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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취사병-14화 (14/227)

14화 김 중위 (1)

“병사들이 복귀한 것 같습니다, 형님.”

생활관 3층의 한방.

창문 블라인드를 살짝 열고 바깥을 살피던 사내가 말했다.

“흥, 이 오밤중에 단체로 밤 산책이라. 살판났구만.”

형님이라고 불린 사내가 답했다.

“……혹시 문제가 되진 않을까요?”

“큭큭, 그래 봐야 갓 스무 살짜리 아기들이야. 유일한 간부라는 녀석도 군인정신만 투철한 순둥이 같던데. 자기들끼리 작당을 해 봤자지.”

방에는 다섯 명의 남자가 각자의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것보다. 내가 확인하라고 한 거. 제대로 확인하고 있는 거 맞지?”

“예에. 몇몇 병사들한테 최대한 자연스럽게 물어봤습니다만, 아직까지는 각성자스러운 답은 없었습니다.”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 편하게 대화하는 사내들.

병사들이 방을 배정해 주는 과정에서 성별을 기준으로 먼저 나눈 뒤, 친한 사람들끼리 같은 방을 쓸 수 있게 조치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도 슬쩍 봤는데, 괴물을 처치할 때는 총을 쓰는 것 같더군.”

“제가 물어봤을 때도, 이상하게 여기는 경우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들 별 의심도 없이 답해 주는 것 같더군요.”

“그러면 역시 각성자는 없을 확률이 높겠군. 예정대로 하면 문제는 없을 거다.”

“예. 그럼 결행은 언제로 할까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며칠은 상황을 지켜보고 문제가 없을 거 같으면 바로 하는 거로 하자. 신중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예. 형님.”

* * *

부대원들끼리 모여 회의를 마친 다음 날 아침.

나는 조식 준비를 마친 후 식당 휴게실에 앉은 채.

목에 맨 군번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잘 차고 다니지도 않던 군번줄을 붙잡고 있는 이유.

갑자기 이 철 쪼가리의 감촉이 그리워졌다든가.

뭐 그런 건 아니고.

[클랜의 증표 - 리더]

[클랜의 소속원임을 증명하는 증표입니다.]

[소속 집단의 규모에 따라, 능력치 보너스가 주어집니다.]

이게.

이 게임으로 변한 세상에서 내가 처음으로 얻은 ‘장비 아이템’이기 때문.

‘클랜이라.’

지난밤.

회의를 통해, 우리 부대는 ‘파티’ 규모에서 ‘클랜’ 규모로 성장했다.

‘30명의 각성자와 한 명의 리더.’

30명의 각성자는 아슬아슬하게 기준을 충족한 상태였다.

치프틴과의 싸움에서 잡은 리자드 중 숨이 붙어 있던 녀석들은 전부 각성의 재료가 되었고.

그 후 쳐들어온 리자드들도 모두 각성에 이용했으니까.

본래는 리자드를 안전하게 제압하는 게 쉽지 않았다.

10마리가 쳐들어왔다 해도 그중 각성에 이용 가능한 것은 2마리 정도가 한계.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부대원들도 리자드들을 상대하는 데 익숙해지고.

각성자도 늘었으며.

‘무엇보다 힐러가 생겼으니까.’

리자드가 약간의 저항을 하더라도.

힐러들이 나서서 치료를 해준다.

꼭 리자드가 저항조차 못 하는 상태까지 몰아갈 필요가 없다.

공격해 오는 리자드의 잔당들은 모두 부대원들의 각성 재료가 되었다.

덕분에 각성에도 속도가 붙어 30명이나 각성할 수 있었다.

거기에 리더가 정해짐으로써.

우리 부대의 지위가, 클랜으로 격상된 것.

업적에 나타난 메시지를 보면.

클랜 규모의 단체를 만든 것은 ROK…….

즉.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두 번째.

그러고 보니.

5명의 각성자가 모여 파티 규모의 업적을 달성했을 때만 해도 3위 보상을 받았던 것 같은데.

‘한 팀은 우리가 제친 건가?’

우리가 이렇게 빨리 앞서 나가고 있다는 게 신기하긴 하지만,

‘나쁠 건 없지. 업적 보상도 훌륭하고.’

내가 쥐고 있는 이 군번줄이 바로.

두 번째로 클랜을 만들어 낸 업적의 보상.

[집단 스킬(증표)]

[집단의 상징물이 될 만한 물건을 선택해 증표로 삼을 수 있습니다. 증표는 해당 집단에 소속된 이들만이 착용할 수 있으며, 집단의 규모에 따른 능력치 보너스를 제공합니다. 보너스 수치는 집단 내의 지위에 따라 변동됩니다.]

“좋네.”

설명도 없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비마나’와는 다르다.

집단에 소속된 이들 전원에게 능력치 보너스를 제공한다는.

심플하면서도 강력한 효과.

리더급인 나는 말 할 것도 없다.

다른 각성자 병사들도 체감이 될 정도로 상승치가 쏠쏠했다.

내가 적당하게 힘을 줘서 만든 요리를 먹은 정도의 수치 정도?

‘부대원들 전원이 가지고 있고, 증표로 삼을 만한 게 군번줄밖에 없어서 아쉽지만.’

군번줄에 증표 스킬을 사용하자.

각성자들이 지니고 있는 군번줄은 모두 아이템으로 변했다.

거기 적힌 내용도 조금씩 바뀌었다.

군번이 적히던 부분에 클랜명과 직위가 들어갔고.

배경에는 작은 문양 같은 것도 생겼다.

군번줄.

목걸이 형태라 언제든지 휴대하고 다닐 수 있고.

소속을 증명하는 데도 좋다.

나름 다른 부대원들과 상의한 끝에 결정한 만큼.

솔직히 최선의 선택이라고는 생각한다.

“하필 개목걸…….”

아니.

군번줄이란 게 심적으로 좀 안타까울 뿐이지만.

하지만.

안타까운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왜 하필 내가.”

클랜의 조건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한 명의 리더.

그게 하필 나였다는 사실.

‘아니, 내가 왜 리더야? 취사병이 무슨 부대를 대표한다고.’

어젯밤의 회의가 끝난 후.

나는 민재 형을 찾아가 물었다.

‘가장 먼저 각성한 것도 너고, 각성자를 늘려야 한다고 부대의 방침을 정한 것도 너다.’

‘아니. 그런 건 그냥 운이 좋게…….’

‘괴물들의 약점을 알아낸 것도, 대규모 습격에서 가장 크게 활약한 것도.’

‘…….’

‘게다가 요리의 버프 효과를 늘려야 한다면서 부대원 입맛 조사한다고 개개인 면담까지 하면서 가장 자주 소통한 것도. 바로 너고.’

‘그건.’

‘이 정도면 네가 아닌 게 이상할 정도 아니냐?’

‘그렇긴 한데.’

조목조목 따지고 보니.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게 전부도 아니라고.

‘다른 각성자들은 총으로 어느 정도 힘을 뺀 리자드를 죽였지만, 너는 식칼 하나로 괴물을 죽였지. 그것도 두 마리나.’

‘말처럼 쉽지는 않았는데.’

‘습격 첫날, 네가 괴물의 피가 묻은 식칼 들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많은 부대원이 봤다.’

‘?’

‘네가 칼 한 자루만으로 총에도 버티는 괴물을 죽였을 정도로 강하다는 소문이 부대에 쫙 퍼졌지.’

아니.

그딴 소문이 어느 틈에.

‘여러모로 불안정한 상황이다. 우리 부대에는 강한 리더가 필요해.’

‘그게 나라고?’

‘그나마 광전사인 광일이가 비슷한 이미지지만. 녀석은 본래 성격이 너무 순하다. 나는. 으음. 내 입으로 말하긴 좀 뭐하지만. 인망이 그다지 좋진 않고.’

전쟁나면 이민재 뒤통수에 총부터 쏘고 본다느니.

그런 얘기를 듣긴 했지.

‘결국 너밖에 없어.’

민재 형은 며칠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른 부대원들의 의향도 물어본 결과.

반대할 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를 리더로 추대한 것이라고.

그저 살기 위해.

살아서 언젠가 내 식당을 열기 위해.

그 수단으로써 부대를 강하게 만들고자 고군분투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 모습이 부대원들에겐 다르게 비쳤나 보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데 거절할 수도 없고.’

결국 나는 리더 자리를 수용.

몇 가지 안건을 더 나눈 뒤에 회의를 파했다.

이제 부대원들은.

김 중위가 아닌 나를 지휘관으로 생각하고 움직인다.

과연.

식당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자니.

“충성.”

“그래, 부탁한 일들은 다 됐고?”

“예.”

한 병사가 나를 찾아왔다.

“부대 내에서 저희한테 직업을 묻는 경우, 절대 상태창의 직업을 말하면 안 된다. 이상한 티도 내지 말라. 잘 전했습니다.”

“잘 했어.”

“각성과 관련된 이야기도 최대한 함구하는 거로 전달 완료했으니. 다들 잘 대처해 줄 겁니다.”

이것은.

어제 회의에서 내가 제의한 안건 중 하나.

나는 태준이 녀석이 별을 보고 한 말을 떠올렸다.

‘이빨은 숨기는 게 좋을 거야.’

정작 태준이 녀석 또한 그게 정확히 어떤 이유인지는 모른다고 했지만.

발톱을 숨겨야 한다.

즉.

능력을 숨겨야 한다는 뜻임은 확실했다.

‘나에게 직업명을 물어본 그 남자.’

소름이 돋는다.

그가 뜬금없이 내게 직업을 물어봤을 때.

내가 생각 없이 ‘신입 요리사’라고 답변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내 경우엔 요리사라서 그나마 괜찮지만, 다른 녀석들이라면.’

직업을 묻는 게 뭐 그리 이상한 일이냐 싶을 수도 있지만.

만약 그 질문을 한 것이 또 다른 각성자라면.

질문의 의도를 달리 해석할 수 있다.

‘너도 각성자냐.’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별의 운행을 통해 천기를 엿보고, 어쩌구 하는 직업.

천문관으로 각성한 태준이 녀석의 경고를 들은 뒤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각성자들의 존재를 최대한 숨기되, 각성자를 늘리는 작업은 늦춰선 안 돼.”

“예. 어차피 괴물의 제압은 사수 각성자들 위주로 하고 있었으니 별문제 없을 겁니다.”

“사수 각성자들은 겉보기엔 그냥 총을 든 군인하고 차이가 없으니까 말이지.”

그냥 화력이 일반 군인의 수 배.

레벨과 스탯에 따라 수십 배까지 차이가 날 뿐.

“각성할 차례가 된 병사는 리자드의 사체를 옮기러 가는 척하면서 숨통을 끊고 각성하도록 할 테니, 숨기는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런데…….”

“다른 문제가 있나?”

“생존자들이 계속해서 대화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꼭 나눠야 할 이야기들이 있다고요.”

그러고 보니 그랬지.

“그, 여자분 말하는 거 맞나?”

처음 생활관에 생존자들을 안내했을 때.

우리에게 처음 대화를 요청했던 여자.

“예. 보기와 다르게, 그 여자가 생존자 집단의 리더 역할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대화라…….”

저들은 우리의 대표를 김 중위라고 생각하고 있는 상황.

대화의 장에 나서야 하는 것도 김 중위겠지만, 당장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쩔 수 없지. 김 중위는 나한테 맡겨.”

“정말 괜찮겠습니까? 차라리 김 중위를 빼고 저희끼리 가는 게 낫지 않을지…….”

“이런 상황이니까. 최고 지휘관이 직접 나서 주는 게 좋지.”

그렇다고 김 중위가 마음대로 우리를 지휘하게 둘 생각은 없다.

약간 수를 쓸 필요가 있겠지.

“생존자들도 대표를 정해서, 3일 뒤, 저녁 식사 후. 생활관 2층 회의실로 와 달라고 전해.”

“예.”

“아, 우리 쪽에서 회의에 참여할 병사들한테는, 가급적 우리 부대의 상황에 대한 건 어떤 부분이라도 누설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전해 주고.”

“알겠습니다.”

그럼, 생존자들에게 얘기를 전하는 건 저 병사가 잘해 줄 테니.

“나는 내 할 일을 해야겠지.”

미뤄 뒀던.

서열 정리를 할 때가 왔다.

* * *

나는 작은 쟁반에 몇 가지 요리를 담은 후, 식당을 나섰다.

이번에는 특별히 공들여 만든 요리들.

‘특히 평상시보다 재료 면에서 자유로웠지.’

덕분에 좀 더 마음껏 실력을 발휘하여 만들 수 있었다.

쟁반 위에 올라간 그릇들만 해도.

군대 식당 기준으로는 고급스러운 것들뿐.

취사반장의 휴게실에 있던 걸 꺼내 온 물건들.

타 부대의 간부들이나 장성급 인사들이 시찰을 올 때나 쓰던 그릇이다.

그렇게 화려하게 만들어진 음식들을 들고 향한 곳은.

어두컴컴한 식당의 지하실.

낡은 전등 하나만이 덜렁거리고 있는 삭막한 공간이었다.

구우웅

거대한 기계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

각종 보일러 장치와 수도 장치, 발전기 등이 돌아가는 진동음만이.

이 작은 지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말이 지하실이지, 사실상 보일러실 같은 곳이니까.’

지하실은 식당 건물에 난로와 온수, 전기 등을 공급하기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다만.

설계 당시에 필요 이상으로 크게 지은 것인지.

꽤 넓은 공간이었기 때문에, 각종 기기들의 옆에는 여러 가지 비품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존재했다.

주로 시설병들이 비품을 저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도별로 분류된 작은 창고들.

그 숫자가 총 7개.

‘감방으로 쓰기엔, 적당한 숫자.’

일반적인 군대의 경우.

감옥을 대신하는 개념으로 영창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 부대는 규모가 작고.

상위 부대에 속해 있는 하위 대대.

개별적으로 운영되는 영창 시설이 존재할 리가 없다.

‘병사가 영창에 갈 일이 있으면 상위 부대의 영창에 들어갔지, 보통?’

그래서 영창을 대신할 감옥 시설로 선택한 곳이.

바로 이곳.

식당 지하실의 창고 7곳을 개조.

임시 수감시설로 사용하기로 했다.

나는 그렇게 개조된 창고 중.

한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안에 있는 것은.

이 감옥의 첫 번째 이용객.

“여, 영준이냐?”

“안녕하십니까.”

우리 부대의 유일한 간부이자, 최고의 폐급 간부였던 남자.

“김 중위님.”

김 중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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