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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취사병-10화 (10/227)

10화 얼마나 크길래

“커허…… 헉…….”

온몸에 힘이 빠지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입에서는 단내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 이겼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리자드들이야 어느 정도 상대를 해 봐서 익숙하다지만, 대장, 치프틴은 달랐다.

단단한 비늘은 ‘최하급 단도 숙련’을 익힌 칼질로도 벨 수 없었고, 힘도 어찌나 강력한지 광일이를 포함한 전사 계열 각성자 3명이 붙고 나서야 겨우 비등비등한 싸움이 됐다.

안 그래도 인원수로는 우리가 불리한데, 3명이 치프틴한테 붙으니 다른 각성자들의 부담도 늘어났고.

‘게다가 약점을 알아도 활용할 수가 없으니.’

리자드들의 약점은 왼쪽 겨드랑이 부위.

정확히는 그곳을 아래로 찔러서 심장 근처 혈관을 베는 것.

그런데 신장이 2.5m에 달하는 치프틴 녀석은 겨드랑이만 해도 2m 근처에 있었다.

어떻게 찌르긴 한다 쳐도, 혈관을 베려면 아래로 찔러야 하니, 비슷한 크기가 아니면 애초에 약점이 되지 않는다.

‘피어’의 효과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병사들과 사수 각성자들이 전투에 합류해 다른 리자드들을 제거해 주지 않았다면 시체가 된 것은 우리였겠지.

“의무병! 빨리!”

“아, 아니. 이런 걸 저더러 어떻게 하라고…….”

“의무병이잖아! 이 사람들 죽으면 네가 책임질 거냐?”

‘……아니, 잘못하면 우리 중에서도 시체 나오겠네.’

다른 병사들과 사수들의 합류로 전투는 승리했지만, 애초에 유리한 전투가 아니었던 만큼 피해도 있었다.

전투에 참여한 각성자들 전원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상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대부분은 목숨까지는 지장이 없었다.

다만, 일부분은 지장이 있었다는 게 문제.

“한일이, 대원이…….”

둘 다 전사 계열 각성자.

정확히는, 광일이와 함께 치프틴을 맡았던 나머지 둘이었다.

‘가장 위험한 곳에 나서서 싸워 준 녀석들.’

한일이는 치프틴의 몸통 박치기에 맞고 날아가 벽에 처박힌 채 입에서 피를 흘리며 기절하고 있었고.

대원이는 치프틴의 날카로운 발톱에 복부가 뜯겨 나가 내장이 삐져나오려 하고 있었다.

‘저런 녀석들이 죽으면…… 다음부터는 아무도 나서려고 하지 않겠지.’

어떻게든 살리긴 해야 했다.

“의무병…… 이름이 의준이였나…….”

“시, 신영준 병장님? 아니, 저 물리치료 학과라서, 이런 건 치료하라고 하셔도…….”

“그런 거 아니고…… 하, 힘들어서 설명도 못 하겠다. 그냥 따라와.”

너무 힘들어서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어떻게든 이성을 붙잡고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향한 곳은, 리자드들의 사체들이 널려 있는 장소.

“이건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아, 찾았다.”

치프틴의 피어 때문에 원거리 공격이 잘 안 먹히긴 했어도, 몇 마리 정도는 접근하기 전에 사수 각성자들에 의해 전투 불능에 빠졌다.

그중에는, 전투는 불가능한 상태지만 목숨만은 붙어 있는 녀석들도 있었다.

내가 찾은 것은 바로 그런 목숨만 붙어 있는 괴물.

“야, 이거 살아 있다……. 이 칼로, 저기, 약점 알지? 거기 찔러…….”

의무병에게 내 사시미칼을 넘겨주고 바닥에 철퍼덕 쓰러져 앉았다.

도저히 힘들어서 못 움직이겠다.

칼을 받아든 녀석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벌벌 떨면서 빈사 상태의 괴물에게 다가가 약점에 칼을 쑤셔 넣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잘 될 텐데…….’

취사병인 내가 요리사로 각성했다.

사수 각성자들은 대체로 원래도 사격을 잘하던 녀석들이었고.

즉, 이 각성을 통해 주어지는 직업은 완전 랜덤이 아니라 어느 정도 규칙이 있다는 것.

‘이 세상이 게임처럼 바뀌었다면, 게임인데 그 직업군이 없지 않을 테니.’

과연 예상이 적중했는지, 칼을 쥔 의무병이 환호를 질렀다.

“돼, 됐습니다! 초보 치유사라고 합니다! 치료 스킬도 있습니다!”

“그래, 가서 대일이랑 한일이 좀 챙겨 줘라…….”

이제야 좀 쉴 수 있겠네.

“어, 그런데 이 치유 스킬, 1인용에다가 쿨타임이 하루인데…….”

“……우리 부대 군종병 있지 않았나?”

그렇게.

치유사와 사제.

두 명의 ‘힐러’ 계열 각성자들이 합류했다.

* * *

다음 날.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었다.

“생활관이네.”

리자드 사체들 사이에 철퍼덕 쓰러진 채로 기절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다른 병사들이 옮겨 준 모양.

“잘 잤…… 끄어어어억.”

잠깐 몸을 일으키려고 하니 온몸에서 격통이 몰려왔다.

하도 격렬한 전투를 치른 탓에 온몸에 쥐가 난 것 같았다.

“어, 영준이. 괜찮냐?”

“안 괜찮아…….”

격통에 비명을 지르고 있자니, 이민재 병장이 병사 한 명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중수야, 얘 죽으려고 한다. 치료 좀 해 줘.”

“옙.”

이민재 병장이 말하자, 옆에 붙어 있던 병사가 손을 모아 기도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중얼거렸다.

“신이시여…….”

그러자, 그 손에서부터 하얀 빛무리가 일더니 내 몸에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격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 녀석이 군종병이구나.’

“하하, 신이시여라니. 몇 번째 하는 짓이지만 참 어색하네요.”

멋쩍게 웃으며 말하는 군종병, 신중수 일병.

“그래? 군종병이면 그래도 나름 익숙한 거 아닌가?”

“아, 저 불교도입니다.”

“…….”

“아, 참고로 불교학과 출신이거나 스님 출신도 아닙니다. 그냥 3대째 불교 모태신앙이라 했더니 행보관님이 군종병 시키신 거라서요. 불교 출신에, 스님도 아닌 신도인데 사제로 각성했을 땐 제가 다 놀랐습니다. 하하.”

아무래도 이 ‘게임’의 전직 시스템은 좀 대충인 것 같다.

덕분에 살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럼, 거 괜찮나? 종교적으로 좀 그렇지 않아?”

“따지고 보면 이미 불살계도 어겼는데요 뭐. 게임한다는 느낌으로 하면 별생각은 안 듭니다. 이렇게라도 중생을 구원하면 그게 곧 불법을 행하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하하하.”

꽤 긍정적인 불교도였다…….

“아무튼, 고생 많았다 영준아. 이번 싸움은 네 덕에 이긴 거나 다름없어.”

군종병, 아니 사제를 내보낸 후, 민재 형이 말했다.

“그리고, 너도 로그 뜬 거 봤지?”

어떤 로그를 말하는 건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점령 어쩌고?”

리자드 치프틴을 쓰러트렸을 때 나타난 시스템 문구.

“그래. 아무래도 우리가 이 산맥을 점령한 것 같다.”

“산맥이라니, 우리 부대는 그냥 산맥의 봉우리 중 하나에 딸랑 위치한 거 아닌가?”

부대가 위치한 곳은 강원도의 험준한 대산맥 한가운데.

그 안에서 우리 부대의 면적은 산맥의 1%도 되지 못할 거다.

“뭐, 꼭 산맥 전체에 병력이 있어야 한다든가, 그런 건 아닌가 보지.”

민재 형의 설명은 이랬다.

“그냥 산맥의 봉우리 중 하나에 딸랑 위치한 게 아니잖아? 우리는 산맥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자리잡은 부대니까.”

“흠.”

“아마 이 산맥 전체에 병력이 퍼져있는 세력이 있다면 그건 저 리자드들일 거다. 하지만 점령전의 기준이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의미야. 그 지역의 상징적인 장소. 그곳을 누가 차지하고 있느냐도 영향을 준다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대충 이해는 된다.

산맥에 퍼져 있는 리자드들을 격파했으며.

이 산맥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소를 차지하고 있다.

그 두 가지가, 우리를 점령권자로 만들어주었다는 뜻.

“좋은 얘기는 그게 전부가 아니지.”

“응?”

“잘은 몰라도. 어제 그 전투로 적들도 꽤 큰 피해를 입었을 거야. 상징적인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 많은 영역에 퍼져 있는 녀석들. 두 세력 중에 우리가 점령권을 얻었다는 건, 놈들의 피해가 크다는 뜻일 테니까. 그렇다면.”

민재 형은 약간 흥분한 듯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역공을 노려볼 수도 있을지 몰라.”

“아니, 그건 안 되지.”

어제의 전투.

이런저런 상황이 겹치긴 했어도, 지형적으로는 우리가 유리했다.

방어선을 펼치고 수비를 하는 입장과 방어선을 뚫어야 하는 입장의 차이는 크니까.

그런 수비전 상황에서도, 자칫 잘못하면 이쪽이 전멸할 뻔했다.

“물론 네 말도 사실이지만. 우리도 각성자가 늘어나고 있잖아. 거기에 네가 어제 보여 준 버프까지 합쳐지면. 내 생각엔 역공도 무리는 아닐 텐데?”

“아, 그 버프는 기대 안 하는 게 좋을걸.”

“뭐?”

확실히, 어젯밤의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만든 요리의 엄청난 버프 효과 덕분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정도의 요리가 쉽게 나올 리가 있나.

“그때 각성자들한테 먹인 요리. 하나하나가 최소 4시간에서 길게는 7시간 정도 걸려서 만든 거야.”

“음.”

취사병들이 모아 놓은 질 좋은 재료를 죄다 때려 박고.

각성자들의 입맛을 하나하나 상세하게 조사하고.

요리 하나당 몇 시간씩의 정성을 들였기에 가능했던 버프다.

“저 거대 리자드가 쳐들어올 걸 걱정해서 미리 대비하려고 만든 거라 가능했던 거지, 다시 하라면 일단 재료부터 그 정도 질이 안 나와. 각성자들 숫자가 늘어나면 더더욱 불가능하고.”

“흠……. 그러면…….”

“일반적인 수준의 버프는 가능하겠지만, 그 정도로는 어제 그 싸움을 다시 한다고 해도 우리가 무조건 질걸. 수비전이라도 그 정도인데, 역공은.”

“불가능하단 거군. 어쩔 수 없지.”

좋은 재료들을 수급할 수 있게 된다면 모를까.

내가 여러모로 조사한 요리 스킬의 특성을 볼 때, 그 정도 버프는 한동안은 불가능하다.

“그럼 다음으로 할 얘기가…… 위 특전인데.”

“아! 그거. 결국 뭐 받았지?”

[대지역 - ROK 소속 인간의 첫 번째 ‘점령’입니다.]

[업적 달성! - 여기부터 저기까지 내 땅]

[1위 특전이 부여됩니다.]

처음으로 5인의 각성자, ‘파티’를 만들었을 때도 나왔던 업적 달성 문구.

그때는 3위였는데, 이번에는 1위다.

게다가 달성 업적부터가 파티 만들기 같은 소소한 것도 아니고, 무려 지역 점령.

보상도 엄청나지 않을까.

“이건 설명하기도 뭐하고, 네가 직접 보는 게 낫겠다.”

“응? 뭘 받았길래.”

민재 형의 말에 로그에 들어가, 1위 특전 부분을 클릭했다.

그러자.

[다음 중 한 가지 특전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1. 발라라크 공의 초대장

2. 기동요새 비마나

3. 느부갓네살의 열쇠

4. 심해의 부름

5. 등천로

6. 역천의 서

7. 부러진 직검

“……이게 뭔데?”

발라라크 공의 초대장?

그게 누군데.

부러진 직검?

어디에 쓰라고?

“그래서 우리도 아직까지 안 고르고 있었던 거야. 어떤 용도인지 알려 주긴커녕 제대로 된 설명도 없어서.”

자세히 살펴보니 설명창 같은 게 뜨긴 했다.

[부러진 직검]

[부러진 직검입니다.]

[심해의 부름]

[심해의 부름을 받습니다.]

이런 식이라서 문제지.

“그래서 말인데. 난 이거 네가 골라 줬으면 좋겠다.”

“응?”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민재 형.

“내가 고른다고 달라질 것도 없을 텐데?”

“어차피 정보가 없는 이상 뭘 골라도 복불복이겠지만. 그래도 네가 골라 주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다른 녀석들도 네가 골랐다고 하면 별 불만은 없을 거야.”

그렇게까지 말해도, 나도 아는 게 있어야…….

음.

“그러면 저거, 기동요새 비마나로 하자.”

“이유는?”

“그나마 이름에서 용도가 추정이라도 되니까? 이동하는 요새라고 하니, 거대 전차 같은 거라도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전차가 우리한테 필요한가?”

“지금은 필요 없어도, 곧 필요해질 것 같아서 말이지.”

부대의 식량 전반을 관리하는 나이기에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

‘머지않아, 부대를 버리고 이동해야 하는 때가 온다.’

그때가 되면 저 기동 뭐시기가 도움이 되겠지.

“이유가 있다면 됐어. 그럼 우리의 특전은 2번이다.”

[특전 - 기동요새 비마나를 선택하셨습니다.]

[비마나의 소환 권한이 ‘신영준’에게 부여됩니다.]

“소환 권한이라. 한번 써 볼까.”

생활관 앞의 공터로 나간 후 특전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비마나 소환.”

[소환에 필요한 공간이 부족합니다.]

“어, 공간이 부족하다는데.”

“생활관 앞 공터는 좀 좁긴 하지. 앞에 풋살장에서 해 보자.”

[소환에 필요한 공간이 부족합니다.]

“여기도?”

“연병장으로 가 보자. 우리 부대 연병장은 부대 규모에 안 맞을 정도로 큰 편이니까.”

[소환에 필요한 공간이 부족합니다.]

“…….”

“…….”

이거…….

얼마나 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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