 관심을 쏟고 했는지, 인구 구성부터 시작해서 완전히 러시아가 되어버렸으니까요. 가뜩이나 친 러시아 지역이었는데 말이죠. 그런데 종전 조건으로 이걸 내준다? 드미트리는 아마 폭도들에게 맞아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거예요.”
“뭐,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죠. 아무리 구국의 영웅으로 떠오른 젤롄스키 대통령이라고 해도 전황이 유리한 상황에서 실지인 크림반도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반대로 젤롄스키 대통령이 나락으로 떨어질 테니까요.”
“그러니까 문제라는 거예요. 그렇다고 우리 계속 전쟁할까요? 대조국 전쟁 때처럼 총동원령이라도 내려서? 우리 한번 해볼래요?”
“저기, 자꾸 좀 혼동하시는 것 같은데요. 전 한국 사람입니다. 왜 자꾸 저보고 한판 붙자는 식으로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전쟁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하는 중입니다만….”
“어머! 미안해라!”
“…….”
제발 ‘어머!’ 좀 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이러다가 ‘어머!’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았다.
“후우! 계속 말씀하시지요.”
“결론은 이거예요. 우크라이나나 우리 러시아나 계속 전쟁을 했다가는 양쪽 전부 파멸이에요.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서방 세계도 이제는 지칠 만큼 지쳤고요.”
“맞습니다, 엘비라. 그래서요?”
“전쟁은 끝내야 하는데, 크림반도 때문에 끝은 못 내고.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계속 전쟁을 하다가는 정말 양쪽 다 죽고…. 참, 어려운 문제네요.”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 좀…. 저는 또 왜 부르셨는지도 말씀해 주시고요.”
“크림반도를 우리 러시아가 포기하겠어요.”
“예? 정말입니까?”
“진심입니다.”
“허어….”
나비올리나가 지금까지 변죽을 올리는 태도를 버리고 갑자기 분위기를 확 바꾸니, 이제는 다시 러시아를 지키는 잔 다르크 같은 여전사로 변신이라도 한 것 같았다.
대체 같은 사람이 이렇게도 달라 보일 수 있는지.
“알렉스에게는 솔직하게 모든 것을 말하겠어요. 그래도 되겠어요?”
“적어도 뒤통수를 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자꾸 현실을 외면하는데, 지금 우리 러시아의 현실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답니다.”
“어째서입니까?”
“첫 번째, 러시아의 미래가 될 젊은이들을 전부 전쟁에 갈아 넣어 버렸어요. 가뜩이나 출산율 저하로 미래가 불투명하던 상황에 말이지요. 거기다가 쓸 만한 애들은 전부 해외로 튀어버렸으니…. 하아, 정말 내가 못 살아.”
“충분히 이해합니다. 두 번째는요?”
“이 상태로 가다가는 우리 러시아는 중국의 식민지가 될 거예요. 아니 이미 반쯤은 되었다고 봐도 될 것 같은데요? 2022년 중국 의존도가 러시아 수입의 30%에 수출은 40%였어요. 작년인 2023년에는 그게 더 심화하여서 수입의 42%를 차지했고 수출은 50%였어요. 거기다가 위안화 결제가 아주 뿌리를 박았고 말이지요.”
“그냥 지금도 중국의 식민지 같습니다만?”
“아우! 이 미친 발로쟈! 내가 그렇게나 경고했는데, 이게 뭐냐고!”
“저기 진정하시고….”
내가 지금 뭐를 하는지 모르겠다.
“아, 미안합니다.”
“네, 괜찮으니까 그래서요?”
“한마디로! 2014년 이전에는 있지도 않았던 크림반도 따위 가지고 이러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거예요. 나라 전체가 중국에 먹히게 생겼는데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래서요?”
“지금 대통령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지만, 그는 실권이 거의 없어요.”
“그래요?”
“네, 군부도 그렇고 두마의 상당수 의원도 그렇고, 러시아 국민들 지지도도 그래요. 모든 것이 나를 가리키고 있어요.”
“아….”
“그래서 결심했어요.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오명을 뒤집어쓰겠지만,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넘기는 것으로 말입니다.”
“오오! 잘 생각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사실상 현재 실권자인 나비올리나 총리가 메드베데프에게 총대를 메게 하여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넘기고 전쟁을 끝낸다는 말이다.
역시 메드베데프는 영원히 바지 신세를 못 면하는구나.
“하지만 그냥은 안 됩니다. 조건이 있어요.”
“말씀하시지요. 제가 무엇이든…. 아니 이게 아니잖습니까! 그런 조건을 왜 제게 말하는 겁니까?”
“호호호! 이거 왜 이러실까? 우리 러시아가 망했다고 너무 우습게 보시는데요? 정말 우리가 계속 중국 식민지로 떨어지는 꼴을 보고 싶으신 거예요? 혹시 북쪽에 반중 하는 친구가 필요하지 않으세요? 내가 알기로는 그게 아니던데요? 우리 정보부가 파악한 바로는 중국과의 전쟁에 엄청난 자금을….”
“…….”
이 아줌마 좀 무섭다.
사람을 아주 가지고 노는구나.
내가 필요한 부분, 내가 가장 취약한 부분을 바로 치고 들어오네.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아, 항복입니다, 항복!”
“호호호! 그냥 친하게 지내자는데 무슨 항복까지….”
“조건을 말씀하세요.”
“크림반도를 넘겨주되, 20년 후에는 중립국의 감시하에 주민 투표로 크림 주민 스스로 어느 국가로 갈 것인지 결정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 크림반도 주민 인구 구성이 러시아로 죄다 바뀌었는데요?”
“그것도 2014년 이전으로 공정하게 환원하는 것으로 하지요. 그럼 되었나요?”
“그게 인위적으로 됩니까?”
“여긴 러시아랍니다, 알렉스.”
“할 말이 없네요. 하여간 20년 후에는 자신이 있다는 겁니까? 주민들이 러시아를 선택하게 할?”
“물론이지요. 1년 후 대선에는 내가 나갈 것이니까. 아니, 지금도 사실상 내가 러시아를 움직이고 있으니 지금부터라고 하지요.”
“호오!”
이 아줌마 진짜 작심했네?
그러니까 심하게 말하면 20년 후에 우크라이나계 주민들까지 러시아를 선택하게 할 정도로 러시아를 발전시키겠다는 말이잖아?
“좋습니다. 젤롄스키 대통령에게 전달하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경제 제재의 즉각적인 해제를 요구합니다.”
“그거야 뭐…. 알겠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에게 말씀드려서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러시아가 반중 국가로 돌아선다는데 안 될 리가 없다.
“마지막이 가장 중요해요. 알렉스를 협상 대상자로 선택한 이유기도 하고요.”
“말씀하세요.”
“카르마 인베스트먼트의 전폭적인 투자가 필요합니다. 모든 종전 조건에 대한 알렉스의 보증도 역시 필요하고요.”
“얼마나 해야 합니까?”
“5,000억 달러면 될 것 같은데요?”
“후우! 좀 쎈데요?”
“엄살은?”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자! 이제는 내가 가져갈 것을 내놓으셔야겠는데요. 뭘 주시겠습니까?”
“북한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겠어요.”
“에이, 그거야 지금도 거의 그렇지 않나요? 탄약을 공급받으면서 좀 가까워졌지만, 전쟁이 끝나면 그런 거지 국가와는 어차피 관계를 계속하고 자시고도 없을 텐데요?”
“그럼 이건 어때요? 중국이 한국을 침공할 시에 무조건적인 한국 지지는?”
“말로만입니까?”
“문서로 공식화하고 실제 위기 시에는 참전까지는 아니더라도 병력을 분산시켜주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흐음….”
이건 정말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유사시에 중국과 러시아 국경에 긴장만 조성하더라도 중국의 상당한 병력이 묶일 테니까.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호호호! 좋아요.”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이제 친구인데 편하게 물어봐요.”
“엘비라는 대체 왜 그렇게 중국을 싫어하는 겁니까?”
“중국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놈들이 하는 짓이 싫은 거예요. 알렉스도 알다시피 중국과 엮여서 잘된 나라 봤어요? 그놈들은 우리가 전쟁을 벌이는 것을 틈타서 우리 러시아를 식민지로 만들 생각이었어요. 진정한 친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럼 내 돈이 들어가는 것은 괜찮고요?”
“그럼요? 알렉스 돈은 어디까지나 개인 투자금인데?”
“헐….”
“그리고, 국경을 마주하는 국가가 강성해져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답니다. 중국은 너무 컸어요. 전쟁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우리 러시아를 야금야금 파먹었을 거예요. 난 그게 참을 수 없어요.”
“하하하! 알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친구인 겁니까?”
“호호호! 네!”
뜻밖에 동지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