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 바로 그 술집에서.
2032년 5월 10일.
드디어 내가 자유의 몸이 되는 날이다.
대통령 자리에서 풀려나는 날이란 말이다.
원래 선거법상으로는 5월 10일 0시부터 신임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되었는데, 이게 좀 문제가 있었다.
실질적으로 권력이 신임 대통령에게 이양되는 시점은 취임식이 열리는 오전 11시 정도다.
그런데 전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자고 아침에 취임식장에 와서야 사실상 권력을 손에서 내려놓는다.
이러다 보니, 취임식 날 0시부터 오전 11시 정도까지 권력의 공백이 생긴다는 말이 있었다.
지금이야 북한도 없어져 통일이 되었고, 중국마저도 격파하여 당장 급변사태에 대응할 만한 대적은 없지만, 세상의 일이라는 것이 또 모르는 거다.
그래서 선거법을 개정하도록 하여서, 아예 미국처럼 취임식 날 대통령이 취임 선서를 한 순간부터 권력이 이양되는 것으로 바꾸었다.
말이 길었는데, 아직은 내가 대통령이라는 말이다.
“제인, 뭐 해? 빨리 가자!”
“아이, 오빠! 왜 이렇게 서둘러? 아직 시간 한참 남았단 말이야!”
“흐흐흐! 빨리 때려치우고 싶어서 그렇지 뭐.”
“진짜, 오빠도 참. 이렇게 대통령 자리를 빨리 그만두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그래서? 제인은 싫어?”
“아니, 나도 좋아! 호호호!”
“하하하!”
우리 부부는 완전히 신났다.
결국 하도 성화를 부려서 예정보다 15분이나 일찍 취임식장에 도착하는 사고를 쳤고, 약간 기다린 다음에 신임 대통령을 만나서 악수를 했다.
“잘 해봐라! 나는 간다.”
“야! 취임식 끝나면 바로 떠나려고?”
신임 대통령은 내 친구 정훈이다.
임기 시작부터 내 후임으로 점을 찍고서 행정부 요직에 두루두루 돌렸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사실상 내가 만든 나라나 다름이 없었는데, 어디 이상한 놈이 물려받아서 개판 치는 꼴을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지율 95%를 넘는 내가 민다는데, 감히 누가 거역할까?
정훈이는 손쉽게 대선을 통과했다.
득표율 80%를 넘는 압도적인 승리였다.
사실상 정훈이가 내 대리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당연하지. 끝나는 대로 바로 튈 거니까, 알아서 잘해라.”
“야, 그래도 좀 뒤에서 도와주다가….”
“닥쳐라! 대통령은 너다. 그건 국기 문란이야.”
“국기 문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귀찮으니까 도망가는 거면서….”
“…….”
정훈이의 말이 진실이었지만, 어쩌라고?
이윽고, 취임식이 끝났다.
그런데 취임식에 참석한 카멀라 해리스 미국 대통령을 포함한 각국 정상들이 내게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니, 이 사람들이?
나는 이제 대통령이 아닌데, 왜 내게 몰려오는 거야?
“제인! 가자!”
“웅! 오빠!”
“알렉스!”
“강 대통령님!”
“프레지던트!”
애타게 나를 부른 소리 들을 외면하고 얼른 차에 올라탔다.
“정 비서! 얼른 공항으로!”
“네, 회장님!”
잽싸게 튀려는 내 계획은….
깔끔하게 실패했다.
국민들이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대통령님! 고생하셨습니다!”
“어딜 도망가요! 5년만 더 하고 가라고!”
“우와아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영원한 대통령이십니다!”
짝짝짝짝!
도망가려는 내 차는 수만의 인파에 둘러싸여서 도무지 지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나를 아쉬워하면서 환송하는 시민들을 무작정 밀면서 지나갈 수도 없었고.
결국은 차 지붕을 통하여 상반신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우와와와와!”
그렇게 30분을 붙잡혀서 인사를 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공항이다.
“후우! 진짜 끝이다! 만세!”
“호호호! 만세!”
전용기 안에서 나는 제인을 끌어안고 만세를 외쳤고, 제인도 따라 했다.
자! 이제 출발이다!
***
LA에 도착한 뒤에는 한동안 집에서만 머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모든 연락을 끊어버리고 그저 낮에는 유진이와 놀고, 밤에는 제인과 사랑했다.
제인은 이제 30대 중반인데, 여전히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원래도 서양인치고는 어리게 보이는 스타일인데, 자그마치 세계 최고 부자인 내 마누라다.
그러니 관리가 오죽 잘 되어 있겠냐고..
아직도 남들이 보면 20대 중반으로 오해할 정도였다.
“제인, 사랑해.”
“오빠, 나도….”
“어흥!”
5년간 쌓인 피곤을 풀어내고자 존이나 제프리 형과 만나서 소주도 마시면서 유유자적하게 지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있다가 전용기를 타고서 세계 여행을 떠났다.
“어디로 모실까요? 회장님?”
“제인, 우리 기름 떨어질 때까지 가볼까?”
“웅!”
그냥 무작정 날아올라서 대충 괜찮은 곳이 있다 싶으면 내렸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심지어 남극도 가보고 그린란드도 가보았다.
다만 귀찮은 것이 내가 방문하면 어느 나라든 그 나라 정상들이 나를 보려고 난리를 쳤는데, 지극히 개인 여행이라고 선을 그었더니 더는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을 돌아다니니 이것도 지겨워졌다.
5년간 쌓인 피로도 다 날아간 것 같았고.
그리고, 마침 그때 제인이 좋은 소식을 알려주었다.
“오빠, 나 아기….”
“엉? 우리 둘째?”
“웅!”
“으하하하!”
유진이를 낳고서 일부러 피하지도 않았는데 둘째가 잘 들어서지 않아서, 이제는 그런가 보다 하는 참이었다.
그런데 둘째라니?
곧장 LA 집으로 날아갔고, 가족들에게 알렸다.
이제는 공직을 내려놓고 정화 재단 이사장으로 있는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잠시 여행을 다니며 놀다가 역시 정화 재단에서 나중에 아버지 뒤를 이을 준비 중인 소미까지 모두 LA 우리 집으로 모였다.
“으하하하! 사돈! 축하해요!”
“으하하하! 사돈 어르신! 축하드립니다!”
아니 이 양반들이?
아버지와 존은 축하하러 와서는 주야장천 축하주를 마셨다.
뭐, 편하게 쉬실 때도 되기는 했지.
“응애! 응애! 응애!”
둘째가 태어났다.
이번에는 공주였다.
그것도 제인을 꼭 닮은 공주.
지금 막 태어났는데 어떻게 아느냐고?
내가 그러면 그런 거다.
둘째 이름은 역시 우리 집안의 전통에 따라서….
“아버지, 이번에는 그냥 우리가….”
“어? 내가 벌써 지어 놨는데, 너희들이 직접 짓게?”
“…….”
벌써 아버지 얼굴에 섭섭한 기색이 가득한데, 대체 어떻게 우리가 짓겠냐고 하냐고?
결국, 둘째 이름도 아버지가 지었다.
“우리 손녀 이름은 수지다, 강수지!”
“오오! 수지!”
아버지가 신경을 쓰신 모양이다.
유진이처럼 역시 영어 이름도 되고 한국 이름도 되는 이름이다.
영어로는 Susie로 수재너(Susanna)의 애칭이니까.
제니도 마음에 들어 했고.
“아버지, 부업으로 작명소도 하시지?”
“뭐 인마?”
“흐흐흐!”
아기는 정말 축복이다.
그것도 우리 집 강씨 집안과 제인과 존의 스미스 집안 전체의 축복이었다.
어른들의 입에는 웃음이 그치지 않았고, 나 역시 틈만 나면 물고 빨았는데 나중에는 제인이 제발 그만 좀 하라고 잔소리를 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새로 태어난 둘째와 함께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2034년도 지나가고 있었다.
2035년 1월 초에는 오랜만에 한국에 입국했다.
대통령 생활에 지치기도 했고, 쓸데없이 내게 관심이 쏠려서 정훈이가 바지사장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일부러 한국을 떠났었다.
수지가 없었다면 중간에 부모님을 뵙기 위해서라도 두어 번은 들어갔다가 왔겠지만, 제인이 수지를 임신하고 나서는 부모님도 거의 미국의 우리 집에 계셨기 때문에 그럴 일도 없었다.
“야! 인간아!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냐? 취임식 날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고 나서 2년 반 만에 나타나?”
“흐흐흐! 벌써 그렇게 되었냐?”
“이 나쁜 놈아!”
정훈이는 일에 찌들어 반쪽이 된 얼굴로 나를 보자마자 부들부들 떨어댔다.
뭐,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
나야 정말 초인적인 체력으로 버틴 것이고, 지금도 업무량이 장난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 대통령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전쟁으로 새로 획득한 북방 영토로 인하여 생긴 과부하니까.
그것도 통일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발생한 일이라 더했다.
“이젠 알겠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하아, 진짜 내가 해보니까, 네놈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더라고. 이건 뭐, 쉴 틈이라고는 없으니….”
“흐흐흐! 그래도 넌 나은 편이야. 난 정말 밥 먹고 자는 시간 빼놓고는 일만 했다고.”
“그런 줄 알면서 나에게 떠넘겨?”
“이놈 봐라? 대통령을 시켜 줬는데도 불평이냐?”
“시끄럽다! 오랜만에 소주나 하자.”
“그러지 뭐….”
어디 밖에 나가서 본격적으로 마실 수 있는 처지도 못 되어서, 청와대 주방 한쪽에 있는 테이블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소주를 들이켰다.
“내가 인마! 밖에 있었지만 다 네가 하는 거 지켜 보고 있었다. 잘하던데 웬 엄살이야? 게다가 다른 사람 전화는 몰라도 네 전화는 받아 주었잖아?”
“크! 나쁘지 않게 하는 것 같냐?”
“응, 잘하고 있으니까, 계속 지금대로 하면 될 거야.”
“그나마 다행이네.”
“어려운 것은 없고?”
“힘들어서 그렇지, 특별히 어려운 것은 없었어. 돈이 없었으면 몰라도 네 덕에 돈은 넘쳐나니까.”
“계속 내가 돈을 들이부을 수는 없는 거 알지?”
“당연하지? 네 돈은 이미 가져다가 쓴 지 좀 됐다. 그리고 어차피 투자 형태로 들어왔기에, 너는 또 돈을 번 셈이 되었잖아?”
“그게 그렇게 되더라고. 일부러 돈을 벌려고 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욕먹을 것 같아서 존에게 수익의 절반은 공익사업에 다시 기부하는 것으로 했다.”
“잘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런 말이 나오려다가, 카르마에서 기부한다고 하니까 바로 쏙 들어가더라.”
“중국 놈들은 좀 어때?”
“전쟁 피해는 많이 복구했는데, 아직은 여전히 힘들지. 특히 네가 첨단 산업과 그 기술 기반이 되는 것은 철저하게 부수었잖아? 그거 때문에 미치려고 하는 모양이더라고.”
“내가 예술적으로 목표를 선정했지, 흐흐흐!”
“미친놈….”
“왜? 내 말이 틀려?”
“맞다, 맞아! 덕분에 반도체 등의 첨단 산업은 손도 못 대고 있어. 아예 생태계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어도 그럴 상황도 안 되고 말이야. 그래서 계속 풀어달라고 애걸하는데, 쳐다도 보지 않고 있지. 미국의 의견도 그렇고….”
“계속 조져야 해. 그놈들은 틈만 나면 또 고개를 쳐들 거다.”
“당연하지. 우리 북방 영토가 완전히 안정되기 전까지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
“그래, 계속 고생해라.”
“…….”
한동안은 여기저기 인사를 다녔다.
이제는 건강이 많이 안 좋은 장영동 이사장께도 인사를 하러 갔는데, 너무나 수척해진 모습으로 날 반가워 해주셔서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좀 더 오래오래 사셔야 하는데….
그리고 남정원 회장을 만났더니 역시나 섭섭하다고 어찌나 뭐라 하는지 한참을 애를 먹었다.
이상철 장관은 여전히 강철같은 체력을 자랑하고 있었고, 기동이 형과 신호 형은 정화 재단의 핵심 중의 핵심으로 여전히 펄펄 날고 있었다.
당연히 재하 형도 만났다.
우리가 정화 스님을 만났던 바로 그 술집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